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그 신하들
세종대왕은 복이 참 많으셨던 분이었다. 셋째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그 첫 번째 복이다.
두 번째 복은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버지 태종이 왕권행사에 방해가 될만한 장애요인들을 말끔히 정리해 주었다는 점이다. 먼저 태종이 자신의 왕권쟁취에 목숨 걸고 도와준 민무구 등 네 처남들 – 세종에게는 외삼촌 –을 모두 賜死(사사)시키고, 세종의 장인 심온도 처형시켜 세종의 통치에 걸림돌이 될만한 모든 외척들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세도부릴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시켰던 것이다.
말하자면 아버지 태종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악역을 맡아 세종에게는 탄탄대로를 마련해준 셈이다.
세 번째 복은 장남인 양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아버지의 뜻과 두 형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아버지와는 달리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을 겪지않고 무난하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점이다.
네 번째 복은 세종대에는 충성스럽고 실력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라성처럼 많았다는 점이다.
이들 신하들은 세종시대 뿐만 아니라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 아니 반만년 우리 역사상에도 이름을 떨친 현신(賢臣)들이었다.
각 분야별로 세종의 신하들을 살펴보자.
세종 때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인재를 발탁, 육성하고 백관(百官)을 통솔해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어간 인물로는 황희, 맹사성, 허조 등 세 사람의 정승이 있다.
청렴, 배려와 관용, 그리고 소신과 원칙의 리더십을 발휘해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낸
황희는 충녕 –나중의 세종 – 의 세자책봉을 끝까지 반대, 태종에 의해 귀양갔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다시 불러 영의정을, 그것도 18년 간이나 시킨 세종의 영도력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부드럽고 유연한 좌의정 맹사성은 강직하고 정확했던 황희와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최 고위직의 두 정승이 다 청백리에 올랐으니 나머지 관리들이 심복(心服)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최영장군의 손자사위이기도 한 맹사성은 태종의 사위를, 왕에게 보고도 않고 취조했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한 인물이기도 하다.
허조는 주로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이조판서 등 인사관리를 맡아 관리의 선발, 양성,
그리고 기강확립에 한 몫 한 인물이다. 신숙주, 사육신인 하위지도 그가 발탁한 인물이다.
태종 때는 강직한 발언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끝내는 그 강직함을 인정받아 복직,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예악(禮樂)제도 확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세종의 신하들로는 세종 제일의 위대한 업적이자 5천년 민족역사상 가장 큰 업적이요, 발명품인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먼저 꼽아야 할 것이다. 사육신으로 더 잘 알려진 성삼문, 박팽년, 이개와 신숙주, 정인지, 최항, 강희안 등이 그들이다.
특히 성삼문과 신숙주는 정음 창제를 위해 열세 번이나 중국을 다녀올 정도로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총 출동하다 싶이 해서 한글이라는 걸작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외교부문에는 신숙주와 변계량이 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 거사에 가담하지 않아 부인으로부터도 변절자란 소리를 들어야만 했고,
그를 빗댄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외국어에도 능통했으며
명나라, 일본, 여진 등을 여러 차례 드나들면서 이들 나라의 지도를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특히 일본의 문물과
정치상황 등을 소개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어문학자요, 외교가, 뒤에는
삼정승을 두루 역임한 행정의 달인이기도 했다.
신숙주가 외교사절로 대외적 외교활동에 주력했다면 변계량은 예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 20년에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 안에서 조선의 외교를 뒷받침했던 인물이다. 변계량은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었던 당시의 국제질서 아래에서 조선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고 주장한 보기드문 자주적 인물,
아니 어떻게 보면 무엄한 인물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세종시대의 국방에는 동북면의 6진을 개척한 김종서와 서북면 4군을 설치한 최윤덕, 그리고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가 있다.
단종을 지키려다 세조에게 격살된 김종서는 영화나 드라마로 우리에게 더 친근하지만 여진족을 호령하며 지은 호기가(豪氣歌)는 오늘에도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것이 없애라
최윤덕은 김종서에 가려 빛이 바랜 면도 있지만 김종서가 함경도와 두만강 방면이라면
최윤덕은 평안도, 압록강 방면의 북방개척사업을 벌인 공로로 세종 때에 좌의정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앞의 두 사람이 주로 북방개척사업에 종사했다면 이종무는 남방개척사업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고려 말에서부터 그의 아버지와 더불어 왜구를 격파해 오다가 단기 3752년(1419, 세종원년)에
전함 227척을 동원해 대마도를 정벌한 역사적 인물이다. 대마도를 다시 돌려줌으로써 그의 공도 빛이 바래긴 했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확정된 것은 세종 때의 일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을 때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이 국경이었으며, 고려 때는 청천강까지 치고 올라갔을 뿐,
한반도를 다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종이 북방개척사업으로 압록강, 두만강까지로 영토를 확장한 것은 잘 한 일이었지만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를
완전 정복하고서도 이를 다시 일본에 돌려준 것은 세종 일생일대의 패착이었으며 천추의 한이라 하겠다.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은 조선조 오백년 최고의 전성기에 달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국가에서
과학기술이 꽃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탁월한 안목과 장영실의 덕분이었다.
장영실의 아버지 계통은 고려 말부터 과학기술 분야의 고위관직을 역임했지만 어머니가 기생이라
그는 동래현의 관노(官奴)로 인생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의 유전자를 타고난
그의 실력은 일찍부터 중앙에 알려졌다. 드디어 세종의 주선으로 중국유학을 하고 귀국해서는 세종의 특명으로
관노의 신분에서 벗어나 바로 정5품직을 제수(除授)받는다. 세종의 은전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그는 마음껏 실력을 발휘,
세계 최초의 우량계(雨量計)인 측우기(測雨器)와 우리나라 처음의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발명하고
혼천의(渾天儀), 앙부일구(仰釜日晷) 등 수 많은 과학기술 발명품을 내 놓는다.
박연과 함께 여러 가지 악기도 제작했음은 물론이다.
세종대의 음악 등 예술 분야는 박연이 담당했다. 그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의 관리가 되었으나
세종대에는 악사(樂事 : 음악에 관한 일)를 맡아 보게 되자 악기 조율과 제작, 악보편찬,
궁중음악 개혁 등으로 실력을 만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론 벼슬도 예문관 대제학까지 오른다.
이렇게 보면 세종은 중용을 실천한 유가적인 인물인 황희, 소타고 피리부는 도가적 인물인 맹사성,
원칙을 강조한 법가적 인물인 허조, 그리고 문장과 예법에 밝은 불가적 인물인 변계량까지, 유불선(儒佛仙)에다가
법가(法家)적 신하들을 골고루 등용한 복많은 임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세종대왕을 일러 성군(聖君)이라 부른다. 그러면 세종시대는 태평성대(太平聖代)임이 분명하다.
이상시대로 꼽는 중국의 요순시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이에 버금가는 강구연월(康衢煙月)의 시대가
존재했던 것이다. 세종은 분명 왕조시대의 전제군주 였지만 신하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영명한 지도자 였고,
신하들도 각자 전문분야의 테크노클라트로서 소신과 원칙에 따라 국정을 수행했기에 이와 같은 시대가 가능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