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비안 이야기

 

보헤미아에서 살던 모라비안들은 1722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신교 탄압을 피해, 독일의 드레스덴의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이주하였다. 3년뒤에는 1백명이나 되는 신도들이 영지로 이주했는데, 진젠도르프 백작 자신도 모라비안들과 기도회를 가질 정도로 모라비안의 경건주의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 복음주의자들인 모라비안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중국의 청 제국, 페르시아, 북극등에서 활발한 해외선교를 벌였고, 존 웨슬리의 감리교 창시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36년 북미 원주민들에게 전도하러 가던 존 웨슬리는 같은 배에 탄 모라비안들이 폭풍우가 몰아치는데도 시편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에 놀랐는데, 이들 모라비안들은 웨슬리에게 예수를 개인적인 그리스도로 믿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웨슬리가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했고, 후에 성서묵상과 기도 그리고 성만찬(Holy Communion)과 성화를 통한 하느님과의 교제를 추구하는 감리교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아버지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1700-1760 독일)

 

16 세기 가톨릭교회는 반동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을 일으켜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했지만 개신교는 그렇지 못하였다.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의 적극적인 정치적, 군사적, 교리적 공세에 시달리고 해외선교에 약한 신학적 이론, 그나마 미미한 선교적 활동 역시 이렇다할 결실을 맺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이르러 그제서야 많은 개신교도들은 복음이 없는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그들의 중대한 의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에는 루터교의 경건주의자들이 큰 몫을 하였다. 그들은 필립 슈페너와 할레 대학 교수였던 프랑케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선교사업에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반대와 비웃음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이 위기의 때에 이들 경건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모라비안 형제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의 투철한 복음신앙과 뜨거운 선교열정은 19세기를 선교 열풍의 근원지가 되게 하였다. 이들을 이끈 지도자가 독일의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진젠도르프 백작이다.

어린시절부터 꿈꾸었던 해외선교의 열정

 

모 라비안 경건주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는 개신교적 신앙 때문에 망명한 남부 오스트리아의 귀족 집안의 후예이다. 그는 1700년 5월 26일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슈페너가 대부가 되어주었다. 내각의 의원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6주 만에 세상을 떠나고 4살 때 어머니가 재혼을 하여 스페너의 열렬한 후원자인 경건한 할머니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스페너는 자주 진젠도르프 집을 방문하여 영적인 교훈과 감화를 끼쳤기 때문에 어릴적부터 영적인 세계에 눈을 떴다.

 

그 는 일찍이 그리스도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나타냈다. 그의 일기장에 “나에게는 단 한 가지 열망 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 오직 그분뿐이다”라고 기록했다. 진젠도르프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서 뿐 아니라 가장 참되고 가까운 친구로 여겼으며,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마칠 때까지 그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그는 9살 때에 프랑크가 운영하던 할레의 파이다고다움으로 보내졌고, 그곳에 있는 동안 경건주의 성향들이 깊어졌으며 곧 친구들 사이에서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작은 기도 모임을 조직하였고,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5 살 때 선교사들의 해외 선교 강연에 큰 감명을 받고, 자기도 그들과 같은 인생을 살고자 결단했다. 이 계획을 좀더 구체화하기 위해 다른 열심 있는 소년들과 ‘겨자씨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기독교적인 형제애를 가지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세계의 모든 인류를 사랑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비슷한 기도 모임을 7개나 더 만들었다. 그는 할레에서 학교교육을 마친 다음에는 신학을 공부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원하는 바와 그의 가족의 소원과는 달라 그는 신학 대신에 비텐베르그 대학으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법률 공부를 마치고 1721년에는 색슨의 정부 관하에 있는 드레스덴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출세와 장래가 보장된 그 길에서도 그는 아무런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19 세 때 졸업 여행하는 도중에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이 사람을 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 그림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 속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나는 너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은 영감을 느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수님께 일생을 헌신하고자 결단하였다. 이때쯤 그는 경건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상, 곧 순결한 교회와 순결한 영적생활에 대한 이상의 뿌리가 그의 심령 속에 박히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은 자기와 뜻을 같이 하며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재산과 장래와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22세에 자기보다 7세나 나이가 더 많은 도로시 로이스와 결혼하였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과의 역사적인 만남

 

