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가시나무”의 ‘가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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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시나무”의 ‘가시’였습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듀오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님은 ‘가시나무’라는 노래도 만들었는데요, 님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었던 분입니다. 1958년 7월생이니 지금 만62세인 님은 천안대학교 교회실용음악과 교수이자 목사(침례교)이기도 한데,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두 살인가 세 살 때 속초 천진항으로 옮겨서 거기에서 살다가 열 살 때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이혼, 아버지의 사업실패 등으로 인한 극도의 가난이 몰아닥쳐 누나들이 가장 노릇을 했습니다. 고교시절에는 가출도 여러 번 하고 자실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가수의 길로 들어선 님은 숫한 인기곡들을 낳으며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얻게 된 그 화려한 명성이 그의 영혼까지 채워 주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공허감만 더해져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술과 대마초 등으로 세월을 보내던 중 어느 날 죽음을 결심하고 설악산을 향했습니다. 님은 ‘제가 크리스천이 되기 전까지는 자연과 고향이 제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해 줬던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머니의 품 같은 자연의 품에서 생을 마치려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 같은 자연은 님의 죽음을 원치 않았습니다. 한계령 구비길을 넘어가는데, ‘오지마라. 돌아가라!’ 하는 설악산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 후 누나의 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님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하나의 인상 깊은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작은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지를 못하고 날개를 퍼덕이며 주위를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 새들이 찾은 건 가시나무였습니다. 그때 님의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이었습니다. 님은 그것을 그대로 적어내려 갔습니다. 그리고 10분으로 끝이 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노래 ‘가시나무’입니다.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가시나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님이 ‘내 속에 너무도 많은 “내”’가 다름 아닌 ‘가시’임을 봤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자신의 안에 있는 ‘내’가 ‘가시’인 사람이 어찌 그분, 하덕규 님뿐이겠습니까. 그 ‘내’가 ‘가시’ 아닌 사람이 있기는 하겠습니까.

그런데 님의 가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 수도 알 수가 없습니다. 살짝 닿기만 해도 상처를 입을 만큼 뾰족한 것이었는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새끼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빼곡한 것이었는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을 아프게 찌르는 ‘가시’를 가지고 있음에도 님은 복 받은 사람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자기 속의 ‘가시’를 봤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아프도록 인식하게 됐다는 것은 뉘우침이 시작됐다는 증거이고, 뉘우침은 ‘회개’의 전조이기 때문이지요. 님은 크리스천이거든요.

하기야 그 같은 ‘가시’는 당초부터 님에게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님의 시인적 예민한 감각이, 발바닥 아닌 눈 같은 예민함이 ‘가시’ 아닌 무엇인가를 ‘가시’로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의 제목을 <저는 “가시나무”의 ‘가시’였습니다>라고 단 제 자신이 참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목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제가 지금은 ‘가시’가 아니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건 결코 아닙니다. 종전과 비교해 가시의 뾰쪽함이 많이 무뎌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요, 저는 뾰쪽한 ‘가시’의 소유자였음이 틀림없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가시가 남을 찔러 아프게 했던 적이 많았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찌르고 나서 아파하는 상대를 보고 내가 이겼다고 우쭐대는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크리스천이거든요.

맞아요. 저도 크리스천이 맞아요. 그러나 크리스천답지 못한 크리스천이지요. 그렇다고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이 되고자 기도하며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그리했느냐에 있지요.

하나님은요, 우리 하나님은요, 우리가 적당히 기도하고 적당히 노력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분이시지요. 전부터도 저는 그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름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고 노력도 했지요. 물론 나태한 적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요.

어쨌든 당시에는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내 놓고 보니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무엇인가를 있는 힘을 다해 한다는 것은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목적? 목적이라면 무슨 목적?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목적이라면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일까요. 그야 하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 아니겠어요. 젊은 연인들 사이에 ‘내 안에 너 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런데요, 내 안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면 내 안에서 나를 치워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의 주인이 둘일 수는 없지 않잖아요. 세상에서는 물론 공동소유라는 것이 있지만, 하나님은 질투가 심하실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욕심까지 많으신 분이시거든요. 그러니 그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내가 온전한 당신의 것이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의 주인이 되시도록 나의 안에서 나를 몰아내든 죽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나를, 나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만드는 것이지요.

어려운 일이지요. 그리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지요. 어떻든 그리만 된다면 만사는 OK이지요. 그리되면 자신의 주관도 정체성도 없는 것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그런데요. 그것이 자신 주관이기도 하고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렇게 될 때 ‘가시’로 남을 찔러 아프게 했던 내가 상처받은 이웃의 아픔을 어루만져 치유하는 사랑의 손길이 되는 것이지요.

 

 

하덕규 님의 ‘가시나무’는 ‘가시나무’와 ‘새’를 소재로 한 노래인데요, 옛 유럽의 켈트족 전설에 ‘가시나무새’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 대충을 소개해 보지요.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가 있다. 가시나무새이다. 그 새는 가장 뾰쪽하여 날카롭고 긴 가시나무를 찾아다닌다. 일단 둥지를 떠난 새는 그런 가시나무를 찾을 때까지 결코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자잘한 가시의 나무 같은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찾고자 했던 가시나무를 발견하면 망설임도 없이 가장 길고 뾰쪽한 가시를 행해 사력을 다해 날아든다. 그리고 가시에 찔려 붉은 피를 흘리고 죽어가며 노래를 부른다. 천상천하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순간 천지가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하늘의 신까지도 미소를 머금고 듣는다.

가장 값진 가치는 그렇게 얻는 것이라 생각해요.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해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 밭을 산 사람도 그랬지요(마13:44 참조).

어떻든 켈트족의 이 전설 ‘가시나무새’는 신비스러운 데다가 묘한 매력까지 풍기는 내용이라서 그런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노래 등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KBS2의 수목 드라마 ‘가시나무새’가 있었고, 패티 김의 노래 ‘가시나무새’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덕규 님의 ‘가시나무’가 켈트족 전설의 이 ‘가시나무새’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님이 이 전설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설 ‘가시나무새’가 그렇듯이 님의 노래 ‘가시나무’도 소재가 ‘가시나무’와 ‘새’임은 틀림없습니다. 양자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전설 속의 ‘가시’는 새가 그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데에 이바지한데 반해, 님의 노래 속 ‘가시’는 남을 아프게 찌른다는 점 정도입니다.

혹자는 새를 죽게 한 가시도 아프다고 하는데, 저도 그게 사실이면 좋겠습니다. 자의적으로 한 것은 아닐지라도 새가 노래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니 그 점은 가시도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새를 보자 아팠지 않았을까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랬으면 참 좋겠습니다. 길고 날카롭게 뾰쪽한 가시로 깊게 찔러 놓고 아파하는 상대방을 보며 내가 이겼다며 으쓱거리는 사람도 없지 않은 것이 세상이니까요.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저는 하덕규 님의 노래 중 이 한 마디가 가장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그런 ‘가시’일까 봐 두렵습니다. 가시에 찔려 아픈 새들이 날아들어 쉬는, 그 새들의 상처를 부드럽고 푸른 잎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는 한 그루 자작나무였으면 싶습니다. 정말,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임 종 석의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