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통장에 남아 있던 돈은 정확히 2만 4천 원이었다.
그리고 동네에서는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고집불통 노인”이라는 평판만 남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돈을 다 술로 썼다고 생각했다.아니면 화투판에서 다 날렸거나. 나는 완전히 틀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집에 들어섰을 때 코를 찌른 냄새는 파스 냄새, 식은 믹스커피 냄새, 그리고 노인 냄새였다.
‘자기관리’ 같은 걸 믿지 않고, 평생 몸으로만 버텨 온 사람의 냄새였다.
아버지는 포옹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어깨 한 번 두드려주고,“조심해서 다녀라”짧게 말하고 돌아서는 사람이었다. 감정은 드러내는 게 아니라 꽁꽁 숨겨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다.5년 동안 나는 매달 용돈이라며 60만 원씩을 아버지에게 보내왔다.
그런데도집안에는 늘 낡은 옷과구닥다리 살림살이만 가득했다.
“고집 센 늙은이…”나는 투덜거리며 유품을 정리하다가, 책장 한구석에 놓인 조그만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뚜껑을 열었다.통장 사본이나 도장이 나올 줄 알았다. 그 안에는 영수증 더미와 공책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 특유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빼곡했다.
2019년 2월 – ○○식당 – 치과 치료비. 완납
2021년 7월 – 김○○ 학생 – 대학교 교재비. 완납
2023년 12월 – 박 할머니 – 난방유. 완납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전기요금 몇 천 원 올라도 불평하던 사람,
종이컵도 씻어 쓰던 사람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지?
그때 공책 사이에서 편지 한 장이 떨어졌다. 동네 카센터 사장이 보낸 손편지였다.
“어르신, 말씀하신 청년 고용했습니다. 매일 지각 한 번 없이 나옵니다.
어르신께서 맡기고 가신 현금으로 월급 주고 있습니다. 본인은 가게에서 주는 인센티브인 줄 압니다.
스스로 번 돈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르신 말씀이 맞았습니다.
그 아이는 동정이 아니라 기회와 존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갑자기, 몇 년 전 명절에 집에 와 있던 민수라는 청년이 떠올랐다.
중독 치료를 막 마치고 일자리를 구하던 아이였다. 동네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날 아버지는 밥상에서 그 아이를 두고 “정신 못 차리면 끝이다” 하고 툭 내뱉었다.
나는 그걸 냉정한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공책을 다시 보았다. 2022년 1월 – 민수 – 임금 보조. 완납
아버지는 돈을 준 게 아니었다. ‘일할 자격’을 사 준 것이었다.
한 사람이 자기 인생을 다시 붙잡을 수 있도록 조용히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읽다 보니 더 많은 이름이 나왔다.
• 혼자 애기 키우는 아주머니 차량 수리비 → “무상 수리”로 처리
• 옆집 노인의 인슐린 본인부담금 → 매달 익명 대납
• 고시원에 사는 취준생 → 관리실을 통해 생활비 전달
아버지는 자기 삶은 궁핍하게 살면서, 남의 삶이 무너지지 않게 받쳐 주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울었다. 아버지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를 너무 몰랐다는 것 때문에.
⸻장례식 날
나는 장례식장에 사람이 거의 없을 줄 알았다. 나와 몇몇 동네 노인들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청테이프로 여기저기 붙인 승용차, 낡은 1톤 트럭, 미니밴이 하나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내렸다. 하나둘이 아니라 수십 명이었다.
카센터 사장, 아이를 안은 20대 부부, 회사 근무복을 입은 여자, 대학생, 택배기사, 노인들….
한 여자가 분향하면서 말했다.
“타이어… 덕분에 차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청년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교재비를 대신 내주셨습니다. 학교 그만두면 혼난다고 하셨습니다.
저, 다음 달에 졸업합니다.”
그리고 민수가 앞으로 나왔다.
“대합실에서 자고 있을 때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돈을 주지 않으셨어요. 대신 일자리를 주셨습니다.
‘너는 일할 수 있는 놈이다’라고 처음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첫 월급을 어르신이 대신 내주고 계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민수는 울면서 웃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 하면 코를 부러뜨린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웃음이 번졌다.울음 섞인, 그러나 따뜻한 웃음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는 가난하게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
단지 돈을 ‘사람’으로 바꾸어 두고 떠나신 것이었다.
출처 : 이 글은 미국 SNS를 통해 익명으로 전해지고 있는 실화 기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