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애 전도사 이야기
















 

   많은 매스컴의 조명을 받아오고 있는 박순애 전도사는

  

   1963년생으로 초등학교 3학년이 최종학력이다.

 

   남의집을 돌며 밥을 얻어먹는 최하의 삶속에서도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

 

   이 전해준 “예수님은 어느 누구보다 순애를 사랑하신단다” 

 

   라는 말을 가슴에 품은이후 하나님을 바라보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왔다.그는 뉴저지 웨인에 있는 베다니교회에서

 

   3월7일 부터 4일간의 집회를 통해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야기를 전하고 돌아갔다.

 

   아래글은 2001년까지의 그의 이야기 이다.

 

   권문웅 기자 

 

 

 

초등학교 중퇴 학력, 불행한 개인사 딛고 전국 교도소 유일의 처녀강사 & 최연소 교정위원 된
박순애의 감동 스토리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 이복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스물 한살 나이에 법무부로부터 전국 40개 교도소 최연소 교정위원으로 위촉받은 여자.
초등학교 중퇴가 전부인 학력으로 경기도에서 손꼽히는 학원 원장이 된 여자.
그 여자가 바로 ‘청송 감호소의 찔레꽃’ 박순애씨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한을 재소자에 대한 연민과 헌신으로 승화시킨 그의 삶은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 그 이상이다.

경북 청송에는 동양 최대 규모의 교정시설인 보호감호소가 있다. 얼마 전 일본에서 절도 행각을 벌였던 ‘대도’ 조세형과 탈옥수 신창원이 수감되어 있던 곳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신랄한 말을 우리 사회에 남긴 탈주범 지강헌이 자살하기 직전 마지막 한 말은 “징역보다 더 무거운 보호감호 때문에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기 싫다”였다.

상습성과 재범의 위험성이 인정된 누범들이 생활하는 그곳에서 꽃다운 20대를 보낸 여자가 있다. 박순애씨(39). 그는 그 ‘무시무시한’ 청송감호소에서 보낸 시절이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박순애씨가 청송감호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엉뚱하게도 정신교육 강사를 맡고서였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저는 그때 4H활동을 했어요. 70년대 후반 새마을 운동이 있었죠. 그때 마을마다 4H가 결성되었는데, 우리 마을에서 또래 중 저 빼고는 모두 학생이었어요. 마을에 농사꾼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던 거죠. 저는 학교에 다니는 심정으로 4H활동을 했어요. 열여덟 살 때는 4H연합회 청송군 여자회장, 열아홉 살이던 81년에는 경북 차석 여회장을 했고요. 그때 만난 군수님이 절 눈여겨보셨던 모양이에요. 그 덕분에 청송감호소하고도 인연이 닿았지요.”

스무살 나던 해 박순애씨는 청송 군수로부터 예상치 못한 요청을 받았다. 박순애씨가 살던 마을 인근에 새로 들어선 감호소에서 교육을 해달라는 거였다.

“군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도시와 다르게 교육할 사람이 마땅히 없기도 했지만,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배부른 이야기하는 것보다 시골 처녀농군이 늙은 부모 모시고 열심히 농촌운동 하며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훨씬 좋을 듯해서 감호소장에게 추천했다고.”

처음 감호소에 들어선 날의 기억이 박순애씨는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곳곳에 세워진 망루에 집총한 초병들이 24시간 감시하는 곳. 안내인을 따라, 혼자서는 도저히 되짚어 나올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철문을 통과한 끝에 도착한 강당에는 여자 감호자 60여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기·절도·간통범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살인자도 있다고 했다. 30대 젊은 여성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까지, 신산스런 인생의 굴곡을 거쳐온 그 사람들을 스무 살 풋내기가 어떻게 교육을 시킬까.


