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재판, 인류사를 다시 쓰다

법과 법에 준하는 주요사건의 판례는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BC 5C 아테네의 정치 문화 사회적 규범과 가치관은 어떠했을까? 플라톤의[소크라테스 변명]에 실려있는 재판을 고찰하며 당시 정치, 사회사상을 살펴보려 한다.

1517년 종교개혁 후에도 교황의 막강한 권력은 백년 뒤인 1633년 갈릴레오의 재판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증명가능한 과학적 논리도 ‘이단’ 이라는 족쇄를 씌워 극형을 선고했다. 차츰 확대된 인권은 20C에 들어서 미란다 v. 애리조나 재판(1966)을 통해 형사법 피의자의 인권까지 확장되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 재판을 통해 인권보호가 중요가치가 된 시대적 요구를 성찰해 본다.
BC 399년 5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광장 ‘아고라’에서 열린 배심원 법정에 출두한다.
500명의 배심원 중 380대 120표결로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그해 6월 감옥에서 독배를 마신다. 그의 죄목은 “나라에서 믿는 신를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1514>의 저서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정해진 궤도를 돌고있다”라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로마교황청은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지동설을 탄압한다.

세기의 재판, 인류사를 다시 쓰다

한편 갈릴레이는 오랫동안 천체연구를 통해 지동설이 옳다는 생각을 모아 1632년 <대화>를 펴냈다. 그러나 교황의 지시를 어기고 이단적 내용으로 시민을 현혹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마침내 1633년 6월 22일 종교재판이 열렸다. 갈릴레이는 무릎을 꿇고 교황으로부터 무기징역형 선고를 받는다.

세월이 흘러 교황청은 지동설을 인정했고, 1835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대화>를 금서목록에서 푼다. 마침내 1992년 교황 바오로 2세는 잘못을 인정하고 갈릴레이에게 사죄한다.

[미란다 재판 1966년] 범죄드라마를 보면, 경찰이 용의자에게 수갑을 채우면서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라고 시작하는 ‘미란다 경고’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미란다 경고’는 수사기관이, 형사 피의자에게 변호인 선임권과 진술거부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뒤, 비로소 조사할 수 있다는 형사사법의 새로운 기원을 말한다.

1963년 피닉스에서 한 강간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된 ’미란다’는 조사 전에 진술 거부권과 변호인 선임권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고, 자백을 강요당했다고 법정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중형을 선고한다. 그는 판결에 불복해 상고하여, 연방대법원(1966.6)은 5대4로 미란다의 손을 들어주는 역사적 판결을 내린다.

동판결은 당시 강압적 수사관행을 거부하고, 피의자의 권리를 획기적으로 확장시키는 결정이었다. 미란다는 풀려난 후, 본인 서명을 넣은 ‘미란다 카드’를 1달러 50센트에 팔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후 어느날 그는 도박장에서 싸움 중에 살해된다. 현장에 함께 있던 두 혐의자는 경찰관으로부터 ‘미란다 경고’를 들은 후, 묵비권을 행사하며 범행을 자백하지 않아 경찰은 진범을 체포하지 못한다. 결국 미란다는 ‘미란다 경고’의 형사 절차법 도입후 실질적 첫 희생자가 되고 만다.

한국의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가 그들에게 양도할 수 없는 어떤 권리들을 부여했으며, 그 가운데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가 포함된다.”고 선언한다.

인류사를 바꾼 세기의 재판을 고찰하며, 인류문명은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기본권 보호를 통해, 보다 공정한 사회, 플라톤의 정의를 실현하는 인간공동체로 진화되어 왔다. 그래서, 우린 여전히 인간에게 기대와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필귀정(事必歸正), 의는 외로우나 높이 빛난다.

<신응남/변호사·15대서울대미주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