진 젠도르프는 조상에게서 계승받은 재산의 일부로 베르델스도르프의 영지를 샀다. 그의 계획은 슈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의 본산인 할레대학과 같은 시설을 하여 선교본부로 삼는 것이었다. 그는 1727년에는 자기의 가옥을 내놓아 종교적 피난민들의 안식처로 삼게 하였는데 그 안식처로 모여든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모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15세기 초의 존 후스 시대부터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내려오는 보헤미안 형제단의 후계자들이었다. 처음 몇 해 동안에 이곳에 와서 정주하게 된 사람이 300명이었다. 이들은 진젠도르프의 영지에 헤른후트, 곧 주님의 망대라는 마을을 세우고 또 작은 종교사회를 설립하고 진젠도르프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삼았다. 진젠도르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재능과 재산을 쓰셔서 이 유서 깊은 교회를 재조직하고, 또 이를 통해서 더욱 큰 역사를 이루고자 하심을 깨달았다. 1728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공직을 사퇴하고 종교적 지도자로서 전적인 헌신을 하기 시작했다.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모라비안들이 그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뭉쳤다. 이곳에서 하루 24시간 동안 기도가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러한 기도 운동은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진젠도르프는 그리스도 왕국을 위하여 어디든지 준비된 일꾼을 보내기 위해 청년 남녀들을 가정으로부터 분리시켜 엄격한 감독하에 신앙훈련을 시켰다.

모라비안의 선구적인 선교 운동

 

당 시 개신교 교회는 세계 선교에 대해 잠자고 있었다. 1731년 진젠도르프는 덴마크 크리스챤 4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는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린랜드 출신인 두 에스키모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선교사를 보내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고, 선교열이 타오르게 되었다. 그는 헤른후트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선교적 도전을 던졌다. 응답은 즉각적이고 열광적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세계선교를 품고 나갔으며, 그곳에서 낮에는 그들과 같이 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다.

 

이 때부터 모라비안 교회는 소극적인 경건생활에서 적극적인 세계선교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그후 1년이 못되어 2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을 서인도 제도로 파송하였고, 그들은 1930년까지 세계 14나라에 3,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들의 뜨거운 선교열정의 영향으로 19세기 유럽에는 15개의 선교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들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전에 모든 개신교와 성공회가 보냈던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수의 선교사들을 보냈다. 모라비안 들은 원주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갖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지칠 줄 모르는 인내와 영웅적인 헌신으로 직업을 가지고, 자비량 선교사역을 감당함으로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성경적 진리를 가감 없이 그대로 현장에 적용시킨 위대한 믿음의 용사들이었다.

끝없이 타오르는 선교의 불꽃

 

그 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시기와 비난으로 1736년에 고향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계 각 곳에 흩어져 있던 선교사들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로 인하여 많은 형제회 모라비안들이 세계 도처로 흩어졌다. 이 흩어짐은 곧 세계의 선교를 의미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라비안의 선교사역을 통해 변화되었다. 그는 영국,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서인도제도, 북아메리카 등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41년부터 1943년 초반까지 펜실베니아에서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사업의 발전과 교회연합 운동에 힘쓰고자 모라비안 감독직을 내놓고 루터교회 목사로 일하였다. 그러나 루터교는 그의 초교파적 노력을 따라주지 않으므로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모라비안 교회 육성에 힘썼다. 그는 모라비안 교회의 감독으로서 파송할 교직자를 임명하고 선교부의 책임을 맡았으며 교회를 관리해갔다. 그리고 “베들레헴, 나사렛, 필라델피아, 헤브론, 하이델부르그, 랭커스터, 뉴욕 시와 스테튼 아일랜드”에서 모라비안 공동체들의 씨를 뿌렸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주위로부터 많은 오해와 핍박을 받고 환란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전 세계에 예수님을 전파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 1747년 추방령이 철회되고 거의 죽을 때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다니면서 쉴 새 없이 일했다. 교단분열과 경건성의 악화를 막기 위해 애쓰다가 1760년 60세를 일기로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함

 

진 젠도르프는 18세기 독일 경건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로서 개신교 선교사역에 큰 공헌을 한 모든 역사를 통해 제일 위대한 선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위기의 때에 모라비아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살리고, 세계 선교에 힘쓰도록 도와준 위대한 복음운동가이다. 특히 많은 남녀 청년들로 하여금 세계 만민 구원역사에 일생을 헌신하도록 도전을 주었다. 그들은 온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한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땅 끝까지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고, 진실한 경건주의자였다. 그가 소년시절에 가졌던 이상대로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었다. 그의 이 열망이 자기 재산, 명예를 다 바쳐 끊임없이 헌신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역사가는 말하기를

 “존 웨슬리가 새로운 광명과 영감을 받아 그로 하여금 놀라운 부흥운동을 하도록 한 것은 모라비아 단체에게서 받은 감화 때문이다. 모라비아단은 경건주의의 최상의 결실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만년의 진젠도르프의 고백을 들어보자. “내게는 한 가지 열정만 있습니다. 그것은 그 분, 오직 그 분입니다.”

 
오명희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