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소천한 어니 길보른 동양선교회(OMS) 선교사(오른쪽)가 생전에 아내 요코 길보른과 다정한 한때를 보내던 모습.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 제공
성결교회 주춧돌 놓은 길보른家 3대의 한국 인연
‘길보른가 마지막 선교사’ 어니 길보른 지난 10일 별세
3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은 길보른가(家)의 마지막 선교사 어니 길보른 동양선교회(OMS) 선교사가 지난 10일 미국에서 향년 97세로 소천했다. 한국을 넘어 일본, 중국에 복음을 전한 길보른가의 선교활동은 그를 끝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길보른가와 한국의 인연은 할아버지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니 길보른의 할아버지 어니스트 길보른(1865∼1928)은 한국성결교회의 모체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 설립자 중 한 명이다. 동양선교의 꿈을 품고 찰스 카우만과 OMS를 조직한 어니스트는 1907년 김상준, 정빈과 함께 서울 종로에 복음선교관을 세우고 목회자 양성과 노방전도에 힘썼다. 또 1922년 한국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을 창간해 성결교의 핵심교리인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설파했으며 24년엔 OMS 2대 총재에 부임했다.
후손들도 한국선교에 적극 참여했다. 길보른 2세인 버드 길보른(1891∼1980)은 1917년 한국성결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24년 OMS 한국책임자로 활약했다. 그는 한국에서 보낸 18년간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성서학원 교수이자 고문, 이사로 지내며 현지 목회자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길보른 3세인 에드윈 길보른(1917∼2015)과 어니, 엘머 길보른(1920∼2017)도 선조의 뜻을 받들어 한·중·일 삼국을 오가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장남인 에드윈은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뒤 49년 한국에 들어와 OMS 한국대표와 서울신학대학 제2대 학장을 거치며 24년간 한국선교를 펼쳤다.
쌍둥이 형제로 일본에서 태어난 어니와 엘머는 서울의 외국인학교를 다니며 OMS 중국선교부와 한국선교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서울에서 고교과정을 마치고 미국 애즈버리 대학에서 수학한 두 형제는 48년 중국선교를 위해 베이징에 갔으나 49년 국민당이 마오쩌둥에게 패하면서 중국을 떠난다. 이때 엘머는 한국 선교사로, 어니는 일본 선교사로 각각 파송됐다.
엘머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길보른 가족이 전후 복구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엘머는 미국교회의 후원을 얻어 파괴된 성결교회 및 한국교회 재건을 도왔다. 특히 그는 세계구호위원회(WRC)와 월드비전 설립자인 밥 피어스 목사와 협력해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하고 나병환자 교회를 세우는 등 초교파적 사회사업을 펼쳤다. 급식사업에도 주력해 매일 16년간 7만6000명에게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교단 안팎에서 “미국교회의 헌금으로 믿음 없는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을 만든다”는 비판에 직면했지만 한국의 어려운 상황을 잘 아는 그는 크게 개의치 않고 지속적으로 나눔을 펼쳤다. 이러한 전후 재건에 대한 공을 인정해 대한민국 정부는 엘머에게 대통령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한편 49년 일본에 선교사로 간 어니는 이후 일본선교에 주력했다. 그는 일본성결교회가 개최한 십자군전도대회와 일본선교백주년 전도대회에 함께하는 등 평생을 일본 복음화에 헌신했다. 61년엔 방송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해 일본홀리네스방송국(JHB)이 개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렇듯 한국교회에 3대에 걸쳐 공헌한 길보른 집안이지만 이들의 선교활동은 여타 선교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박명수 서울신대 교수는 “길보른가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에 비해 덜 알려졌으나 한국성결교회의 주춧돌이 됐음은 물론 해방 이후 한국사회 및 한국교회 재건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며 “한국의 상황에 맞춰 구령·구호사업을 펼친 이들의 헌신을 한국교회가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