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랴(Caerarea)를 가다

가이사랴는 구약 시대에는 없었던, 12년(22-10BC)에 걸쳐 헤롯 1세에 의해 건설된 신도시이다. 가이사랴는 지중해를 접해 있으며, 텔아비브와 하이파 중간에 있다. 가이사랴의 고고학 발굴은 1950-1960년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발굴을 통해 드러난 유적은 로마 시대의 극장, 전차 경기장, 인위적으로 방파제를 쌓고 만든 항구, 수로를 포함한 주거지와 십자군 시대의 요새가 대표적이다.

 

 

 


로마의 신도시
헤롯은 페니키아의 Stratons Tower로 알려진 작은 항구에 신도시가 건설하고 그 이름을 로마 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tus)을 따 가이사랴로 불렀다. 헤롯은 신전을 만들고 이 신전을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하였다. 신전은 바다 가까운 곳에 건축되었다. 모든 공공 시설과 건축들은 로마 황실의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헤롯 궁은 도시의 남쪽에 건설되었다. 주전 4년 헤롯 1세가 사망하고 주전 4년부터 주후 6년까지 헤롯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스가 통치하다가 아켈라오스는 폐위되고 그 지역은 로마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그래서 주후 6년부터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이 다스리는 유대 땅 수도가 되었다.

 

 


당시 로마 총독의 관저는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에 있었다. 또한 가이사랴는 로마 10군단의 본부였다. 주후 2-3세기에 가이사랴는 더욱 확장되었고 로마의 동방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가이사랴는 Metropolis of the Province of Syria Palaestina로 분류되었다.
가이사랴는 기독교 초기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곳에서 로마의 백부장 고낼료가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이방인으로서 처음 세례를 받은 인물이 되었다 (행 10:1-5, 25-28). 후에 바울은 가이사랴 이곳에서 로마로 호송되었다 (행 23:23-24).

 

헤롯 궁(위의 사진)은 가이사랴의 남쪽, 바다를 향해 있는 바위에 건축되었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110 X 60m 크기의 로마식 헤롯 궁이 발굴되었다. 헤롯 궁의 중앙에는 올림픽 수영장 크기의 풀장이 만들어졌고, 갈멜산에서 가져온 물이 채워졌다. 수영장 둘레는 높은 기둥으로 둘렀는데, 요세푸스는 가이사랴의 헤롯 궁을 가리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기록하였다 (Antiquities, XV, 332). 수영장 중앙에는 높은 동상이 세워졌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호송되기 전, 얼마간 헤롯 궁 감옥에 갇혔었다 (행 23:35, 25:4).

 

 



원형 극장 (Theater)

로마식 극장은 헤롯 1세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가이사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극장은 바다를 향해 세워졌으며 3500명의 좌석이 마련된 반원형이다. 극장 오케스트라의 바닥은 처음엔 회반죽으로 만들어졌지만 후에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롯 아그립바 1세(41-44AC)는 이 극장에서 졸지에 사망하였는데 여기에 대한 기록이 사도행전 12:23절에도 기록되었다. 극장을 발굴하던 중에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쓰인 석비가 발견되었다.

 

 

원형 경주장

경주장은 원형 극장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건축되었다. 이 경주장에 대한 것을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도 찾을 수 있다. 경주장은 남북 방향으로, 동쪽 벤치와 남쪽 둥근이 잘 보존되었고 서쪽은 바다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약 1.05m의 높이의 벽이 경주장의 벽을 이루고 있다. 바닥은 부순 석회암으로 덮었다. 헤롯에 만들어질 당시 규모는 약 8천명의 관객이 참여할 수 있었지만, 주후 1세기에는 1만 5명을 수용할 정도로 커졌다. 경주장은 말 경주와 전차 경주를 위한 용도로 건축되었다. 이곳에서 전차 경주의 용사인 Morismus the charioteer란 글씨가 쓰인 석비가 발견되었다. 주후 2세기에 경주장은 재건되었고 원형극장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항구
헤롯은 콘크리트로 벽돌을 만들어 바다 속으로 잠수하여 방파제를 쌓고 항구를 만들었다. 약 40 에어커 크기에 300척의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항구이다. 현재 흔적으로 남은 규모보다 훨씬 큰 항구였다.

