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되려다 목사된 前앵커, 조정민 – 47세까지 성공 갈망했으나

중 되려다 목사된 前앵커, 조정민 –
47세까지 성공 갈망했으나

 

 

 

 

 

 

조정민 목사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고교를 다녔다. 경남고에 재학 중일 때 양산 통도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시도했다. 그는 “할머니, 어머니가 통도사에 다니셨기 때문에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로 돌아온 그는 재수를 거쳐 연세대에 들어간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것은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바꾸는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어서였다. 방송사에 입사한 것은 얼굴을 널리 알려서 정치 쪽으로 진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방송기자 초기에 그의 말투에 남아 있던 경상도 억양이 문제가 됐다. “발음과 억양을 고치지 못해서 동기생(정동영, 강성주, 구영회, 배귀섭씨 등)들보다 한발 늦었죠. 대학원까지 마치고 왔기 때문에 한발 앞서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어요. 제 뜻과는 달리 사회부 경찰 기자 생활을 6년이나 해야 했어요.”

그는 오전 4시에 나가 경찰서를 돌며 삶의 바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생하게 만났다. 당시는 그게 너무 힘들었지만 나중에 살아가는 데 큰 버팀목이 돼줬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경찰기자 시절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83년 대한항공 비행기가 옛 소련군의 미사일에 맞아 격추됐을 때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왓카나이(稚內)에 급파돼 맹활약을 했다. “당시 서울시경을 출입할 때인데 대한항공 전용기로 급하게 가서 한 달간 취재를 했어요. 일본어를 못할 때여서 교도통신 기자가 영어로 적는 것을 한글로 번역해서 송고했던 기억이 납니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엔 걸프전 취재를 하느라 39일간 지국 사무실에서 숙식을 했다. “아내가 집에서 가져 온 국물에 코피를 쏟을 만큼 강행군이었는데, 경찰기자 시절을 생각하니 견딜 수 있었어요.”

1990년대 중반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낸 그는 이후 보도국 간부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당초 의도한 대로 방송 기자의 이름을 팔아 정치에 입문하지 않은 것은 “공동체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1951년생 ▲연세대 정외과, 연세대 대학원(정치학) 졸업 ▲1978년 MBC 입사 후 사회, 정치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1988~1991), 뉴스데스크 앵커(1996~1997), 보도국 부국장(2000~2001), iMBC 대표이사 사장(2001~2003) ▲온누리교회 목사(2007~현재) ▲ CGN TV 대표이사(2008~현재)

– 인터뷰 본문 

MBC 뉴스데스크 앵커 출신인 조정민(61) 목사를 만난 것은 지난 20일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CGN TV와 온누리교회에서였다. 지난 2007년부터 온누리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조 목사는 그 이듬해부터 해외 선교를 위한 위성방송인 CGN TV의 대표를 맡고 있다.

“2000년에 인터넷 방송으로 시작하며 이름을 지을 때부터 관여를 했어요. 미국으로 신학공부를 다녀온 후에 전문 방송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돕게 됐지요. 연 130억원 정도의 예산으로 전 세계에 5개 언어로 위성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아는 분들은 ‘기적’이라고 하지요.”

역시 유창한 언변이다. 방송 앵커 출신인 데다가 현직 목사이니 말을 오죽 잘할까. 어깃장을 놓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으나,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그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진심의 온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방송 기자 시절엔 남을 인터뷰하셨을 텐데 목회자로 변신해 인터뷰 대상이 되셨네요.

“기독교(그는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했다)가 하도 욕을 먹으니 어떻게 하면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접촉점을 어떻게 하면 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가장 열린 종교인데 배타적, 이기적 집단처럼 여겨지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진리는 타협되지 않고 배타적일 수 있으나 크리스천이 배타적이 돼서는 안 됩니다.” 

 

 

―불교계 트위터 스타인 혜민(38) 스님과 세대, 종교를 떠나서 교우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타 종교를 인정해버리면 복음의 전도가 의미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예수는 누구와도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기독교인은 타 종교인이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와도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왔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의 메시지가 변질되지 않으면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코드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트위터 소통법을 택한 것이지요.”

―트위터 팔로어가 6만7000여명이라니 책임감이 크겠습니다. 트위터라는 매체의 장단점이 뚜렷할 텐데요.

“트위터는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동시성이 있고 파워풀한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걸러지지 않은 정보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것은 조심해야 할 듯싶습니다. 쌍방향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일방적 형태이고 지명도에 따라서 빈익빈 부익부라는 지적도 있지요. 말을 줄여야 하니까 어법도 파괴가 많아지고 상대방에 대한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것도 아쉽습니다.” 

조 목사는 최근 트위터에 매일 잠언 형식으로 올린 글을 모아서 책 ‘사람이 선물이다’를 펴냈다. 속편 격인 ‘인생이 선물이다’도 오는 31일에 출간한다.

―책 본문에 마치 불가의 선사처럼 ‘내려놓았습니다’라는 표현이 있더군요. 어떤 의미입니까.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고…쉰에야…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사람이 선물이다’ 51쪽)

“사람에 대한 요구를 내려놓은 것이지요. 철들고 나서 늘 제 주장을 말하며, 상대방이 변해야 한다고, 조직이 변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습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랬지요. 진짜 문제는 제가 바뀌어야 하는 것임을 나중에 깨닫게 됐습니다. 두 아이(2남)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늘 내 판단을 강요하며 아이들을 나무랐습니다. 큰 아이가 열 네 살 때 제가 사과를 했습니다. 제가 약속을 어기고, 아이를 기준 없이 다루며 스스로 기분이 좋으면 나무랄 일도 지나가고, 기분 나쁘면 크게 나무라고 했던 것을 반성했지요. 제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아무 말 없이 한 시간을 울더군요.”

