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현 박사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온누리교회 사역장로, 몽골국제대학교 부 총장겸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그리고 그의이름앞에는 수많은 단체 장의 직함이 붙지만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직함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몽골 선교사다.
<역경의 열매 9 >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유명 교수, 문화인들과의 만남
심문이 종료되는 말미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입소 선임으로 주변을 살피는 여유도 생겼다. 특급으로 분류되어서 선임이 되었지만 사회적인 명성이나 투쟁 관록이나 학문적 기여도 면에서 내가 같은 공간에 명단을 올리는 자체가 계면쩍은 면이 적지 않았다.
심문관이 어느 날 고려대학 얼마나 근무했느냐고 묻더니 “내일 들어오는 고려대 교수님들 있는데 어떤 분인지 얘기 좀 해보시지요. 김우창 교수 말입니다.”
마침 고려대 시청각 교육원장 때 저를 매체연구실장으로 임명하시고 사적으로 친절하게 대해 주시던 선배 교수님이시다. 그분이 왜 여기로 불려오는지 오히려 궁금했다. “그분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입학하신 후 영문학으로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하시고 서울대 교수로 계시다가 고려대학으로 옮기신 석학이십니다. 정치를 멀리하고 전공을 문학으로 바꾸신 순수한 선비풍의 학자이십니다.” 그냥 한번 물어 본 것인데도 교수님에 대해 좋게 말하고자 공연히 열정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통계학과 김준보 원로교수, 정경대학장 조기준 경제학과 교수도 심문을 받으셨다. 서강대 박홍 총장, 서 신부 총장, 신경림 시인 등 유명 인사들을 속속 뵀던 기억이 난다. 박홍 교수는 특별히 입소하자마자 우람한 헌병들을 보고는 “담배 좀 있습니까? 한 대 피워야겠어요.”라고 하자 헌병이 당장 “쪼그려 뛰기 실시!”라고 하면서 기강을 잡으니 박 총창은 “이거 누가 이렇게 하라고 시켰어요.”하고 응수를 해 방안 분위기가 험악해진 일도 있었다. 심한 고문도 없었는데 유약한 문화인들이 너무 겁을 먹고 자지러지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마지막 단계로 심문조서에 사인을 하고 종로경찰서로 이송될 시간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침 기상 후 조금 있다가 얼굴이 겁나게 생긴 수사반장이 나를 찾아 왔다. “오늘은 면도를 잘 하고 복장도 단정히 해서 준비하고 대기하세요.”라고 성급히 독촉을 했다. 같이 어디를 가야 하는데 “묻는 대로 겸손하게 처신을 잘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는 것이었다.
“종로경찰서로 이송되는 건 예상했지만 별안간 도대체 어디로 가서 무슨 할 일이 남았는지 악운이 끝이 없나보다.”하고 낙담을 하면서 수사반장을 뒤따라갔다. 수사반장 자신도 무슨 영문인지 파악도 못하고 상부지시를 신속히 처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한 사무실 문에 다다르자 수사반장도 옷깃을 여미고 긴장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한 군인이 서류를 뒤적이면서 문을 향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동숭동 학창 시절에 동고동락한 얼굴이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 동창은 당시 군에 입대하여 법무관 육군 중령으로 있었다. 육군본부 법무감실 검찰부장으로서 후일 육군 법무감 국방부 법무관리관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C변호사였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니? 조사관들에게 대강 들었다. 내 친구는 제자를 아끼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학자다. 학생 시위를 조종하거나 배후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너무 긴장해서인지 반갑고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 친구를 거기서 만날 수 있었는지 성령님께 묻고 기도하면서 감사를 드렸던 그때의 기억이 새롭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시편 25:15)
<역경의 열매 10>
철우한빛교회
대망의 2000년을 미리 설계를 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는 떠들썩하게 2000년의 대전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즈음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Wind of Chapel)가 큰 처남 이근섭 목사가 시무하는 미국 아르케이넘(Arcanum) 감리교회 옆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대형화가 되는 잘 나가는 온누리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면서 2000년 주님이 오신다면 크기는 문제가 되지는 않겠다는 결론도 냈다. 그러나 여전히 가장 작은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다. 그때는 나도 장로 장립한지 2년 남짓한 시기라 축소지향형 교회 모델의 외형을 그저 상징적으로 답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태양열 건축 설계로 명성을 날리던 이근섭 박사는 틈틈이 목사 안수까지 미국 교단에서 받은 후 외국인으로서 아르케이넘 감리교회에 최초 아시아계 박사 교수 전력의 목사로 청빙을 받은 것이다.
마침 도착한 그날 저녁, 교회에서는 탄일종 성가를 부르면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시골 교회에서 영어 설교를 하는 이 목사님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예배후 ‘Hide and Seek’ 놀이를 같이 하면서 밤늦게까지 이층, 아래층을 뛰어 다니면서 숨고 들키곤 하였다. 철없는 아이처럼 이국의 첫날이 마냥 즐거웠다. 삼청교회 유년 주일학교 시절 숨바꼭질이 어렴풋이 떠오르면서 동심을 되찾은 기쁨이 컸다. 그 다음날 바람이 사방으로 통하는 아르케이넘의 작은 교회 ‘Wind of Chapel’을 찾아서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기도하고 긴 묵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귀국하여 한국에서 가장 작은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세상 공간이 작을수록 수직적으로는 하늘로 높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맛보는 주님과의 영적 소통이 심오해질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주님을 예배와 기도 속에 더욱 친밀히 만나며 천국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도 생겼다.