 

수로
지중해 바다를 접한 신도시는 항구로서 적합한 자연적 조건을 갖추었다 해도 많은 인구가 생활하기에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다. 물을 공급하는 수로 시설이다. 식수로 사용할 담수는 가이사랴 인근에서 구할 수 없어 헤롯은 수로를 건설하여 10km 떨어진 갈멜산의 Shuni 샘으로부터 물을 가져왔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므로 도시에 필요한 물을 해결하기 위해 수로는 두 배로 확장되었다. 수로에 남겨진 많은 기록을 통해 공사는 로마의 2군단과 10군단이 담당했음도 알 수 있다.

 


비잔틴 시대의 가이사랴


비잔틴 시대에 가이사랴는 기독교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오리겐은 가이사랴에 기독교 아카데미를 세웠으며 당시 약 3만권의 도서가 가이사랴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4세기 초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의 교부로 활동하였다. 유세비우스는 이곳에서 초대 교회의 역사와 오노마스티콘(Onomasticon)을 기록하였다. 오노마스티콘은 성경을 역사지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도서이다.
비잔틴 시대에 가이사랴는 약 2.5km의 긴 성벽으로 둘렸다. 이 성벽은 가이사랴 신도시 외곽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위해 건축된 성벽이다. 가이사랴의 인구는 크게 팽창했으며, 교회 시대에 수 많은 교회와 함께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회당도 세워졌다. 이 시대에 로마의 항구는 차단되었고 대신 새로운 건축물이 대치되었다.

 

비잔틴 시대에 주요 교회로 Martyrion of the Holy Procopius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6세기 로마의 신전 위에 건축되었다. 39m 길이의 팔각형 교회 내부 크기는 50 X 50m이다. 교회 내부 둘레에는 벽을 따라 많은 방이 지어졌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기둥 받침에서 십자가의 많은 문양들이 발견되었다.

 

5세기의 유대인 회당도 항구의 북쪽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직사각형의 회당은 예루살렘 방향으로 건축되었다. 회당에서 발견된 건축 잔해를 통하여 기둥 머리에 새겨진 메노라, 샬롬이란 글자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 24반열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도 발견되었다. 639년 아랍에 의해 점령당한 후 가이사랴의 많은 주거지는 농경지로 바뀌었다.

 

 

십자군 시대의 가이사랴
1101년 Baldwin I세의 Frankish army에 의해 가이사랴는 십자군이 차지하였다. 십자군 시대에 가이사랴는 대주교의 도시가 되었으며 기독교인이 주를 이루었고 일부 무슬림도 거주하였다. 십자군 시대에 이곳에서 녹색 유리 그릇을 발견한 제노바 사람은 그것을 성배 곧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한 것이라 생각하여 그것을 제노아로 가져가 산 로렌조 교회에 보관하였다.

 


1187년 가이사랴는 아랍의 살라딘에 의해 함락당하였다. 그러나 1191년 잉글랜드 왕인 Richard the Lion Heart가 함락하였고 무슬림은 추방되었다. 무슬림의 공격이 자주 발생하자 1251-1252년 프랑스 왕인 Louis IX는 가이사랴를 전체적으로 재정비하고 견고히 요새화하였다. 성벽의 두께는 4미터로, 전체 약 1.6km의 길이로 약 40에이커의 내부를 포함하는 가이사랴를 요새화하였다. 경사진 성벽(glacis), 탑(tower), 그리고 깊이 10미터, 너비 15미터의 해자로 도시를 감쌌다. 그러나 이런 견고한 요새도 1265년, 맘룩의 술탄 바이바르(Baybars)의 공격으로 십자군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맘룩은 십자군이 다시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도시를 다시 요새화하였다.

 

이주섭 목사

Director Rev. Joo S. LEE                         이주섭 목사는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Institute of the Biblical Geography               대학에서 성서적 지리와 그 배경,문화
3780 Crescent Walk Lane                         를 10여년간 연구,성경말씀 이해에 도

Suwanee, GA 30024                                움을 주는 세미나를 개최 해 오고있다.


Cell 901-603-0302 

Be Shalom In Ch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