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어떻게 편찬 됐나 ?
“여기에는 하나도 보태고 뺄 것이 없으며, 그런 자는 재앙을 받을 것”(요한계시록 22: 18-19)이라고 말한 성서는 과연 무오류 일까. 영적 부분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오역(誤譯) 사례는 가끔 눈에 띈다. 예컨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마태복음 19: 23-24)는 구절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밧줄로 바늘귀를 끼는 것보다 어렵다’의 명백한 오역이다. 히브리성경 원전의 낙타(Kamelos)와 밧줄(Kamilos)의 스펠링이 비슷했기 때문에 생긴 오역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후자가 상징적이고 순리이다. 신복룡 교수(건국대 정치외교사)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요한복음 1: 1)도 ‘태초에 하느님께서 뜻하신 섭리(Logos)가 있었느니라’로 번역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최근 예수를 추종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아기를 낳았다는 가설에 근거한 소설 ‘다빈치 코드’와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면서 가뜩이나 뒤숭숭한 기독교계에 이번엔 2000년 동안 존재 여부를 놓고 뒷말이 무성했던 유다복음이 공개돼 성서 무오류주의자들을 머쓱하게 하고 있다. 사실 기독교계는 지금도 성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손을 빌려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유 다복음은 가롯 유다의 배반이 없었다면 인간의 구원을 이루려는 신의 계획도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등 제자의 배반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담고 있다. 즉, 유다복음은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것은 예수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구원사역의 완성을 위한 귀중한 도구가 됐다는 것이다. 기존의 성서 내용과 해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충격 그 자체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 해양학자는 예수가 갈릴리 호수 물위를 걸었다는 성경 기록은, 사실 물위가 아니라 얼음 위였다는 과학적인 연구성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생태 기후학자 도란높은 최근 “2000년 전 당시의 생태, 기후학적인 연구로 갈릴리 호수는 겨울에 얼음이 얼었으나 호수의 서쪽 연안에 소금물이 솟는 샘이 있어 가장자리는 얼지 않았다”며 “이론과 성경의 관련성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언 호수 위로 사람이 걸을 수 있었던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교계는 물론 발끈하고 있다.
유다복음의 공개를 계기로 기독교계의 도그마로 그 동안 논의조차 금기 시 했던 성서 66권 한정론과 무오류론의 문제점을 짚어볼까 한다.
◆성경 66권은 어떻게 정해졌나
성 서 첫 장인 창세기와 맨 뒤에 있는 요한 계시록은 약 1600년간의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집필, 편찬됐다. 마치 삼국유사와 난중일기와 인간시장, 그리고 미실을 함께 묶어 놓은 것과 같이 시공을 달리하는 서로 다른 필진의 글을 한 권으로 만든 것이다. 어떤 글은 농부가 썼고, 어떤 것은 학자가 썼으며, 또 어떤 것은 왕이 쓰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정경으로 인정하고 사용하는 성서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등 모두 66권이다. 그러나 이보다 역사가 앞선 기독교 형님 종교 격인 가톨릭교회는 여기에 외경 7권을 합쳐 73권을 정경으로 삼고 있다. 가톨릭은 물론 외경이라고 하지 않고 제2경전으로 부른다.
예 수 생존 당시 구약은 크게 2가지 사본이 있었다. 하나는 히브리어 사본이고 다른 하나는 희랍어 사본이다. 그런데 당시엔 희랍어가 주로 쓰였기 때문에 히브리어는 죽어 가는 글이었다. 희랍어 사본은 흔히 ‘70인역’(일명 알렉산드리아 번역판, 원래는 72인이 번역했음)으로 불린다. 이 사본은 기원전에 쓰여진 흔적이 명백하다. 사해문서 등 기타 문헌에도 70인역을 인용한 흔적이 있다. 70인역은 외경을 포함한다.
신약성서에 인용된 거의 모든 문장은 70인역에서 인용되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개신교계에서도 인정하는 마태복음 1장 23절. “그런 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그러나 이 구절은 히브리어판 이사야서 7장 14절에는 ‘처녀’라는 단어 대신 ‘알마’(소녀)로 되어있다. 물론 70인역에도 ‘처녀’로 나온다. 마리아의 처녀 잉태설도 흔들릴 수 있다는 성서적 증좌이다.
