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해설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신학)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마 6:9)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올바른 기도의 한 모범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방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시고 난 후에 그 대안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어떠하였는가? 그들의 기도는 한 마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외식적(外飾的) 기도였다(마 6:50-5). 곧 그들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든지, 사람들이 들으라고 설교하듯이 하는 기도 같은 것은 다 잘못된 외식적 기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이방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였다(마 6:7).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그렇게 반복해서 기도하면 자기의 마음속에 이만하면 됐다 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기의 감정(感情)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한국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도 이처럼 감정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별 생각 없이 “주여 주여”를 반복한다든지, 특별한 이유 없이 목소리를 높여서 고함을 지른다든지 하는 것들은 다 자기의 감정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시정해야 할 요소들이다.
올바른 기도는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나 자기의 감정에 의지하여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아무리 작은 소리로 말한다 할지라도 다 듣고 계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진실하게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고서 그분 앞에 조심스럽게 아뢰는 진실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이란 말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초월적 존재이심을 나타낸다. 이는 곧 이방인들이 내재적(內在的) 신관을 가지고 자기 안에서 신적 능력과 기도 응답을 찾으려는 잘못된 태도를 배제하는 것이다. 오늘날 참선이나 요가나 기(氣) 수련 같은 것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신적인 잠재력을 개발하려는 노력으로서, 여기에는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이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아버지이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언제든지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그러므로 그분과 교통하는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곳에 이미 하나님은 임재해 계시며 그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것이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마 6:9)
주기도에서 첫 번째 간구 내용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냥 “이름이 …”라고 되어 있어서 누구의 이름인지 모호하지만 원문에는 분명하게 “당신의 이름이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 “당신의”라는 말을 빼 버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말 어법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며 원어에는 ‘당신의’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거룩’이란 단어는 원래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하고 완전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거룩’이란 원래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인데, 이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을 ‘성물’(聖物)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드린 날을 ‘성일’(聖日)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거룩’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뜻을 가진다. 나아가서 원래는 깨끗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된 자들을 가리켜 ‘거룩한 자들’(聖徒)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칭의적 측면에서의 거룩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어떨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렇게 된다. 곧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할 때 그렇게 된다. 따라서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의 구체적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기도 제목이다. 그래서 이것이 주기도에서 제일 먼저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걸린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가장 안타깝게 여기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구하였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벌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간구하였던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 14:7).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이키시는 궁극적 이유도 곧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아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겔 36:21-23).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의 유익을 우선시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 목회자들 중에서도 정말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각 교회는 모든 것을 자기 교회 중심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교회가 잘 되고 자기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면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개의치 않는 교회가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두고 안타까워하는 성도가 너무나 적다. 옛날의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처럼 비록 자기에게 손해가 되고, 심지어 자기 나라에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일어서서 외치는 성도들이 아쉽다. 그래서 오늘도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기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한 기도가 되고 있다.
3. 나라가 임하옵소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6:10)
주기도 중 두 번째 간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원문에는 “당신의”가 들어 있어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가 정확한 번역이다. 곧, 불의한 이 세상의 나라들 가운데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또 다른 나라가 오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역적이요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적인 방법으로 정변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세상의 통치자들이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엄청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된다. 이 세상의 어떤 혁명보다도 더 근본적인, 아니 전혀 다른 체제와 질서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인데,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거기에는 또한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있다. 땅의 요소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눅 17:21). 따라서 현세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땅의 요소를 말하기 곤란하다. 그렇지만 내세에는 분명히 장소로서의 천국(천당 또는 낙원)이 있으며, 종국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징은 ‘의’(義)이다(벧후 3:13, 롬 14:17). 비록 현세의 하나님 나라는 불완전하고 의가 완전히 실현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현세에서는 ‘교회’라고 볼 수 있다)의 주요한 특성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종국적인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불의와 고통과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는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재림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본다. 곧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도래를 가리킨다고 본다. 즉, 이 기도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럽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주기도의 간구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하고 만다면 주기도의 의미를 상당히 축소시키고 말 것이다. 주기도의 간구는 물론 종말에 단번에 임할 사건도 가리키고 있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는 사건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오늘날 우리들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기도이다. 이는 곧 교회의 전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좀더 강력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이다. 나아가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 된다. 비록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아니하며 늘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 땅에 사단의 통치가 물러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마 12:28).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기도에 합당하게 살도록 힘써 노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4.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앞의 간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간구에는 하늘과 땅의 상태가 분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곧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이루어졌지만, 이 땅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이 세상은 아직도 사단이 상당한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고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세상은 어느 정도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눅 4:6), 특히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엡 2:2).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온 우주의 왕이시며 이 세상 만물의 주관자로서 모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신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세상은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 은혜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도리어 헛된 우상을 섬기며 죄와 불의를 행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는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