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현 박사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온누리교회 사역장로, 몽골국제대학교 부 총장겸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그리고 그의이름앞에는 수많은 단체 장의 직함이 붙지만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직함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몽골 선교사다.
<역경의 열매 12 >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철강왕의 언론상 기금 출연
언론상을 제정하면서 당시 전례 없는 거금을 언론학회가 지원 받은 사연은 이렇다. 회장 당선 후 포항제철 홍보부에 접근하여 언론상 기금을 요청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그 후 서울법대 출신인 이대공 포철 이사님이 관심을 보이면서 시원한 답을 보내왔다. “박태준 회장님을 만날 기회를 잠시 드릴 테니 원우현 회장이 최선을 다해서 설득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박 회장님은 누굴 만나시면 5분 이상 시간을 갖기 않는 분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언론상에 대한 기획 및 집행 내용과 언론계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나 예산의 규모나 적정성 등을 어찌 다 설명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회장 어른의 마음을 움직이시겠습니까?” 이어서 “그래도 한 번 만나서 용기를 내 보는 게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철강 부국을 이룬 신화의 장본인이신 한국의 철강왕을 대면한다는 것만으로 내 가슴이 벅찼다. 기도하면서 결과야 어떻든지 내심으로 영광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대담하면서 박 회장님은 30분이 지나도 자리를 뜨지 않으셨다. 밖에서 기다리던 참모들이 무슨 일인가 의아했다고 했다.
“언론계가 제 구실을 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정도로 가려면 어떤 묘안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원회장은요. 언론인을 건드리면 더 삐뚤어지는 속성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언론을 비난하고 계도하려 하면 실제로는 반작용만 이 더 커지지 않습니까?”
“언론 현상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역할을 하는 언론학회에서 언론인의 실질적이고 이상적인 언론인 상을 제시하고 그에 부응하는 롤 모델 선정하면 변화가 일어 날겁니다. 수상자를 롤 모델이나 이상형으로 칭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 언론인 의식 구조도 서서히 개선되지 않겠습니까? 포철이 원하는 대로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언론계도 스스로 제 자리로 돌아가겠지요. 포철이나 사회적 기업이 언론에 직접 지원하신다면 경제적 통제로 보일 수 있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회장님. 그 대신 우리 학회에 언론상 기금을 기부하시고 언론 발전 모델을 함께 고심하면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한국 언론의 탈바꿈을 기대해 보시는 게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민주 국가에서는 언론을 제4부라 칭합니다. 대통령부터 모든 권력은 국민의 선거를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여론에 의한 통제가 필수적인데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언론이 국가 정체성을 확고히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장님. 언론학회의 언론상에 목적을 국민의 여론에 맞추고 심사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겁니다.”
나의 상식적인 대화로 박 회장님이 설득되셨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결국 5분을 넘어서 30분 면담을 하는 동안 한국언론학회 언론상을 위해 일억 기금을 출연하시기로 최종 결론을 내셨다. 그 후 수상자 부부가 유럽 여행을 하며 상금도 받는 규모가 큰 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2차 언론상은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창설과 한국언론학회 부활에 중추적 역할을 한 고 김규환 박사가 선정되었다. 한국언론학회 본회의 장에서의 시상식에서 언론상을 받으러 사모님과 외아들이 참석하셨다. 나는 “두 분이 수상하시면서 ‘김규환 기념 장학 기금’을 조성한다고 말씀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고인도 기뻐하시고 고인의 이름도 학회와 같이 하실 겁니다.”라고 제안했다. 반갑게 응답하실 줄 알았는데 난색을 표하시면서 거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이 무척 당황했던 기억도 새롭다.
