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암흑기 기독교 사상가 김교신(1901∼1945)의 삶과 신앙

 

민족암흑기 기독교 사상가


김교신(1901∼1945)의 삶과 신앙


 


 

종교 세속주의 비판, 주류 교단서 배척… 잠자는 민족정신 깨워 일제 탄압 받아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만은 형식에 떨어지고 세속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바로 그 형식의 종교와 세속주의를 박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성서조선 12호, 1935년)

“기독교인의 전도는 아름다운 언사나 문구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지금은 신도의 전존재(全存在) 그것으로써 입증하여야 할 때를 당하였습니다…그러나 금일 전도자는 무취무흔(無臭無痕·냄새와 흔적이 없음)하여 팔방미인적인 문화인이 어찌 그리 많습니까”(설교 ‘존재의 전도’, 1937년 10월)

한국교회가 배출한 사상가 김교신(1901∼1945)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지금 들어도 절절하다. 한국교회 초기 상황은 지금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1917년 춘원 이광수는 한국 기독교에 비판적 칼럼을 ‘매일신보’에 기고하고, “한국교회는 목사·장로는 양반이며 보통교인은 상놈이라는 ‘계급적 기독교’이며 예수교인들은 교인이 아닌 자를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여기는 ‘교회지상주의’에 젖어있다. 교역자들은 무식하며 기독교 신앙은 미신적”이라고 지적했다. 3·1운동 이후엔 미국의 안식교 선교사 헤이스머의 사건이 발생했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단점이 드러나면서 교회 안팎에서 비판의 소리가 들렸다.

김교신은 이런 시기에 신앙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당시 주류신학과 다른 길을 제시했다. 일본의 토착적 기독교였던 무교회주의를 소개하며 전적 기독교, 조선산 기독교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강조하면 주류 교단에서 배척을 당했고 역사의식을 강조하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1930년대 이후 한국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무교회주의 문서를 접하지 않은 목회자들은 거의 없었고 이용도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은 특히 열심이었다.

1901년 4월 1일 함경남도 함흥의 엄격한 유교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3·1 운동에 참가한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정칙영어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20년 도쿄에서 마쓰다라는 노방전도자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했다. 그는 산상수훈을 통해 기독교의 가르침이 유교 이상으로 고엄하다는 사실에 매료돼 그해 6월 세례를 받았다.

김교신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 사숙하면서 7년 간 성서 강연에 참여, 무교회주의 사상을 체득했다. 1927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 후 귀국해 함흥 영생고보와 서울 양정고보, 서울 제일고보, 개성 송도고보 등에서 지리학과 박물학을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일하는 한편 1927년 우치무라 문하의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과 함께 민족구원의 꿈을 안고 ‘성서조선(聖書朝鮮)’(사진)을 발간했다. 잡지는 한국 최초의 무교회 신앙 잡지로, 우치무라 간조의 모토를 한국식으로 변용, ‘성경을 조선 위에, 조선을 성서 위에’ 라는 취지에서 명명했다.

‘성서조선’은 그러나 1942년 3월 발행된 158호의 권두언과 ‘조와(弔蛙)’가 문제가 돼 강제 폐간된다. 개구리를 빗대어 잠자는 민족을 깨워 희망의 싹을 언급한 내용이었다. 일제는 성서조선 158호를 모두 압수했고 김교신은 함석헌, 송두용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간 옥고를 치렀다.

김교신은 출소 이후 1944년 함흥질소비료공장에 입사해 노무자들에게 민족혼을 고취하다가 이듬해 4월 발진티푸스에 걸린 노동자를 돌보다 전염돼 사망했다. 그는 평생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직접 가르친 제자로는 윤석중 손기정 유달영 등이 있다. 2010년에는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건국 포장이 추서됐다.

김교신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위원장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는 28일 오후 5시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김교신 기념사업회 창립총회를 연다고 26일 밝혔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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