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이시대에 필요한 기도의 방법인가?

 방언, 이시대에 필요한 기도의 방법인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로 드리는 기도를 방언이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이런 방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사로 생각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공연한 일이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과연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 관련된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해보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분명한 경험으로 자리하고 있는 방언 현상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소리다.
이런 이상한 소리로 나타나는 방언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나역시 고등학교시절에 신앙생활을 하던 방언을 했고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방언을 제법 많이들 했다.
하지만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혀가 안으로 말려들면서 나오는 그런 소리라는 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흥강사는 방언을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할렐루야를 수백 번 반복적으로 외치게했다. 물론 교회 중강단에 무릎 꿇고 엎드려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할렐루야를 외쳐 대기도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그걸 소리로 만들어내야 할 구강기능이 그걸 따라가지 못할 경우에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그런 게 가장 일반적인 방언 현상이다.
또 하나의 다른 방언 현상은 외국어로 터지는 기도이다. 이건 내가 직접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전해들은 말로는, 당사자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독일어·일본어, 심지어 러시아어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에도 방언이 있었으며, 바울도 그런 경험이 많았고,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에서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로 방언 현상이 크게 일어 났다는 건 분명하다.
도대체 방언에 관한 성경의 내용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단 구약은 접어두어야 한다. 구약에서 사용되는 방언이라는 낱말은 지방의 토속 언어라는 의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약 중에서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가 이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데, 사도행전보다는 고린도전서가 우리의 논의에서 훨씬 더 유용하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초기 역사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특별한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문서이기 때문에 방언에 대한 내용은 역사적 진정성을 확보하기가 힘들다. 이에 비해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직접 진술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에 대해 언급한다.
특히 14장에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한다. 아마 그 당시 고린도교회는 이런 신비한 현상들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 같다. 바울이 거기서 말하려는 요점은 모든 은사가 교회의 덕을 위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방언은 주로 여자 신자들에게서 자주 나타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34절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라고 지침을 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 낯 뜨거운 가르침이지만, 이것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안 될 정도로 고린도교회의 신비주의적 경향이 심각했다는 의미이다.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은 방언하는 여자들에게 있었다.
우리가 조금 꼼꼼히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문맥을 검토하면 바울이 방언 현상을 억제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자신도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많이한다고 했다(18절)
방언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양적으로도 많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절)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9절)
그리고 바울은 예언이 방언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이렇게명시적으로 지적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
또한 그는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하지 말라고 했다.(28절)
바울이 결론 부분에서 예언도 사모하고, 방언도 금하지 말라고 충고했다는(39절)점에서 방언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즉 바울이 방언을 허용했을까?
이건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는 지금 방언 현상을 가타부타 말하려는 게 아니라 소극적인 입장에서 고린도교회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바울의 강조점은 방언이 신앙의 본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덕을 심하게 훼손할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에 대한 경계다.
한국교회는 왜 구약성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신약성서도 아주 일부에서만, 그것도 소극적으로, 실제로는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방언을, 더구나 예수님은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신 방언을 그렇게 중요한 신앙 경험으로 받아 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왜곡이다.
방언자체를 다른 어떤것보다 우위에 있는 신앙의 큰 은사로 생각하고 방언을 말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깊이를 가진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같이 기도를 할때도 방언때문에 기도의 방해를 받을 때가 많이 있을뿐 아니라(특히 큰 목소리로 방언할때) 초신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이상한 사이비집단에 온것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타인의 기도에 방해가 되는 방언의 기도는 자칫 상대방의 신앙생활 즉 기도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간과해야 한다.
방언은 그자체만의 은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반에 걸쳐 행함으로 나타나는 결실이 있을때 비로소 결실이 맺어지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고 방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골방에서 혼자 하라.

 

-간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