그와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지만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처인구에 철우한빛교회를 세우도록 허락해주셨다. 그 당시 나는 ‘Jubuk 909’를 이메일 주소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북한을 주인으로 삼는 간첩 암호 같다.”는 농담 삼아 들려준 반응을 듣고 당장 바꾼 기억이 난다. 이는 바로 철우한빛교회의 주소였다.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얼핏 보기에는 아늑한 전원주택 같지만 지붕 위에 세워진 십자가로 하나님의 성소임을 알 수 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함이니라.”는 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처럼, 나는 교회의 제도나 조직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갓난아이들처럼 세상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말씀에 매달려 신령한 복음을 나누기를 사모했다. 주변의 농가를 방문하면서 집집마다 인사를 나누고서 2009년 11월 28일,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철우는 에덴동산 같은 우주를 꿈꾸며 사랑의 철학이 지배하는 우주를 뜻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면서 보내주시는 동역자들를 기다리는 기간이 충분하지 못했다. 창립 예배 때부터 열심히 섬겼다. 그러나 봉사하면서 우연히 들린 한 영혼이 어찌 그리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고, 수적인 제자리걸음은 면할 길이 없었다. 그 후 나는 작은 교회의 생태적 한계는 스스로 깨고 나올 수가 없고 병아리 알을 부리로 깨어 주듯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금의 십일조보다는, 자리가 모자라 지하에서 화면 예배를 드려도 교인이 넘치는 교회의 교인은 소강(小强) 교회를 찾아 그 어디든지 한 달에 한 번은 참석하는 ‘출석의 십일조’를 드리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
<역경의 열매 11>
한국언론학회 언론상 제정
사단법인 한국언론학회는 1991년 5월23일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언론학회 언론분야 수상자들에게 언론상을 제정하여 시상했다. 내가 17대 언론학회장으로 있을 때였다. 시상식은 언론 현업과 언론 학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산학 협동으로 축하하는 자리가 되었다. 본 학회 역사상 최초로 우리나라의 언론 문화 발전에 기여하신 저명한 언론인을 엄정한 심사를 거쳐서 선정했다. 방송계에선 노정팔, 전영우 선생님이 신문통신업계에선 김광섭, 김성환 선생님이 수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언론계의 특성상 언론인 개개인의 다양한 능력과 개성을 하나의 잣대로 측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기준을 단순화해서 원로 우선의 원칙과 통합적인 방송 문화의 기여도를 주로 살폈다.
네 칸의 만화로 독자들과 공감하면서 언론의 비평기능을 발전 시켜온 고바우 김성환 선생님과 장안의 화제였던 동아방송의 유쾌한 응접실 진행자로서 가족 문화에 생기를 불어넣어준 전영우 원로 방송인이 만장일치로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언론인의 원로로서의 품격과 전문성을 기준으로 열띤 심사를 한 벌린 결과 신문통신 분야에서는 김광섭 선생과 방송 분야에서는 노정팔 선생이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어느 누가 우승자가 되느냐는 경쟁 구도는 탈피하고, 앞으로 우리 신문 방송계에서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도록 한국 언론인의 상을 구축해 나가려 했다. 한국언론학회 언론상은 한국 언론의 이상형을 그려 나가는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상을 제정하기 전에 내가 회장으로 뽑힌 17대 언론학회장 선거를 잠시 회고해 보고자 한다. 나로선 1990년 언론학회 회장 선거가 이미 기우러진 운동장에서 서울대학교 C교수의 샅바를 잡는 기분이었다. 상대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은 언론 학계의 보수 정통 진영이 밀어주고 있다는 이미지를 회원들에게 일방적으로 심어 주었다. 경쟁자인 나로서는 반론을 제시할 기회도 적었다.
그동안 회장 당선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언론학회에서 미력하나마 쌓아온 노력을 바탕으로 하고 나의 언론학자로서의 위치와 정체성을 제대로 알리는 계기로 삼고자 회장에 출마했다. 예컨대 나의 서울대 신문연구소 시절에 곽복산 선생 등이 창립한 언론학회의 자취가 이미 없어진 상태에서 부활의 창립총회를 소집을 위해 김규환 소장을 도우면서 전심전력하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서울대 신문연구소는 서울대 신문대학원으로 승격하면서 발전적 해체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그런 전환기에 침체된 언론학회를 다시 살리자는 데 뜻을 같이하며 당시 몇 십 명 되는 회원이 함께 모였다. 최준 교수 등 학계 원로들은 물론 신진학자들도 참여하였다. 한국언론학회 회장으로 김규환 박사를 선출하고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꺼진 불을 다시 살리는 계기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 당시 실무 면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또한 경희대 한병구 교수가 회장 때는 총무이사로 ‘차기 회장제 신설’ 등 회장 후보로서의 경륜을 나름대로 쌓았다. 그러니 C교수보다는 당연히 내가 먼저 회장 티켓을 가진 줄로 믿었다. 일부 원로 교수들이 내 기대와는 달리 C교수를 적임자로 홍보하는 동안엔 홀로 코너에 몰려 자진 사퇴를 생각할 지경에 달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언론상을 포함한 적절한 공약을 내면서 당당하게 처신했다. 언론학계가 언론계와 상호 협력하는 풍토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학회는 학문적 바탕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이에 상응하는 언론계의 롤 모델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 한국언론학회 언론상을 제정을 약속했던 것이다.
여하 간에 나는 C교수와 상당한 표차로 1990년에 제 17대 학회장에 당선되었다. 그 후 반년이 지나서 1991년 5월 23일 프레스 센터에서 영광스럽게도 최초의 언론상 시상식을 17대 회장으로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린도전서 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