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선교회 역사 -농촌 계몽가 최용신

Image result for 최용신 업적

한국여선교회 역사 -농촌 계몽가 최용신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요구한다. 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도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 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배운자로서 그 어느곳보다도 배움이 절실한 농촌을 외면할 수 없었던 최용신, 가난과무지 속에 갇힌 농촌을 계몽하는 것이 완전한 사회로 가는 기본임을 알리며 짧은 생을불살랐던 그녀의 결의가 돋보이는 글귀이다.

농촌 계몽가 최용신, 우리에겐 소설 상록수의 여자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그녀는 1909 년일찍이 서양문물과 기독교가 유입된 개항장 함경북도 덕원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조부는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해 구국의 길을 찾으려 노력한 교육 운동가였으며 아버지도 교육에 종사하였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최용신은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기독교 신앙 속에서 성장하였다. 1918 년 고향의사립학교에서 원산의 루씨여자 보통학교로 전학한 그녀는 농촌계몽 운동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1928 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독립운동가 황애덕 교수를 만나게 되면서 일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펜실베니아주립대학에서 농촌사업과 관련된 공부를 한 황애덕 교수는 협성여자신학교에서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국 농촌의 실상을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농촌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황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최용신은여름 방학에 농촌 현장 실습을 지원하였다. “제까짓 여자가 우리를 가르치러 왔느냐”며 그녀를 무시하고 마음의 문을 열지않는 현실 속에서도 농촌을 향한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학 수업을 중단한 최용신은 YWCA 의 지원을 받아 1931 년 10 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로 마침내 농촌운동의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샘골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나의 몸과 마음을 남김없이 태워 이 마을을 밝히도록 해 주소서’라고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교회 부속의 야학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헌신과 노력으로 이듬해에는정식으로 강습소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학생 수도 점점 늘어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운영되었고 밤에는 부녀자들을

모아 한글과 산수, 그리고 재봉과 수예를 가르쳤다.

강습소 신축에 대한 그녀의 설득에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건축발기회를 조직하였고 마을의 유지가 기증한 뒷동산 솔밭이터가 되어 1933 년 1 월 천곡학원이 완공되었다. 샘골은 나날이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변화해 갔다. 생활 개선, 농가 부업장려를 위한 부녀회가 조직되었고 공동생산을 늘려가며 공동체적인 경제 토대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샘골에서의 농촌 계몽 운동이 성공적으로 정착될수록 최용신은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더욱 절실해졌다. 샘골을 농촌 운동의한 도화선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유학을 결심한 그녀는 1934 년 3 월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입학하였다.

일본 유학 중인 약혼자 김학준을 만나 약혼한 지 10 년이 되는 1935 년 4 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같이 계몽운동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약혼자 김학준과 최용신은 교회를 중심으로 사회 활동을 하면서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다. 그녀의농촌 활동에 대한 열정으로 결혼이 늦어졌지만 둘은 신뢰와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유학 생활이었지만 갑작스레 각기병에 걸려 그녀의 유학 생활은 6 개월 만에중단되었다. “누워만 있어도 곁에 있어 달라” 는 샘골 주민들의 간청으로 최용신은 샘골로 돌아왔다. 그러나 몸을 어느 정도추스려 그녀가 다시 일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YWCA 로부터 지원이끊기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도시의 여러분이여! 당신들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스럽고 얼마나안락 하십니까? 우리 농촌의 아이들은 자라기에 배가 고프고 배움에목이 마릅니다. 곡식을 심으면 일 년의 계가 되고 사람을 심으면100 년의 계가 된다고 하였거든 이 강산을 개척하고 이 겨레를 발전시킬농촌의 어린이들을 길러주소서” 도움을 요청하며 그녀가 한 잡지에기고한 글이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마지막까지 불꽃을 태우던 그녀는 결국 누적된 과로로 쓰러져 1935 년1 월 23 일, 27 세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유언대로천곡학원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영원히 잠들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시대에 농촌 계몽을 위해 청춘을 바친 최용신, 모두가 외면한 가난하고

무지한 농촌을 향한 그녀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글: 이미숙 집사, 전국연합회 역사부장, 베다니 KUMC, GA, / 자료: 한국여선교회 전국연합회 2017 년 공과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