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교회의 Paradigm Shift 를 꿈꾸눈 교회

이민교회의

 Paradigm Shift를 꿈꾸는 교회



교회 개척을 진행하면서 – 연영재 목사 



리지우드 교회는 지난 2011년 성탄주일에 구주 예수님의 오심을 기쁨으로 찬양하며 버겐카운티 리지우드에 있는 PCUSA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Ridgewood에서 첫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꼭 필요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 생명을 살리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공동체,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며 순종하는 공동체, 성령의 임재와 기름부음이 충만한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을 사는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며 이 같은 꿈들을 5대 비전으로 세우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축복하여 주셔서 현재 아름답게 영적으로 부흥하는 기쁨과 소망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본질 –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본질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귀한 하나님의 전입니다. 또한 교회의 본질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인생의 제일된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어떠한 교회도 함부로 폄하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그토록 존귀하고 거룩한 교회이기에 시대와 상황이 아무리 시험하여도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버리는 모습은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함에 있어 본질에 집중하고 그 본질을 전파하는 사역에 하나님께서 저와 리지우드 교회를 부르시고 사용하실 것이라는 확신과 기쁨으로 임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나, 그 누구와의 관계에서나 결국에는 본질만 남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본질이란 언제나 가변적입니다.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의 경험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에 서로 ‘다른’것이지 누군가가 ‘틀린’것은 아니라는 다원주의적 사상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왜 기독교만이, 왜 하나님만이, 왜 예수님만이, 왜 성령님만이, 왜 교회만이 응답이냐고 묻습니다. 본질을 모르는 것이지요. 본질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본질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본질입니다. 그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고 전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교회를 바라보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며, 세상 속에서 천덕꾸러기 같은 ‘예수쟁이’가 아니라 빛과 소금의 사명을 탁월하게 감당하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본질이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본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면 비본질은 무엇인가, 비본질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 시대 목회자들에게는 숙명과도 같다고 봅니다. 사실 너무나 모호하고 규정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세상이 이 시대 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비본질적인 삶과 행위에 빠져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은 몰이해에 지나지 않으며 어찌 세상적 기준으로 교회와 목사를 판단하느냐고 대응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그러한 비판과 싸워 이기려고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들을 품고 그들을 섬기며 그들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구원받는 생명의 길로 초청해야 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에 교회와 목사들이 비본질적이라면, 적어도 우리 스스로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보고 있는지를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세상적 가치관과 신앙적 세계관이 분명 다를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었는데, 막상 교회와 목사의 현실을 보면 자신들과 똑같거나 오히려 더욱 더 ‘세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복이 세상적인 가치관의 복, 그 이상이면 좋겠는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 복, 돈, 명예, 권력, 부귀, 영화라는 것이지요. 도대체 우리와(세상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정한수 떠 놓고 빌던 샤머니즘과 무엇이 다르며, 삼천 배에 공들이며 불상 앞에서 절하여 소원을 비는 불심과 무엇이 다른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 특히 한국교회를 모판으로 하고 있는 우리 이민교회의 좌표가 바로 이러한 비판적 질문 위에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비본질적인 계획과 이벤트성 프로그램들이 존재하는 한, 기복신앙이라고 부르기에도 낯뜨거운 그야말로 ‘비본질’적인 부끄러운 현실은 날로 악화되어 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의가장 중요한 성장 – 영적성장 

 