기 독교는 외경을 무시하지만 집회서는 교회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인용돼 왔다. 집회서는 특히 이방인을 개종시키는데 사용돼 왔다. ‘에클레시아 스티커스’라고 불려진 집회서는 가톨릭 공동체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경전을 정할 때 집회서를 뺐다.
그럼 외경은 왜 기독교와 유대교 정경에서 탈락했을까.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소개한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를 보면, 꿈란의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통해 예수가 살던 상황을 어느 정도 소상하게 알 수 있다. 당시 정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마치 일제가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1940년대 초기나 1970년대 위수령 내려진 서울의 대학가랄까. 식민 지배하던 로마를 상대로 적대적 투쟁(게릴라전)을 주도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평화의 주님을 원하지 않았다.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를 원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였던 예수는 끝내 무력혁명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로마와의 독립운동에 참패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시련이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원 후 90년에 성경을 다시 정하게 된다. 역사적인 이 회의가 바로 잠비아 원로회의이다. 즉 구약 정경은 가톨릭이나 기독교가 아닌 유대인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잠 비아 원로회의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것 ▲토라(모세5경)와 일치하는 것 ▲기원전 400년 이전의 것으로 에즈라시대 이전의 것 ▲팔레스타인에서 쓰여진 것 등 4가지를 구약 확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기독교가 주장하는 성경 66권은, 실상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정한 것이다.
가톨릭은 정경을 아주 오랜 경험을 토대로 정한다. 콘스탄틴 대제 이전에는 수많은 글이 난무해 정경을 정하지 못했다. 그 결과 여러 교파들이 판을 쳤다. 황제에 오른 콘스탄틴은 서기 313년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337년 사망할 때까지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정경 형성의 기반을 닦았다. 이 터전 위에 382년 다마수스 교황 때 로마에서 열린 첫 번째 원로회의에서 73권의 성경 목차를 정했고 포고했다. 성 어거스틴이 참가한 가운데 이어 열린 카르타즈 원로회의에서 성경 73권으로 다시 한번 확인되고, 최종 확정된 것은 교황 빈센트 1세가 공식 정경으로 정한 405년이다.
종 교개혁을 통해 가톨릭에서 개신교를 분리, 독립시킨 루터는 유대인들이 정한 구약 정경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 66권을 확립했다. 그러면 루터는 과연 왜 구약을 정할 때 가톨릭이 정립한 정경 73권을 무시하고, 유대인의 방식을 따랐을까. 이는 아마 그가 프로테스탄트 하기 위해선 가톨릭이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가톨릭의 전승 등 역사적인 것을 무시하지 않고선 새로운 교단(개신교)을 설립한 근거가 미약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루터는 나아가 “야고보서는 성경에서 빼도 좋다”는 말까지 남겼다. 성서가 하느님과 예수의 경전이기도 하지만, 유대인과 콘스탄틴 대제의 성서, 루터의 성서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약 성경의 기록과 정경화 과정
히브리서 기자는 히1:1에서 “우리들에게, 옛적에 하나님께서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옛적에’란 예수가 세상에 오기 전인 구약 시대를 말한다.
1)모세 오경
모 세는 당시 세계 최강국 애굽의 왕자로서. 애굽의 모든 문화와 학문을 배웠다. 하느님은 이런 모세를 통해 모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기록하게 했다. 그리곤 기록을 언약궤 옆에 두라고 일렀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들은 이 기록을 읽지 않고 방치했다. 급기야 존재 자체마저 새까맣게 까먹었다가 요시아 왕 때 성전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이 율법 책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에스라가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인 B.C 약 400년경에, 유대인들은 무너져 버린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해 이 율법 책을 다섯 권으로 묶어 이스라엘의 정경으로 삼는다. 이게 바로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이다.
