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말하는 “애급” – 이집트 역사 5000년 요약

한 장으로 요약한 이집트 5000년 역사



 



  

이집트 5000년 역사 중 전반기 2500년간은 이집트인,
그 뒤 2500년간은 외국인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 집트는 흔히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린다. 여러 민족과 종교가 이 땅을 스쳐갔다. 5150여 년 전 최초의 통일국가가 일어나고,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한 4700년 전 古王國 시대부터 계산하면 고대 이집트人, 아시리아人, 페르샤人, 그리스人, 로마人, 비잔틴 사람들, 아랍人, 맘루크(투르크계의 노예 戰士), 오스만 투르크人, 프랑스人, 알바니아人, 영국人이 잇따라 이 땅의 주인행세를 하였다. 종교도 자주 바뀌었다. 고대 이집트 종교, 그리스-로마의 多神敎, 기독교, 이슬람이 交代하였다. 지금은 약90%가 이슬람, 10%가 기독교인(콥트)이다.

고대 이집트가 역사에 등장한 서기 전 3150년부터 페르샤의 屬國이 된 기원 전 525년까지 약2600년 간 이집트는 外勢의 침략을 막고 매우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 아시리아가 서기 전 670년에 쳐들어왔지만 곧 토착세력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26세기에 걸친 안정된 문명은 人類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 이다. 이 기간에 이집트는 가장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문명을 유지하였다. 이집트의 문화재가 많은 이유도 평화와 번영의 시기가 길었던 덕분이다. 그렇게 많이 약탈당하고도 이집트에 남은 遺跡과 유물은 찬란하고 방대하다. 발굴되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페르샤에 정복된 기원 전 525년 이후 약2500년간 이집트는 外勢통치를 겪었다. 이집트 5000년 역사 중 전반기 2500년간은 이집트人, 그 뒤 2500년간은 외국人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1952년 나세르가 주도한 자유 장교단의 쿠데타로 알바니아계 王家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건은 서기 전 6세기 이후 2500년 만에 처음으로 이집트人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 돌아온 것을 뜻하였다.

시 저,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연애를 하고, 기원 전 30년에 독사에 물려 자살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人이 아니고 그리스人이다. 이 클레오파트라 7세는 프톨레미 王朝의 마지막 왕이었다. 프톨레미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다. 대왕이 죽은 뒤 이집트를 차지, 王朝를 세운 뒤 서기 전 305년부터 서기 전 30년까지 275년을 통치하였다. 이들은 그리스人이었지만 이집트化 하여(북방 민족이 중국! 을 차지한 뒤 중국화 하듯이) 古代 이집트의 전통을 이어갔다. 왕도 고대 이집트처럼 파라오로 불렸다. 이집트의 중요 유적을 복원, 재건한 것은 프톨레미 王朝였다. 당시 수도는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지시로 만든 이 도시에는 수많은 학자, 예술人들이 모여 들고 古代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들어서는 등 그리스-로마 세계의 학문적, 사상적 중심이 되었다.

기원 전 30년에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옥타비우스(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패전, 자살한 사건은 古代 이집트의 종언을 뜻한다. 이집트는 로마영토가 되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는 4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기독교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였다.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고 마가복음을 쓴 마가가 이 도시로 와서 교회를 세웠다. 이 신도들을 콥트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은 거의가 이들이다. 자신들을 세계 最古의 기독교라고 여긴다. 三位一體 등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인들이 발전시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공식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집트는 로마가 동서로 갈라지자 동로마제국(비잔틴) 영토가 되었고, 아랍족이 이슬람으로 무장,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에서 쳐들어와 비잔틴 세력을 몰아내고 이집! 트를 점령한 7세기 초까지 기독교 국가였다. 7세기 초부터 21세기인 지금까지는 이슬람.

이집트를 사람 몸에 비유하면 下體는 古代 이집트, 허리는 그리스-로마, 가슴은 이슬람, 머리는 西歐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 多인종, 多문화, 多종교 사회이다. 이런 복잡성을 구현하는 도시가 카이로이다. 피라미드, 모스크, 교회가 공존한다. 지금의 이집트는 1400년간 계속된 이슬람 세력 통치의 영향을 많이 받아 겉으로는 이슬람 문화이다.

1400년간의 이슬람 통치 기간중에 아랍족이 지배민족이었던 시기는 짧았다. 1250년 경 투르크 노예戰士 집단인 맘루크가 쿠데타로 집권, 王朝를 세워 16세기 초 오스만 투르크에 망할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特記할 만한 사건은 서구, 중동으로 밀려들던 몽골 騎馬군단의 進軍을 저지한 것이 맘루크의 騎馬군단이었다는 사실이다. 1260년 이집트의 맘루크 기마군단은 바이바르스 장군의 지휘 하에 지금의 이스라엘(당시는 이집트 영토)에 있는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군대와 결전, 승리하였다. 맘루크는 몽골의 騎馬術과 비슷한 戰法을 익힌 집단이었으므로 유럽의 기사들처럼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장군은 이집트를 원정, 일시 점령하였다. 교양 있는 이 영웅은 수백 명의 학자들을 데리고 와서 이집트의 유적과 문화를 조사,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는 피라미드 앞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4000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고 연설하였다. 그는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 ‘왕의 방’을 구경하고 나왔는데 큰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창백하였다고 한다. 이집트의 고대 문명을 유럽에 알리는 데는 나폴레옹의 이 원정이 결정적 계기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 문명을 지켜냈고 나폴레옹은 잊혀진 그 문명을 다시 드러냈다.

오스만 투르크 치하의 알바니아에서 태어난 무하마드 알리가 1805년에 이집트의 총독이 되더니 사실상 독립국처럼 다스렸다. 이집트 사람들은 무하마드 알리를 이집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칭송한다. 알리가 지은 모스크는 카이로 시내를 내려다 보고 멀리 피라미드까지 보이는 언덕 위 요새 시타델 안에 있다. 이 모스크엔 그의 무덤이 있다. 모스크로 올라가는 길목은 골목처럼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맘루크의 잔존세력이 최후를 맞았다.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의 근대화 개혁을 반대하는 맘루크 귀족들을 식사에 초대한다면서 소집하였다. 400명이 넘는 맘루크 귀족들이 ! 골목을 지날 때 양쪽에 매복하였던 군인들이 총을 쏴 沒殺시켰다.

무하마드 왕조의 이집트는 1882년엔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집트는 1922년에 정식으로 독립하나 영국 군대는 1954년까지 이집트에 주둔하였다.

1952 년 민족주의 열정으로 무장한 자유 장교단이 나세르의 주도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알바니아 계열의 마지막 왕 파루크를 몰아내고 공화국을 세웠다. 이집트가 서기 전 6세기 페르샤에 망한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인이 지배세력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 군부가 배출한 세 사람이 나세르, 사다트, 그리고 무바라크이다.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左서 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