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9일(수) 오후 2시, 사령관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조출한 표지석 제막식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갖기로 하였습니다.
표지석의 한글말은 제가 평소의 사령관님 철학과 말씀을 압축하여 쓴 것에 사령관님 가족분들께서 동의하신
것이고, 영문 번역은 영문 전문가 정재성(stallon) 전우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표지석을 마련하기 위해 정
재성 전우가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기술자를 찾는데에도 많은시행착오를 거쳤고, 많은 고생을 거쳐서야
비로소 만족할만환 작품을 완성해 오늘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기뿝니다. 아울러 아래에 제 글을 바칩니다.
월남전과 채명신 장군
1960년 12월부터 1975년 4월 30일 사이의 월남전쟁, 미군 전사자 5만6천, 한국군 전사자 4,960명.
한국군은 1964년 7월 1973년 3월 23일까지 8년 8개월 동안 32만 5천명을 파견했고, 채명신 장군은
1965년 8월 17일 맹호사단 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
랜드 대장과 담판하여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했다. “열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고 단 한명의 양민
을 보호하라” “베트콩에는 무서운 존재로, 양민에는 외교관으로”, 1969년 5월 3일 귀국할 때까지
그는 그만의 특이한 전략으로 ‘물과 고기를 분리하는 대 게릴라 작전’을 구사했고, 그것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조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1952년,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혹평했던
바로 그 런던타임스가 1966년 5월 29일짜 특집에서 “한국군이 월남전을 맡았거나, 미군이 한국군
전술을 채택했더라면 벌써 승리로 끝냈을 것”이라 극찬했다. 한국을 불신했던 IMF의 전신 ‘서방11
개국 금융클럽’이 1966년에는 “월남전을 보니 한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더라”며 27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한강기적의 원동력이었던 월남 및 중동특수에 시동은 이렇게 걸렸다. 2013년 11월 28일,
국가는 그의 간곡한 유언에 따라 월남전에서 전사한 병사들 옆에 그를 안장했다.
채장군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한교회의 겸손한 장로로 헌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