이복 오빠에게 성폭행 당하고 살인을 계획하다

“저도 사람을 죽이고 싶은 적이 있었어요. 그 순간 제 손에 칼이 있었으면 정말 죽였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을까, 매일 궁리했어요. 그런 처지에 몰리게 되면 사람을 죽이고 말고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열여덟 살 때, 박순애씨는 뱀탕집을 하던 이복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종양으로 입원한 올케언니를 대신해 네 명이나 되는 조카들을 돌보러 갔다가 당한 것이다. 어렸을 때 이미 그에게 몇 번의 성추행을 당한 뒤라 각별하게 몸을 사리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그 짐승을 죽이지 못했고, 저도 죽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은 제 편이 아니었지만, 그동안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친 것이 더 참혹했습니다. 오빠 처지가 딱하니 가서 살펴주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 갔지만, 그 덫은 오히려 제가 놓은 거였어요. 4H활동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다 보니 어느새 오만해진 거지요. 그 짐승을 제가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겁니다. 그 오만함이 잘못이었습니다.”

최근 박순애씨가 어린 시절과 청송감호소, 그리고 지금까지의 생활을 담아 펴낸 자전에세이 <찔레꽃 그 여자, 박순애> 뒤에 소설가 김주영씨가 이런 글을 붙여놓았다.

한 편의 소설 같다. 그러나 소설이 아니라는 데서 나는 충격과 경이를 느낀다. 뱀탕집. 뱀들이 우글거리는 방안에서 열여덟 살 소녀가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은 차라리 소설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소설이 이 여자의 생처럼 막막할 수 있을까?

책이 나오기 직전, 그는 기도원에 들어가 삼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다고 한다.

“너무 떨려서요. 남편 외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얘기도 들어 있고(성폭행 얘기), 우리 학원 교사들이나 학부모들도 몰랐던 제 초라한 학력 얘기도 나오고, 아이 둘 딸린 남편과 만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살아온 제 이야기를 다 드러낸 건데, 겁이 났지요. 무엇보다 감호소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지, 생각이 무척 많았어요.”

그래도 감호소 사람들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새카맣고 깡말랐지만, 눈 하나는 또랑또랑하게 살아 있는 것이 꼭 찔레꽃 같다던 박순애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한다.

“강사라고 들어온 사람이 스무 살짜리 깡마른 농사꾼 처녀였으니, 놀랐던가 봐요. 다들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더라고요. ‘성공사례’라는 제목으로 미리 준비해간 원고도 잊고, 그냥 제가 살아온 이십년을 털어놓았어요. 늘 배가 고팠던 유년, 아버지의 매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간 엄마를 찾아가던 길, 열다섯 살 때 집을 나가 두부공장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겪었던 서러움, 남들 다 학교 다닐 나이에 상일꾼 노릇을 하며 늙은 부모를 모시고 사는 일, 4H활동….”

그들에게 두려움이 아닌, 따뜻한 정을 느끼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동안 가슴이 사무치게 저려왔고 한다. 그 사무침이 서로 통했던지, 강의가 끝날 즈음엔 강당 안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두번째 교육은 남자 감호자들 대상이었어요. 강의를 마치고 나오니까 감호소장이 부르더니, 그놈들은 모두 흉악범들인데 보기만 해도 무서운 놈들 앞에서 떨지도 않고 당차게 강의를 하다니, 나이 어린 아가씨가 참 대단하다 그래요.”

그러나 세상일이란 온전히 베푸는 일도, 온전히 받기만 하는 일도 없는 법이다. 감호소 강연은 시간을 빼앗는, 온전히 베풀기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4H활동이 학교를 대신했듯, 그 강연은 박순애씨에게 오히려 더 큰 공부가 되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한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늘 책을 읽었어요. 청송교도소랑 제1감호 제2감호소까지 세 군데 강연을 다니게 되니까, 책 읽는 것도 강연 준비로 바뀌어 갔어요. 준비 없이 그들 앞에 선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거든요. 밤을 새우며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 제일 좋았지요. 비오는 날은 농사일을 쉬고 하루종일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만 스물한 살이 되던 1984년 3월, 박순애씨는 40개가 넘는 전국 교도소의 최연소 교정위원으로 법무부의 정식 위촉을 받았다. 최연소 처녀 강사라는 기록에다 전국 최연소 교정위원이라는 기록을 더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기록들보다 박순애씨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은 재소자들의 인권에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강연 준비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고 깊이가 생기면서 사회와 민족, 역사문제에도 관심을 갖게됐고, 더불어 재소자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에도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중에 한 여자가 박순애씨의 집을 찾아왔다.