도미 후 귀국하여 인사도 못한 터라 김 박사님 부고를 보고 문상을 했다. 김윤환 제씨 등과 빈소를 계속 지켰다. 발인 날엔 혼자서 부친이 설립한 주 학교인 경상북도 오상학교 교정에 안장식까지 동승하고 귀경했던 그날이 생각난다. 하늘에서 다 지켜보시고 “내가 원 교수 본심을 세상에서는 몰랐네.”하시면서 김규환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실 것 같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8:21)
<역경의 열매 13>
몽골국제대학의 Media Communication 학과 신설
2016년 2월 추운 겨울, 소격동 이층 식당에서 양유식 장로와 K총장을 처음 대면하였다. 전 국군통합병원자리 옆 골목이고 삼청동에 살 때 익숙한 이웃 동네였다. 양유식 장로가 옆에 앉은 초면인 분을 소개했다. 온누리교회 몽골 예배사역 간사를 하다가 몽골 선교사로 파견된 후 지금은 몽골국제대학(MIU) 총장직을 맡고 있다고.
나는 당시 온누리교회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중심으로 13개 종족 예배를 지원하던 M센터 담당 장로였는데 서로 안면은 익숙지 않았다. 온누리교회가 몽골국제대학의 상법상 주인인 이사장 교회이고 K총장은 행정총괄 책임자인 셈이지만, 15년 이상 혼자 모든 걸 감당하다보니 실질적인 주인인 셈이었다.
K총장이 입을 열었다. "몽골국제대학에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전공 학부(Media and Communication department)신설 허가를 교육부에서 받았습니다. 동시에 중앙아시아와 서방을 연계하는 국제언론미디어국제연구원(International Institute for Media and Communication)의 창설도 추진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MC department나 IIMC는 내가 작명한 것이다. 그는 계속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몽골엔 사회주의 이론 배경의 신문방송학과가 여럿 있고 학문적인 전통도 있다. 그러니 서방 개방 후 미국과 서방의 언론을 대처해야 하는데 저널리즘 교육과 이론을 담당할 학과는 전무한 상태입니다. 몽골 정부는 언론분야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책으로서 영어로 강의하는 외국인 재단의 MIU에 특별히 허가를 내준 겁니다. Mongolia International University의 전 교육과정은 영어로 하지만 이번 학과와 연구원을 신청해서 인가를 받는 모든 절차도 전부 영어로 준비해서 진행해야 합니다. 학부 4년 교과과정도 최첨단 미국 Journalism School의 자료를 업데이트(update)하는 게 필수 조건입니다."
내 이야기를 좀 하자면, 1998년 11월 장로 장립 이전에 <온누리신문> 편집국장과 <빛과 소금> 대담자로 일한 적이 있다. 봉사 내용보다 사진과 글로 큼직한 홍보 효과를 누렸는데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교회에서 그렇게 한 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웠다. 그 후 마음속으로 온누리교회에서 가장 변방이 어딘가 살펴보다가 마침내 외국인 근로자를 전도하는 사역을 하고 있는 M센터가 바로 이방 땅이요 대형교회의 황무지인 걸 깨달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면 M센터야말로 선교의 황금 어장이다. 무슬림, 힌두교 등 이교도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막중한 선교 현장이다. 한편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은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며 본 교회 모임이나 주요 의사 결정을 위한 투표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해서 교회에서의 깊은 교제 영역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예배하고 전도하려면 각 나라 현장을 답사하고 단기 선교
여행도 다녀온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교지 방문을 위한 왕복 항공임 등 비용을 아껴서 현지 선교사를 물질로 후원하고 중보기도로 보이지 않게 돕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자기 고집 때문에, 직접 선교를 위해 해외를 나간 일이 별로 없다는 열등의식도 적이 있는 터였다. 그런데 70세 장로 은퇴 후 5년이 지난 75세의 나이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몽골로 장기 선교를 떠난다는 게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나 말고도 영어 잘하는 언론학 전문가가 서울에 많습니다. 나는 나이도 지났고 몽골을 선교대상국으로는 기도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75세로 외국 생활을 하며 자립할 능력도 감퇴 되었습니다."
그러자 총장직에 능숙해 보이는 젊은 K총장은 다부지게 구체적으로 다그쳤다.
