Procrustes 식 사고 – 이래선 안됩니다.

프로크루스테스식 사고

그 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가 있습니다. ‘늘이는 자’ 또는 ‘두드려서 펴는 자’를 뜻하며 폴리페몬(Polypemon) 또는 다마스테스(Damastes)라고도 합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로 태어나 아테네 근처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하여 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버려 죽였다고 합니다.

 이 신화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 및 ‘프로크루스테스 체계(Procrustean method)’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이 말은 융통성이 없거나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비유하는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자신을 절대화하는 비윤리적인 사고로 만연되면 이웃과 사회에 심각한 피해를 줍니다. 요즈음 언론에 보도되는 정치인의 말이나 정치적 문제를 접근하는 일부 언론의 보도 태도를 보면 프로크루스테스식 사고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편가르기를 하여 자기편이면 무조건 옳고 남의 편이면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봅니다.

518년 간 존속했던 조선시대의 붕당 정치가 재연되는 것과 같습니다.

 왕조나 나라는 다 수명이 있습니다.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는 기득권자인 사대부들의 붕당정치로 쇠퇴기를 맞이했고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기득권자인 그들은 피지배계급인 농민들 위에 군림하며 기생충처럼 권리는 누리며 의무는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병역의 의무를 졌지만 나중에는 병역의 의무마저 외면해 버렸습니다.

 나라의 운명이나 백성의 안위를 위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결국 자신과 가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붕당의 당론에 움직였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론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양반들은 당쟁이 격화되면 왕명이 아니라 당명을 따랐습니다.

임진왜란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사대부들은 동서 분당으로 정권 창출을 위한 혈전을 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는데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고 했던 황윤길 보고는, “침략의 조짐이 없다”는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묻혀버렸습니다.

 황윤길은 야당인 서인인 반면 김성일은 집권당인 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보마저 당리당략에 묻혀버린 것입니다.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숙종 때의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서인이 계속 집권하였습니다.

북벌정책을 감행한 효종은 사대부들에 의해 북벌도 군비 확장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게되었습니다. 이들이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명목상의 이유는 백성들의 민생을 먼저 생각하라는 이른바 안민책이었습니다.

 당시 농민 생활의 파탄의 주범은 군비 확장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금 체계였는데 양반들은 농민들을 짓누르던 군역을 면제받으면서 불균등한 조세 체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는 극력 반대하였습니다.

 기득권자인 그들은 농민 생활의 피폐를 구실로 군비 확장에 반대했습니다. 이들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군비 확장도 북벌도 공염불로 끝날 것을 안 효종이 자신의 정권을 산당에게 넘겨 북벌을 적극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만 효종의 급서로 정권을 내어 준 보기 드문 군주와 신하 사이의 대타협은 끝이 나버렸습니다. 사색 당파는 경종 때 이르러 신하들 사이의 투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의 정면 대결로 양상이 바뀌어졌습니다.

 경종은 소론 군주였고 영조는 노론 군주였습니다. 정조가 즉위하자 자신들이 불리한 노론은 정조를 살해할 음모를 저질렀습니다.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국왕에 대한 충성이란 기본 원칙은 살아졌고 당론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국왕은 전 조선의 국왕이 아니라 한 당파의 당인으로만 인정되었으며, 자파의 국왕이 아닐 경우 국왕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정조와 노론은 이미 군신 관계가 아니라 정적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정당 정치를 보면 모양만 바뀌었을 뿐 마치 조선시대의 붕당 정치가 재현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경쟁 사회에서 정당이 정권을 잡기 위한 침대를 마련하고 그 침대에 맞추어 무차별적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특정 정당의 정당지같은 일부 언론들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준비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정당은 정권창출보다 국민 봉사가 우선해야 하고 언론은 언론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정당이나 언론이 프로크루스테스식 사고에 매몰되면 결국 국민이 불행해 집니다.

며느리나 딸이나 다 한 가족입니다.

사위가 집안일 하는 건 기특하고 아들이 집안일 하는 것은 분노하며, 딸네 시어머니 오실 땐 어른이 주책이 없는 거고 당신이 아들집에 오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면 프로크루스테스식 사고입니다.

 매사 딸에 대하여는 호의적이고 며느리에 대하여는 전투적인 프로크루스테스식 사고방식의 노예가 된다면 가정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정당이나 언론이나 무엇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를 고민할 때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은 그가 여행자들에게 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글 보낸이: 박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