그녀가 세운 법무부 기록 두 개

“초겨울인데, 한 아주머니가 감호자인 아들이 꼭 만나보라고 했다며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저를 보자마자 붙들고 울기부터 하는 겁니다. 아들이 처음에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을 때 너무나 억울해서 차라리 죽으려고 했답니다. 저는 그때 감호처분이 억울하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청송감호소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교육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들의 처지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겁니다. 누구나 무조건 7년, 10년의 보호감호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 기간을 다 채워도 친지가 보증을 서지 않으면 다시 사회에 나갈 수도 없어, 기약 없이 수형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의 처지를요. 사회보호법이란 게 한마디로 그 사람들을 사회에 내보내지 않기 위해 만든 법이었어요. 교도관이 그러더라고요. 그들은 인간쓰레기들이라고 그놈들한테는 정이나 관심을 줄 필요도, 그럴 가치도 없다고요. 그때, 남을 가르친다는 오만에 빠져 눈앞의 사실조차 직시하지 못한 자신을 깨닫게 되었지요.”

사회보호법은 1980년 12월에 제정된 법이다.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가 사회의 불안요인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제정했는데, 삼청교육대와 함께 인권유린 시비가 지금도 끊이지 않는 법이다.


감호자들의 단식투쟁에 동조 교정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그 사람들, 징역살고 다시 보호감호 7년이나 10년을 채우고 나면 이미 노년에 접어듭니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고 살 근력이 있는 시절은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보내버리고 세상에 나오면 어떻게 생계를 꾸릴 수가 있겠습니까. 몸도 다 망가지고, 가족 친지들도 거의가 나몰라라 하는데요. 그냥 죽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죄수들이 보호감호처분을 사형선고 다음으로 끔찍해했던 겁니다. 시베리아 유형하고 똑같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박순애씨는 청송감호소의 실상과 사회보호법의 부조리함을 신문의 독자투고 등을 통해 세상에 알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 보니 감호자들과의 유대는 끈끈해지는 반면, 주변 사람들에게는 기피인물이 됐다.

“하늘 땅 구별 못하고 날뛴다고도 하고, 빨갱이 소리도 들었어요. 그 시골에서 엄청 외로웠어요. 그래도 감호자들이 제게 건 기대와 희망으로 버텼습니다. 사실 제가 그분들에게 해준 일이 뭐 있었겠습니까. 가난하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시골 구석의 농사꾼 처녀가 씩씩하게 사는 모습 자체가 희망이었겠지요.”


‘인성교육’ 시키는 보습학원 원장으로 유명해져

박순애씨의 교정위원으로서의 활동은 87년부터 격랑을 타게 된다. 그해 청송감호소의 전 감호자가 단식투쟁을 했다.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치열하고 참혹했던 단식투쟁과 끔찍한 진압과정 속에서, 박순애씨는 그들을 돕고자 동분서주했다. 감호자들이 유일하게 대화상대로 받아들였던 박순애씨는 그 과정에서 결국 교정위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89년 초가을이던가, 감호소에서 가을 체육대회를 한다고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망설이다가 갔지요. 몇 달 만에 가는 길이라 가슴이 막 뛰더라고요. 모퉁이를 돌아 막 운동장에 발을 디디는데, 갑자기 천둥치는 것 같은 함성이 울리는 거예요. 운동장을 가득 메운 감호자들이 저를 보고 두 손을 높이 들고는 박수를 치고 환성을 보내는 겁니다. 제가 단상에 앉을 때까지 계속됐어요. 얼마나 벅차고 가슴이 뜨겁던지.”

그들이 보내준 그 함성과 박수가 박순애씨에게 두고두고 큰 힘이 되었다. 그해 늦가을 박순애씨는 청송을 떠났다.

