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멘스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피에타>가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요즘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영화중하나가 되었다.

<피에타>란 슬픔, 비탄을 의미하나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기도가 영화와 무슨 상관관계가있을까.

악덕 사채업자인 주인공강도는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채무자들의 돈을 뜯어내며 잔인하게 살아가고있었는데
어느 날
생뚱맞게 엄마라는 여자가찾아오면서

강도와 엄마 사이에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엄청난비밀은 신의 긍휼이
아니고는 용서받을 수 없는지경에 이르게 된다.

<피에타>란
‘돈을 피에 타’ 마시는 세상이라고누군가가 말했다.

돈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끝이 되나
돈의 현실적인 논리에
생을 능멸당한 우리 이웃들의
서슬 퍼런 악의와 증오가 결국 복수에 나선 것이
줄거리지만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인간 내면엔 신의 자비가
아니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교훈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요즘 인기 있다는 한국영화의특징은 다 잔인하다는공통점이 있다.

<공모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지만
심장 8억, 간 4억, 신장 3억 5천으로
값을 매기는 장기밀매업자의작업이 긴장을 넘어
인간이길 포기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이웃사람>, <추격자>, <황해>
등 에서도 돈을 둘러싼 잔인한 인간성이
여과 없이 스크린을 통해관객을 숨죽이게 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바라보며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은 분명 잔인함을싫어하면서도
내면의 본능이기에 피치 못할현상인 동시에

이미 자신도 모르게잔인함에
세뇌되고 중독되어 어느 덧즐기고 있다는현실적인 이유 앞에

인간의 본연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지않을 수 없게 했다.

모랭은 오래 전부터인간을 네 가지 형으로 나누었다.

지혜를 지닌 인간 <호모 사피엔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호모 로쿠엔스>,
그리고 도구를 사용하는
좀 더 효율적인인간 <호모 파베르>가 있다.

헌데 문제는
<호모 데멘스>에 있다.

이것은 결함이 있는 인간, 광기(狂氣)의 인간으로
미친 사람을 말한다.

왜 현대인은
<호모사피엔스>의 합리성이나이성보다는
<호모 데멘스>의 광기나
환상에 더 마음을 두고 영화처럼 미쳐가고 있을까.

모랭은
지금 이 시대는경제, 사회, 정치, 교육,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인간의 어리석은광기를 풀어나간다.

80년대 모랭의 예언대로
지금 우리나라에
성 범죄자나 엽기적 사건들이 줄을 잇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듯 싶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현대인을광기의 인간으로 만들고 있을까.

<피에타>영화 속 강도는
죽어도 할 말이 없겠지만 무엇이 그를
잔인한 야수로 만들었단 말인가.

우리는 그 답을
김기덕 감독 영화에서 찾아보는 게더 쉬울 것 같다.

김기덕 감독에 대한 평가는
항상 비난과 ‘새로움’에 대한 찬사라는 극과 극의 반응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항상 논쟁의 대상이었고 오해와 편견이
뒤 따라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에겐
어느 평론에서도 지적했듯이
흰색과 검정색은 똑같다는 지론 때문이다.

세상은 늘 구분하려고 한다.
큰 것과 작은 것,
잘난 것과 못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실은
인간은 종이 한 장 차이밖에없음에도

이런 식으로어릴 때부터 길들여 지다보니
외적인 조건을 보고
판단하고 차별하면서 무리가 생기고
잔혹한 일을 만들고 있다.

김기덕 감독은
백과 흑으로
구분하려는 세상에 맞대어싸우느라 그의 영화는
항상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긴장감은 영화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밖 세상에서도 늘 존재하기에
긴장하며 스트레스 받으며 악전고투하는
우리네 삶은 당연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동물 다큐멘터리를 볼 때는 굉장히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철저히 약육강식의 법칙 안에
동물들 세계에선 생존을 위해서 잔인함을 넘어
포악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는 기존의 선입견을 벗고서
인간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그의 영화가 그리도 잔혹하고 당혹스러운
장면이 많았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김 감독은
‘배우는 악한 연기를 할 때 더 자연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마치 인간의 성악설을
설명하듯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천성적으로 악한 본성이 잠재되어 있기에

악한연기를 통해 이끌어내는 것이 더 쉬운 일이라는
그의 지론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사악악은
이렇듯
잠재된 본능적인 욕구 속에 자본주의 사회 속에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부조리한 일은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꼭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피에타>를 본 관객은 어머니 부재가
더 큰 요인으로 작용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강도를 낳고
그 핏덩이를 버리고 도망간 엄마가 갑자기 나타나자 그도
처음엔 부정하고 무시했지만

그동안
어머니 사랑과 보살핌에 목말랐고
누군가와 같이 있어주길 바랬기에 강도는 미선을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시대는
문명과 과학은 최첨단을 걷고 있지만
내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
곧 절대자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철학의 제1인자로 만들고

자신이 친히 신이 되는 순간 돈이 어느 덧 알파요 오메가가 되면서

주인공 강도 같은
잔혹한 인간을 양산시켰던 것이다.

호모 데멘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세상도 아니요
그렇다고 복수는 더더욱 아니다.

오직 <피에타> 의미처럼
그의 긍휼(矜恤)이 필요할 뿐이다.

아무리 착해도
아무리 악해도
인간은 어머니를 잊을 수 없듯이 절대자를 벗어날 수 없다.

미선이 마지막 했던 말,
‘강도도 불쌍하다고..’
그녀도 떨어져 죽고 강도 역시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알고 보면
가해자도 피해자도 다 불쌍할 뿐이다.

돈이 저질러 놓은
더러운 시궁창 지옥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련한
아들이나
그 어머니를 누가 과연 구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인간이 할 일은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기도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주여,
지금 이 땅엔
호모 사피엔스는 없고
호모 데멘스만
가득합니다.


무엇이
광기의 인간이 되게 했을까요.

얽고 얽히는
모든 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서로 간에
용서와 자비를 구하라는 당신의 메시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에타!
언제나 피에타를
외치게 하소서.

2012년 9월 18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

글 보낸이: 김광철
 
피에타 (이탈리아어: Pietà) 는 이탈리아어
슬픔, 비탄을 뜻하는 말로 기독교 예술의 주제 중의
하나이다. 주로 성모 마리아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떠받치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것을 말하며 주로 조각작품으로 표현된다.
이는 성모 마리아의 7가지 슬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그리고 십자가의 길 제13처에 등 예수의 처형과 죽음을
나타내는 주제이다.
14세기경 독일에서 처음 나타났고 그 특유한 비장미와
주제로 인해 곧 많은 예술가들이 자주 표현하는 주제로
널리 퍼져나갔다.
보통 예수와 슬픔에 잠긴 마리아만을 묘사하지만
때로는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유명한 피에타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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