"그 MC 학과장 자리는 별로 높은 자리는 아니지만 조건이 좀 복잡합니다. 첫째로 언론학 영어 강의를 한 경험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언론학 분야의 저술과 업적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MC 분야의 과장, 원장, 학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행정 경험이 풍부해야 합니다. 넷째로 교회의 교사역자로서 소명이 있어야 하고 영적 소통 능력도 필요합니다. 우리 대학은 연희전문학교 초창기처럼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과 선교적 사명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러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전문가는 오직 원우현 박사 장로라는 기도 응답으로 뵈러 온 것입니다."
그날 K총장과 헤어진 후 기도하는 중 주님이 다정한 음성으로 다가오셨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사자를 보내서 청하는 것을 너는 믿음으로 받아들여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신실하게 최선을 다하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37:5)
<역경의 열매 14>
75세에 떠난 몽골 선교
몽골국제대학 총장이 나를 선택한 이유로 제시한 사항과 내가 답해야 할 사항은 너무나 명확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선교의 소명을 주실 때는 일획의 오차도 없이 뜻하신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성령이 회오리바람처럼 내 머리를 강타했다.
집에 와서 K 총장을 통해서 제시하는 조건과 상황을 되짚어보니 "바로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결단을 피할 핑곗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사회적 여건을 따지는 것보다 주님과 겸손히 이야기해 보는 것이 절실했다. 그 후 집중적으로 일주일 이상 세상적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십자가를 묵상하였다. 몽골의 어떤 악조건이라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내하고 오래 참으며 무조건 손해를 보아도 감사하기로 했다.
지금은 작고하신 당시 98세의 노모가 하루하루 아들과 며느리의 보살핌이 필요한 형편이셔서 서울을 오래 떠나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몽골 선교를 결심하기 전에 아내와 어머님과는 진중하게 의논하지 않고 단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는 문제에 집중했다.
하나님은 내게 30여 년 대학교수 생활로 얻은 열매를 가지고 몽골국제대학에 가서 써먹는 세상 지식의 재활용 수준은 뛰어 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도전해 주셨다. 세상의 어두운 장막에 갇혀 사는 몽골 원주민 구원을 위해서 그들보다 더 낮은 자세로 동고동락하고 순수 몽골인 교회를 개척하면서 선교 사업을 이루는 꿈도 심어 주셨다.
자연히 몽골국제대학의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신설이나 학원선교 참여 여부는 사회적 득실을 헤아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이 강권하시는 실천적 결단의 순종의 문제로 변해 갔다. 믿음의 결단이란 자신이 통제하려는 의지를 포기하고 그 결정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세상의 셈법은 어느새 사라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결단하라고 세미한 음성으로 속삭이는 성령님의 다그침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몽골 선교사의 길은 분명 좁고 험한 길이었다. 나약한 75세 노인의 심리 때문인지 걱정도 많고 두려움도 엄습했다. 몽골에 가본 적도 없고 특별히 선교 대상으로 기도한 적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인 이방숙 권사가 나의 무모해 보이는 의외의 선택을 존중하면서 격려해주었다. 노모인 황숙희 권사님도 “주님이 하시는 일에는 기꺼이 순종하는 게 복이다. 주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선교에 전심전력하는 동안에는 주님이 동행하시고 지켜주시니 이 노인은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너라.”면서 환하게 웃으셨다.
히브리서 11장 8절 말씀처럼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듯이 몽골에서 벌어질 생소한 환경을 상상하고 두려워하지 말기로 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경험했듯이 나를 불현듯 광야로 이끌어 내시는구나. 나는 부족하여도 그 광야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예비하시고 주님의 일을 성취하려는 소망을 이루어주시리라.”