“무작정 상경해 겨우 방 한 칸을 얻었어요. 연탄은커녕 이불도 없어서 있는 옷 다 껴입고 옹송거리고 잤어요. 그때, 그 사람들 심정이 속 깊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들도 세상에 나오면 나처럼 이렇게 춥겠구나. 서러운 몸뚱아리 하나밖에 없겠구나. 그 사람들, 거기서 무너지면 그냥 죽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찾고 아꼈던 거예요. 사람이란 어떻게든 희망을 붙들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박순애씨는 포천에서 학원사업을 했다. 경기 북부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직접 지은 4층짜리 건물에 학생 수가 많을 때는 700명이 넘었고, 월 순수입도 2천만원 가량 되었다.

“처음에는 먹고살려고 동네아이들 몇 데리고 과외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다니다 만 학력인데, 아이들을 가르치자니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또 밤새워가며 공부할 밖에요. 그러다가 학생 수가 늘어나 학원으로 발전하게 됐는데, 학원을 할 만큼 제가 무슨 돈이 있었나요. 늙은 어머니랑 하루하루 살기에도 바빴는데요.”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놀라운 데가 있다. 박순애씨가 학원을 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청송감호소에서 출소한 사람이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그가 주선해 돈 천만원을 마련해준 것이다.


다시 그들을 만나다

“학원을 시작한 것도 그렇지만, 학원을 키운 것도 청송 덕이 큽니다. 수업은 교사들이 했지만 제가 십분, 십오분씩 시간을 내서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했어요. 다 청송에서 강연하던 가락이지요. 학부모들이 참 좋아했어요. 사고뭉치였던 아이들이 우리 학원 오면 반듯해지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거든요.”

박순애씨는 1999년 여름, 남편과 함께 신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학원을 정리했다. 학원 경영이 힘에 부치기도 한 데다 신학교를 마치면 전도사 활동도 하고 싶고, 이제 조용히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의정부교도소의 교정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학원을 그만둔 뒤에 자신이 누구인가 찾다보니, 청송에서의 모습이 가장 도드라져 보이더라고. 의정부교도소에서 교정활동을 시작한 후,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지금 여러 교도소를 돌며 강연을 하는데, 어느 교도소를 가든 교도소장들이 다 옛날 청송감호소에서 만났던 교도관들이라며 박순애씨는 웃었다.

“청송에서는 제가 큰 사랑을 받았지만, 지금이야 재소자들이 저를 그렇게 보나요. 너 좀 배웠나 보구나, 성공이라도 했나 보구나 하고 처음엔 뜨악하지요. 그럴 때 저는 청송감호소 얘기로 물꼬를 트지요. 반응이 금방 달라집니다.”

그는 이렇게 인연이 끊이지 않는 청송감호소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척 보고 싶다고 한다. 돈도 많이 벌었다니, 만나면 해코지할 사람은 없을지 겁나지 않느냐고 했더니, 박순애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무섭기는요. 그분들과 함께 보낸 그때가 제게는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었어요. 이 책을 계기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요. 저 살아온 얘기도 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약속도 하고 싶어요.”



글·안선덕 <자유기고가>

 




박순애 전도사(1963년출생) 프로필

 

초등학교 3학년 중퇴학력으로 700명의 종합학원 원장이 됨


전국교도소사역 20년(18세부터 갱신교육강사 및 교정위원)

 

신앙 에세이 “절대희망”출간 (2007년 10월)


자전 에세이 “찔레꽃 그 여자”출간 (2001년 1월)

 

장편 실화소설 “푸른솔 붉은집”출간 (2002년 10월)

 

MBC TV 뉴스투데이 “절대희망 전도사” 특별방영 (2007년 10월30일)


CTS “내가 매일 기쁘게” 여름특집 출연 (2005년 8월8일~9일)


CBS “새롭게 하소서”출연 (2002년 9월20일~21일)

 

MBC TV “느낌표” 길거리 특강 출연 (2002년 12월14일, 21일)


MBC TV “시사매거진 2580″보도 (2002년 10월6일)


MBC TV “임성훈과 함께”출연 (2002년 10월21일)

 

MBC TV 9시 “뉴스 데스크” 화제의 책 보도 (2001년 2월13일)


KBS1 TV 다큐멘타리 “이것이 인생이다”방영 (2001년 2월27일)


KBS1 TV 아침마당 “목요초대석”출연 (2001년 2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