2)역사서와 선지서
하 느님은 모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와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을 통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왕을 세우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를 기록하게 했다. 히브리 예언서들은 예언서를 전,후기로 구분했다. 전기 예언서는 역사서라고 부르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이고, 후기 예언서는 대선지서와 12개의 소선지서를 말한다. 이 책들도 처음엔 유대인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하고 헬라 문화를 주입하려하자, 유대인들은 부랴부랴 히브리 사람들의 성경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껴 B.C 250~175년경에는 지금의 역사서와 선지서들을 수집해 정경으로 삼았다.
3)시가서
다 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열왕들의 역사(열왕기)와, 시문서들이 기록되었다. 원래 시편은 교회에서 예배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잠언서는 교육용이었고, 다른 시가서 들은 특별한 절기 때에 읽혀졌다. 그러다가 B.C 175~165년경에 시리아 왕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을 헬라인으로 개조시키기 위해 말살정책을 펴자, B.C 150년경 열왕기와 시가의 편집 작업을 마친다. 그후 서기 70년경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자 유대인 사이에서 어느 것이 진짜 정경인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더욱이 이 때에 가톨릭이 생겨나 유대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제 정경을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 마침내 서기 90년경 얌니야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지금과 같은 구약 39권을 정경으로 인정하다.
▲신약 성경의 기록과 정경화 과정
신 약성경이 구체적으로 정경화된 계기는 말시온이라는 사람 때문이다. 그는 바울서신과 누가복음만 가지고 성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가 반대했다. 이게 계기가 돼 교회 지도자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성경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또한 서기 303~311년 사이에 집권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안은 기독교를 크게 박해했다. 황제가 성경을 압수하고 모두 불태우게 하자, 급박해진 기독인들은 황제의 박해로부터 어떤 책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신약 27권이 수집되고 선택됐다. 그 후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는 지금의 신구약 성경을 모두 공식 인정하게 된다. 이 교회 회의는 “66권의 정경 외에는 어느 것도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읽힐 수 없다”고 선포했다.
1)야고보서와 갈라디아서
예 수가 죽은지 약 20년이 지났을 때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성도들이 차츰 복음에 대한 감격과 경건심을 잃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참된 믿음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동기로 그가 기록한 것이 바로 야고보서이다. 바울은 이와 반대 이유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유대인 교사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고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하냐고 묻자, 바울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2)바울 서신들
복 음을 전하기 위해 각 나라를 다닌 바울은 각 교회에 생긴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들을 복음 위에 바르게 세워 주기 위해 13편의 편지를 썼다. 예수 사후인 서기 50~60년대에 쓰여졌다. 각 교회는 이 편지들을 잘 보관하여, 오늘날 성서의 바울서신이 된 것이다.
3)마가복음과 베드로서신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통역자였던 마가(64년경)는 로마에서 네로 황제를 통해서 극심하게 박해받는 성도들을 위해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마가는 베드로의 증언을 토대로 로마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마가복음을 기록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도 박해가 심해지자 죽기 전에 박해로 고난받고 있는 성도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기 위해서 편지 둘을 썼다. 이게 베드로 전후서이다.
4)히브리서와 유다서
예 루살렘 성이 멸망하기 직전인 서기 70년경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예수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다시 유대교로 넘어가려고 했다. 이때에 알려지지 않은 한 저자가 그들을 복음으로 굳게 세우기 위하여 히브리서를 썼다. 그리고 예수 동생인 유다도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약 80년경에 유다서를 썼다.
5)복음서
마태는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마가복음을 토대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했다(마태복음). 누가도 85년경에 모든 증언과 조사를 토대로 복음의 내용이 진리라는 것을 밝히고 이것을 책으로 써서 데오빌로라고 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기독교인에게 헌정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집필 배경이다.
6)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
요한은 90~100년경에 박해와 이단의 위협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소아시아 교회들을 위해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1,2,3서)을 썼다. 그리고 밧모섬에 귀양을 갔을 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소아시아의 7교회에 요한 계시록을 써서 보냈다. 그리하여 약 100년경, 즉 예수가 세상을 떠나신 지 약 70년이 지났을 때에는 신약 성경 대부분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