그 길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순종하고 나아가면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펼치시는 무궁무진한 미래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마침내 나는 몽골로 가기로 결단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시편 37:5)
<역경의 열매 15>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학원 선교사로 몽골국제대학(MIU)에 파송이 될 경우 내가 구체적으로 할 일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신설과 국제언론미디어 연구원 설립이었다. 70대 중반의 노인이 두 가지 대형 과제를 학교가 원하는 대로 하되,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 주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먼저 점검하고 준비하는 게 절실했다.
신설 미디어 학부의 경우, 어떤 결실이든 입학 4년 후에야 기대할 수밖에 없다. 미디어 학부에서 언론학사를 배출하기까지 4년의 느린 걸음이 예상되었다. 그동안 미디어 학문 전수 성패 여부보다는 입학생을 수업 시간마다 만나 전도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더 소중하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언론학자로서의 역할보다는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는 소명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몽골 대학사회와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처음부터 강하게 전할 수 있는 IIMC 개원 기념 국제심포지엄을 구상해보기로 했다.
나는 경제 상황과 재정이 빈약한 몽골에서는 모금을 통한 기금 확보가 급선무란 걸 깨달았다. 그때에 70대 중반의 원 장로가 터무니없이 몽골 선교 가려고 한다는 소문이 가까운 이웃에는 이미 돌고 있었다. 마침 동생인 원좌현 사장의 경기고 동창인 황규승 박사(고려대 경영대학장 역임)는 그런 내게 측은지심이 생기고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나에게 뜻밖의 전화를 해와 “원 장로님 그 나이에 어딜 가신다고 그러십니까? 그래도 대책이라도 세우고 떠나셔야지요?”하면서 자신이 이사로 있는 고촌장학재단에 건의했더니 주님의 은혜로 지원금을 좀 허락받았다며 재단 사무국장이 연락을 하면 수령해서 가라고 했다. 미디어 학부 설립이 시동도 안 걸렸는데 하나님은 ‘국제언론연구원 개원 기념 국제심포지엄’의 물꼬를 터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 선교를 강력하게 몰아붙이는 듯한 희망의 파고가 나의 모든 잡념을 쓸어버렸다.
사무국장에게 연락해서 감사인사를 하면서 지원금 수령 방법을 문의했다. 원우현박사가 MIU Vice President인 것을 몽골 교육부가 인증하는 서류를 첨부하라고 했다. 그때 2016년 2월에는 말로만 초빙여부를 양해했을 뿐, 확실하게 MIU 교수와 부총장 그리고 국제언론연구원장을 내가 수락하고 MIU가 임용계약서를 작성할 단계는 아니었다. MIU 직분도 없이 내가 그 지원금을 받으면 고촌장학재단도 수령자인 나도 법을 위반하게 된다면서 합당한 서류를 조속히 첨부하라고 했다.
이 사정을 MIU 권오문 총장에게 전달했다. MIU에서는 2월말일자로 나를 부총장으로 임명하고 증빙서류를 보내와 신속하게 행정지원을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원래 2016년 4월부터 몽골 교육부와 접촉해서 미디어 학부 신설 절차를 시작한 후 6월경 미디어 학부 신입생을 모집할 예정이었는데 바로 그 서류 때문에 법적으로는 2016년 2월부터 3년 7개월간 근무한 선교사다. 그러나 실질체류 기간은 3년 5개월로 조금 차이가 난다.
2016년 4월 몽골에 도착하기 전에 MC 학부와 IIMC 설립 초안 참고자료를 국내외에 수소문해서 수집하였다. 미디어 학부 수업에 필요한 커리큘럼과 내가 담당할 수업 시간에 사용할 교과서도 미리 준비를 해야 했다. 그 당시 미국 저널리즘 학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러 교과서를 미국 교수 제자나 지인을 통해서 구했다. 물론 미국 교과서나 커리큘럼은 몽골 학생들의 학문적 배경에 맞게 조정했다.
주님께서 언론학부에 인재들을 보내주시고 그들이 몽골 땅에 사랑을 전하는 언론계의 파수꾼이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미디어 학부 신입생들은 그 누구든지 나의 선교 기술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백성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린도전서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