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6) 알렌과 시카고 세계박람회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알렌과 시카고 세계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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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기·자래장롱·병풍… 초라한 한국관 전시품

세계박람회에 처음 나간 한국

1893년 4월 미국 시카고에서는 콜럼버스의 미국 신대륙 발견 400년을 기념하는 박람회가 열렸다. 박람회에는 47개국이 참가했다. 마침 한국 참찬관으로 미국에 계속 체류하고 있던 알렌은 한국 조정에 박람회 개최 소식을 알렸고, 조정은 분주하게 출품할 품목을 준비해 박람회에 참가했다. 고종은 알렌에게 ‘명예사무대원’이란 직함을 주며 이 행사를 총괄하도록 맡겼고, 형식적으로 조정의 내무 참의 정경원을 파견했다.

한국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국가로 성장했지만, 121년 전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한국이 세계에 얼굴을 내민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박람회란 말 그대로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시 한국이 세계에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었을까. 아펜젤러는 한국이 ‘절간의 생쥐처럼 가난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한국을 세계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알렌의 생각이 고맙지 아니한가. 알렌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박람회에 내놓은 물품들

오늘날은 한국 기업이 만든 스마트폰을 전 세계가 사용하고 있으며 국산 TV가 영국 왕실에 걸려 있다. 조선업 실적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렇다면 121년 전 한국은 세계인들 앞에 무엇을 소개했을까. 박람회장에서 한국관은 7칸 정도의 기와집 모양으로 지어졌다. 12㎡ 넓이로 4평도 안 되는 골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공예품이라며 전시한 것은 무명천과 발, 커다란 삼태기와 자개장롱, 비단과 병풍, 도자기 같은 것들이었다. 전체 물품 값은 당시 미화 1000달러에 못 미쳤다. 국악인들도 파견해 박람회장에서 국악을 연주하게 했다. 비록 내놓은 물품은 초라했지만 한국의 승정원일기나 왕조실록에는 “그래도 우리가 국제무대에 나갔다”며 자화자찬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알렌은 밤낮으로 박람회 준비에 열을 올렸다. 한국관 내부를 꾸몄고, 태극기도 지붕 위에 높이 달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국관을 둘러보라고 권했다. 한국대표단들은 아무도 그런 알렌과 같이 하지 않았다. 외국인이 하루 종일 한국관을 홍보하며 호객행위를 한 것이다.

코크릴의 혹평과 윤치호의 실망

미국 뉴욕 헤럴드의 신문기자 코크릴은 한국관을 관람하고는 매섭게 비판했다. 고종이 한국의 폐품들을 헐값에 사서 보냈다고 혹평을 한 것이다. 코크릴은 친한(親韓) 인사였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발전이 기적이라며 찬사와 감탄을 아낌없이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런 비판을 했을까.

당시 미국 에모리 대학을 졸업한 윤치호는 박람회에 구경을 왔었다. 거기서 그는 미국이 일본의 종교에 과도하게 관심을 보이고 심지어 ‘황홀해’하는 모습에 격분했다. 그는 한국관으로 갔다. 윤치호는 한국관 앞에서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국에, 세계에 처음 선보인 내 나라의 실체가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윤치호는 후에 한국이 출품한 물건이 조잡하고 멍청하게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다만 나는 그 처참한 모습에, 내 나라의 모습에 눈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윤치호는 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빠짐없이 기록했다. 하지만 그의 일기에는 알렌에 대한 기록이 없다. 때문에 그가 알렌을 만났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윤치호는 상처받은 가슴을 부여잡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떠났음이 분명하다. 그는 조국의 현실이 너무도 창피했다. 하지만 알렌은 이 가련한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박람회 자리를 지켰다. 알렌의 마음에는 한국이 언젠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알렌의 조국은 미국과 한국

윤치호 등 많은 이들이 한국이 출품한 물품을 부끄러워한 것과 달리 박람회를 연 주체인 미국은 한국의 공예품이 훌륭하다며 출품상을 줬다. 또한 국악이 매혹적이었다며 음악상도 수여했다. 신문은 한국관에 관객들이 모여든다고 칭찬했다. 미국 정부는 우리 조정에 ‘먼 나라인데도 박람회에 참여해 미국 정부나 국민이 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도 보냈다. 미국의 배려가 돋보인다. 정경원은 귀국 후 고종에게 미국이 박람회에 참석한 한국인들을 많이 돌봐 줘 감동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외교문서의 발신인이 바로 알렌이라는 점이다. 당시 주한 미국공사 하드가 휴가 중이었고, 공교롭게도 미국 대통령은 알렌을 주한 공사관의 공사 서리직에 임명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한국 조정이 임명한 미국박람회 파견 한국 책임자이면서 동시에 미국 서리 공사였던 것이다.

알렌은 이처럼 세계 최강국 미국과 빈약한 나라 한국을 동시에 대변하고 있었다. 한 곳은 태어난 조국이요, 또 한 곳은 마음을 준 제2의 조국으로 알렌에게는 둘 다 소중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