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벡과 에벤에셀 (Eben Ezer)

아벡과 에벤에셀 (Eben Ezer)

 

주전 1050년경, 블레셋과 이스라엘 간의 중요한 전쟁이 샤론 평야에서 있었다. 이스라엘 12 지파는 가나안 땅에 정착했지만, 약속의 땅을 모두 차지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의 여러 토착민들과 이주민인 블레셋 민족과 공존해야 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블레셋 민족이었다. 블레셋 민족은 남쪽 가사에서부터 북쪽 야르콘 강에 이르는 지중해 해안 평야에 정착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중앙 산지에 정착하였다.
해안 평야에 정착한 블레셋 민족과 산지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주 충돌하였다. 이 두 민족 간에 한 중요한 전쟁이 샤론 평야와 에브라임 산지의 경계 지역인 아벡과 에벤에셀에서 일어났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국가 체제를 크게 변화시켰다. (북서쪽에서 아벡 유적지를 바라본 모습)

 

 

두 민족 간의 중요한 전쟁은 사무엘상 4장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4천 명 가량이라.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3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삼상 4:1-11) 

 

 

블레셋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실로로 사람을 보내어 그곳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게 했다. 하나님의 법궤가 승리를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법궤가 실로에서 에벤에셀 진영으로 옮겨질 때에,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법궤와 함께 전쟁터로 왔다.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의 진영에 이르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크게 용기를 내었다. 그들의 외침은 하늘을 찔렀고, 땅을 진동시켰다. 이스라엘의 외침에 놀란 블레셋 사람들은 더욱 용기를 내어 두 번째 전쟁에서는 더욱 큰 승리를 거두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3만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하나님의 법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했다. 전쟁의 패전 소식은 실로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정신적, 신앙적 공황 상태에 이르게 했으며, 엘리 제사장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하였다. 

 

 
실로의 멸망을 기록한 성경(렘 7:12, 14, 26:9, 시 78:60) 1)을 읽고, 실로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아벡과 에벤에셀에서의 전쟁 (삼상 4)에서 승리한 블레셋 민족은 내친 김에 중앙 산지로 진격하여 실로를 멸망시켰고 하나님의 성막도 이때에 유린되었을 것이다.

 


 

정착 초기에 이스라엘 국가는 12 지파의 장로들, 제사장들, 사사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았다. 그리고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의 사역자이며 백성의 지도자들이 등장하여 나라를 구원하였다. 이런 이스라엘의 초기 통치 구조는 아벡과 에벤에셀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크게 흔들렸다. 이후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블레셋의 위협을 받았다. 블레셋의 위협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중앙 집권 체제의 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결국 사무엘 선지자로 하여금 베냐민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게 되었다. 
 
아벡의 정확한 장소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아벡은 현대 유대인 도시인 로쉬 하아인 (Rosh haAyin)의 서쪽, 이스라엘 국립 공원인 텔 아벡 (Tel Aphek) 또는 안티파트리스 (Antipatris)로 불리는 곳이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인 투트모세 3세의 원정 비문에 따르면, 아벡은 남쪽 오노 (Ono)와 북쪽
소고 (Socho) 사이에 위치한다. 지리적으로 아벡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국제 해변 길에 위치하며, 물이 풍부한 야르콘 강의 수원지를 끼고 있다. 주전 1세기 헤롯 1세는 아벡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 이름을 자신의 부친 이름을 따라 안디바드리 (Antipatris)라고 불렀다. 현재 아랍인들은 구약의 아벡을 라스 엘 아인(Ras el-Ein)으로 부른다. 아벡 유적지를 방문하면, 19세기 오토만 터키가 남긴 요새가 아직도 남아 있다. 
 
1972년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들은 아벡을 체계적으로 발굴해 왔다. 그 결과, 주전 3천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적과 함께 가나안인, 헷족속, 수메르인, 아카디아인, 이집트어로 기록된 많은 비문들이 발견되었다. 
 
