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떻게 죽을 것인가?

 

 

 

 

 

 여떻게 죽을 것인가?

 

 

 

 

 

 

 

아버님이 운명하시기 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러운 모습으로 우왕좌왕 할 때였다. 그 순간 병원에서 말기 환자들의 호스피스 활동에 다년간 몸담았던 여동생 친구가 나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죽음은 중환자실에서 외롭게 숨을 거두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가족 중 1명만  극히 제한적으로 입실이 허용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산소 호흡기를 쓰면 나중에 환자를 위해 제거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죠. 돌아가실 때까지 의료기기에 의한 가혹한 연명 치료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중환자실 대신 1인실로 옮겨서 무리한 연명치료 없이 모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운명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족들은 그 자매님의 충고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주치의가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 인위적 영양공급 등 연명치료 여부에 관해 물었을 때 나는 가족대표로서 주저함 없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소정서식에 서명할 수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식구들 모두가 참으로 잘한 결정이었다고 그 자매에게 고마워했다.

의료기기에 의한 연명치료의 문제점은 우리 가족들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매님의 권고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의학계에서도 존엄 사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락사와 연명치료 중단의 윤리성’ 같은 예민한 사안이 법적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죽음의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부쩍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우연하게 죽음을 다룬 흥미진진한 책을 읽게 되었다.
인도계 미국인 「아툴 가완디」가 저술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이다. 이 책은 현재 「워싱톤 포스트」와 「뉴욕타임스」, 그리고 「아마존」의 베스트 셀러 1위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가능한 한 오래 살기를 꿈꾸며,  현대 의학은  바로 그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하는 데 거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외과 수술, 화학요법, 방사능 치료 등으로 대변되는 의학적 처치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 모두가 죽음을 미루고  생명을 연장하려는 현대 의학의 노력이자 꿈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종국에는 죽음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개개인의 삶에는 어찌 할 수 없는 한계점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 뿐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종착점은 ‘죽음’이다.
사실 눈부신 의학의 발달로 노인들의 삶을 전반적으로 연장시켜 주었지만 그것은  노인들의 “기능적 나이”가 연장된 것일 뿐  노령화가  중단된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병을 불러온다고 할 수 있고, 반대로 병에 의해 노령화가 더욱 빨리 진행될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질병에 걸리지 않았어도 육체는 계속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노령화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고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쓴 「아툴 가완디」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Being Mortal'이라는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대체 무엇을 위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의학적 싸움을 벌여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싸움에서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손상된 육체와 혼미해진 정신 속에서 마지막에는 가족과 작별의 인사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차가운 병실에서 죽어 간다.
그 모든 것을 희생한 대가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몇 개월에서 1~2년 정도의 생명 연장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서 얻은 약간의 시간 동안 우리가 '남은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혹독한 치료와 그에 따른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노령화나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죽어 갈 때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걸까?
저자 「아툴 가완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죽음 자체는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지만, 인간답게 죽어 갈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아툴 가완디」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노년의  삶의 질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죽음을 미루는 데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다운 마무리,  아름다운 임종이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죽음의 질' 문제를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논의해 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단계가 의료보건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인식부터 필요하다. '죽음의 질'에서 최고 평가를 받은 영국은 죽음을 앞둔 환자가 삶의 마지막 시기를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돌봐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종말 간병 간호사(Terminal Care Nurse)' 제도가 그것인데, 그 비용을 국가가 전액 지원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완화 진료비용의 일부를  건강보험에서 지원하거나  은퇴한 간호사 등을 재교육시켜 임종 전문 인력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봐야 한다.
의과대학에서도  완화 진료를  정규 과정으로 이수케 해야 하고  품격 있는 죽음을 가르치는 '웰 다잉(well-dying)' 전문가도 길러야 한다.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이 어떤 식의 죽음을 맞고 싶다고 의향을 미리 밝혀두는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운동도 필요하다.

아름다운 마무리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든다.
가족과 친지들의 사랑 가득한 보살핌 속에서  평화롭게  삶을 마무리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연로한 부모를 둔 모든 가족의 공통관심사로 부상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존엄과 의학의 한계를 고백한 「아툴 가완디」의 메시지 역시 ‘아름다운 죽음은 없어도,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와 같은 죽음의 인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지원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노인국가로 들어선 우리나라가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해야 할 복지정책 중 이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