(‘내 상처가 나으면 나는 이제 백신입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특효약입니다. 주위를 살피면…오직 나만이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16쪽’)

―상처를 입을 만큼 힘든 시절이 언제였습니까.

“저는 6·25전쟁 중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 버려서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내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지만, 기자 시절에 첫 번째 결혼이 두 달 만에 깨지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지요. 교통사고를 10번 이상 당한 데다가 병 때문에 사경을 헤매기도 했어요. 제가 유명해지는 데 집착하고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그 모든 상처를 숨기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술, 도박, 골프에 빠진 것도 일종의 도피 심리였겠지요.”

―나이 50이 가까울 때까지 비신자였다면서요.

“(손으로 교회 창문 밖의 골프 연습장을 가리키며) 저기서 골프 연습을 하다가 이 교회에 와 봤어요. 아내가 새벽 기도를 나간다기에 잡으러 온 것이지요. 아침에 와글와글 방언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게 이단 집단이로구나, 우리 집 앞에 대형 이단 교회가 있구나, 생각했어요. MBC의 ‘카메라 출동’에 고발하기 위해 1주일 동안 잠입 취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알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가 밥이고 생명이에요.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비즈니스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자유인의 길을 걷습니다.”

―한국 교회의 대형화, 세속화가 큰 문제인데요.

“교회가 크면 관리가 어렵지만 해외 선교 등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교회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녹아서 해야 할 빛과 소금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지요. 사랑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손과 발의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끝까지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가 손해 본 게 뭐 있느냐,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게 아니냐는 비난을 받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목사가 되셨을까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신학 공부를 할 때 몸이 무척 아팠다던데, 신앙에 대한 회의는 없었습니까. 

(그는 iMBC 사장을 지낸 후 50을 넘긴 나이에 미국 보스턴에 있는 신학교 ‘고든 코넬’에 입학했다)

“신학 공부를 하는 4년이 너무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로 새벽에 교회 문도 따고 밤에 전깃불도 끄면서, 또 쓰레기도 치우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기쁘냐. 그 질문에 통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안면마비가 와서 나는 이제 끝났구나, 절망할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말로 전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심장병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으나, 지금은 그 병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까지 살려둘 것을 믿기에 이 땅에서 맡겨진 일을 마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 지병은 심장병입니다. 그래서 때로 숨쉬는 순간순간 감사하고, 쉬지 않고 뛰는 심장에 감사합니다. 들숨이 날숨 되지 않는 순간이 죽음이고 심장 멎는 순간이 이별 아닙니까.’―21쪽)

―지난해 타계한 온누리교회 설립자 하용조 목사가 멘토 역할을 해 줬다던데….

“47세 때 처음 만났는데, 제 인생의 첫번째 멘토였습니다. 기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분이 가장 솔직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지닌 분이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제가 신학도가 되겠다고 결정하고 얘기했을 때, 그분은 지난 5년 동안 기다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인내심이 강했지요.” 

―국내에 돌아와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유명인 목사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듯싶습니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신경 안 씁니다. 교회는 병자, 죄인이 모인 곳이에요.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이 모이니 갈등이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을 보면 사람이 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를 뒤에서 헐뜯는다고 놀랄 일도, 화낼 일도 아닙니다. 험담은 말과 함께 시작된 것이고, 험담이 그 정도인 것은 나를 잘 몰라서입니다. 나를 속속들이 알았다면 훨씬 더 심하게 얘기했겠지요.’―77쪽)

―온누리교회 담임 목사 후보로 알려졌는데, 결과적으로 안 된 것에 대해 섭섭하지 않았습니까.

“(담담한 표정으로) 꿈꿔본 적이 없어요. 무엇을 위해서 부름받았나, 이게 확실해야 돼요. 저는 새 미디어를 통한 목회를 위해 부름받았다고 생각해요. 책을 내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하는 것 자체가 목회인 시대가 왔습니다. 올드 패러다임이 아니라 새로운 메시지의 신앙이 탄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속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정치부 기자를 오래하셨는데, 한국 정치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한국 정치인은 권력으로 무얼 하겠다는 비전이 약해요. 대통령들조차도 공동체를 위한 비전이 부족합니다.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에서 탈출하겠다는 목표를 세워서 결국 벗어났지만….”

―올해  유권자들이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까요. 

“화려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커리어를 봐야 합니다. 남을 위해 얼마나 봉사하고 섬겨왔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미국의 명문대학들이 입학생의 봉사 경력을 요구하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을 섬기는 스피릿(정신)이 없는 사람은 지식을 담으면 담을수록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기술만 늘어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면 대형사고를 치는 것이지요.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섬김의 자세로 이뤄져 있는지를 충분히 검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주변 사람들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둬야 합니다. 어떤 세력이 집권하느냐가 중요하니까요.”

그는 정권을 잡겠다는 일부 정치인이 이념적으로 패를 갈라서 정쟁의 이득을 취하려는 것을 우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상배는 갈등을 증폭시켜 권력을 쟁취합니다. 진정한 정치인은 통합의 비전을 갖고 권력의 길로 나아갑니다.”

 

 

 

 

 

장 재 선의 문화 노트(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