아벡의 정확한 장소와는 다르게, 에벤에셀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 중이다.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들은 아벡 근처를 연구하면서 아벡 평야의 동쪽에서 작은 유적지를 발견하였다. 아랍 토착민들은 이곳을 이즈벳 짜르타 (Izbet Zartah)라고 부른다. 이즈벳 짜르타는 블레셋과 대치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장소이다. 
 
이즈벳 짜르타는 약 1 에이커의 작은 농촌 마을로써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이스라엘 시대의 전형적인 주택 구조인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집터’ (4 room house)들을 발굴하였다. 여러 채의 집들 둘레에는 보호 장벽이 세워졌으며, 건물들 사이의 여분 공간은 곡식 창고 (silo)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바위를 파서 빗물을 저수한 저수조들은 아직도 확인할 수 있다. 
 
아벡과 이즈벳 짜르타의 위치를 비교하면, 사뭇 대조적이다. 두 유적지는 약 2마일 정도 떨어져 있지만 아벡은 샤론 평야의 약간 높은 언덕의 물이 풍부한 야르콘 강의 수원지에 위치한 반면, 이즈벳 짜르타는 사마리아 산지의 바위 언덕에 있다. 아벡은 기름진 평야의 녹색 지대에 있는 반면, 이즈벳 짜르타는 거친 바위의 황량한 곳에 있다. 한 곳은 중요한 국제 도로 상에 위치해 있고 다른 한 곳은 국제 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다. 이런 이유로 아벡은 초기 가나안 시대 (주전 3천년)부터 오늘까지 정착의 역사를 갖고 있는 반면, 이즈벳 짜르타는 이스라엘의 정착 초기 (Iron Age I/ 1200 B.C.-1000 B.C.)의 약 200년간만 정착했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즈벳 짜르타는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작은 농촌이었으며, 군의 전초기지 (outpost)였다는 점이다. 정착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산지에 머물렀다. 그러나 주전 990년 경, 다윗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야르콘 강과 블레셋 평야를 모두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가나안 전체가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지역 간의 경계 마을인 이즈벳 짜르타와 같은 작은 마을들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였다. 이즈벳 짜르타와 같은 정착에 불리한 마을보다는 정착에 유리한 도시들이 더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즈벳 짜르타가 에벤에셀로 유력시되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1) 성경의 에벤에셀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으며 아벡과 마주한 곳에 있다. 이즈벳 짜르타는 아벡과 인접한 곳,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지리적 요건을 충족한다. 
 
2) 이즈벳 짜르타는 아벡에서 실로로 올라가는 길에 있다. 이 길을 따라 법궤는 에브라임 산지의 실로에서 해안 평야로 옮겨졌고, 아벡-에벤에셀 전쟁에서 블레셋에게 빼앗겼다. 
 
3) 중요한 것은 아벡 근처에 이즈벳 짜르타 외에 에벤에셀로 주장할 다른 유적지가 없다는 점이다. 이즈벳 짜르타에서 발견된 이스라엘 시대의 집 터 외에 가장 중요한 유물은 고대 히브리어 22자가 기록된 토판의 발견이다. 집 터와 더불어 고대 토판이 이즈벳 짜르타에서 발견된 것은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 정착했다는 유력한 증거이다. 이런 이유들로 말미암아 많은 학자들은 이즈벳 짜르타 (Izbet Zartah)를 사무엘상에 기록된 성경의 에벤에셀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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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렘 7: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렘 26:6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렘 26:9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집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무하여 거민이 없으리라 하느뇨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드니라 
시 78:60 실로의 성막 곧 인간이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Rev. Joo Seob Lee (678) 640-6424
Chair of Institute of the Biblical Geography (in Georgia Christian University)
Assistant Professor of Historical Geography
Rev. Gun Ho Lee (252) 367-1303

Fundraising Chair of Institute of the Biblical Ge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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