저는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두 가지 관점에서 ‘양적인 부흥’에 대하여 부담을 갖지 않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저는 생각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그 말씀 그대로 저는 생각합니다. 천하보다 크고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있다면 과연 숫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부족하고 능력이 없어 솔직히 성도들 한 분 한 분을 마음껏 섬겨드리는 실천도 어찌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한 시인의 감동적인 싯구를 기억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저는 매주 몇 백명 몇 천명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지 않는 개척교회의 목사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아직도 많지 않은 성도들이라 해도 그 귀한 영혼들의 일생을 만나는 일이 너무나 설레고 흥분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한 영혼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 번째 관점은 이제는 제발 개척교회에 대하여 잘못된 교회성장학적 접근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목사로서 감사함으로 저의 귀한 목회현장에 충실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성장학 자체에 대하여 갑론을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천신학적 관점에서 분명 흥미로운 주제임이 분명하지만, 무엇이 성장인가에 대하여 깊은 고민이 수반될 때에만 이 시대 ‘교회성장’의 의미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목회현장에서 느끼게 되는 가장 중요한 성장은 영적 성장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다른 모든 부분이 잘되어 갈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영적인 성장에 먼저 힘을 쓰는 교회가 결국에는 양적인 성장도 이룰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영적 성장은 말 그대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제가 개척을 통하여 내린 결론은 오직 예배뿐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만 우리의 영적 성장이 일어난다고 저는 강력히 확신합니다. 예배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예배로 영광을 돌리는 사람만이 그 예배의 지경이 넓어지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실 삶의 현장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드리는 공예배를 바로 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예배를 ‘드려야’하는 데 예배를 ‘보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배를 본다? 우리는 예배의 청중이 아닙니다. 목사의 원맨쇼를 보러 온 관객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오케스트라가 출연하고 화려한 영상이 스크린을 수놓고, 귀에 달콤한 메시지가 풍성한 한 시간짜리 버라이어티 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예배를 드릴 때, 그때 영적 성장과 성숙은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선물로 임하게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가족과의 시간 때문에 예배에 빠져도 이해가 되고, 예배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기 어렵고, 교회에 주차장이 없어서 출석하기 어렵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말씀이 선포된다고 하여 그 말씀에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성도가 많은 현실. 그것이 오늘날 예배를 바라보는 보통의 시각입니다. 교인이 수백 수천이 아니라 수만이라 하여도, 저는 예배가 살아 있어야 그 교회가 살아있는 것이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교회의 다른 모든 사역과 행사와 이벤트를 대신하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아니, 넉넉한 것이 아니라 비교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프로그램이나 사업도 예배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밀가루가 쌀을 대신하여도, 전기가 석유를 대신하여도, 세상 그 어떤 것도 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생명수입니다. 그 속에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이 사업도 잘 합니다. 공부도 잘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승리합니다. 예배 드리는 일에 집중하는 교회. 그것이 리지우드 장로교회가 기도하는 비전의 핵심입니다.

 

동등한 공동체로 출발

 

리지우드 장로교회가 다른 이민교회들과 구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리지우드 장로교회는 기존의 미국교회의 관계를 동등한 공동체로서 유지하고 있습니다. Rent가 아닌 Sharing의 상황으로 Rent비를 지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국교회 성도들과 목사님의 마음에 감동과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저는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는 환경이 허락되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민교회로서 우리 다음 세대와 지역 사회속에서 ‘한인의 교회’로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민교회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미국인의 교회와 공존하는 한 공동체로서의 시스템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우리 자녀들이나 그 다음 세대에서는 우리 한인들과 미국인 간의 결혼을 하는 가정들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까지 품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서 한 모델이 될 수 있다면 저는 우리 교회가 귀하게 쓰임을 받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공유가 아닌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리지우드 지역은 뉴저지에서 유명한 학군입니다. 한국에서 아이와 어머니만 유학을 와서 생활하는 형태의 이민자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우리 한인들이 세계 어디에 가서 산다 해도 교육열만큼은 정말 지나칠 정도로 강하지요. 교회에서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는 그러나 미국교회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준 높은 주일학교 교육을 공동체적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교회 주일학교의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저는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서만이라도 완벽하게 한국적인 교육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필요와 요구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우리교회에 허락하셨다는 점입니다. 뿌리가 없으면 성장도 없습니다.

한인이, 한인의 자녀들이 미국에서 미국인과 똑같이 미국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습니까? 시민권이든 영주권이든 비자를 지닌 신분이든 그런 행정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민족적인 자각과 의식이 설명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신분상 미국인일수도, 한국인일수도, 또 다른 어느 나라의 국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한 뿌리를 지닌 한 민족의 일원이며 그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저는 이민교회 주일학교 교육이 바로 이 점을 확실히 전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리지우드 장로교회의 주일학교 교육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 -내가할일은 오직 순종

 

하나님께서 저를 준비시키신 과정과 세월이 다른 훌륭하신 목사님들과 달랐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학력이나 세상적인 경험을 직접적으로 묻는 질문이 조금은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저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따져보자면 항상 앞서 있거나 먼저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한때는 그것이 능력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하고 나서는 또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좋은 회사에 취직을 잘 하고, 그리고 나서는 그 직장에서 남들보다 빨리 승승장구해서 출세를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목표이자 제가 이루어가는 현실이었던 때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저는 몰랐던 것이지요. 그것은 육체의 삶이었습니다. 영혼이 있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천국과 지옥이 있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셨다니! 성경공부를 통하여 깨닫게 된 영혼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이후의 삶은 제 생각과 가치관을 어느 정도가 아닌 송두리째 변화 시킨, 아니 완전히 새로운 삶을 소망하게 하시고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삶, 내가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남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 삶은 모두 헛되고 헛되니 모두다 헛된 것인가? 하는 질문도 동시에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사실 목회적 소명은 그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이자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30세 중반에 유럽에서 동구권이 개혁개방 되던 때에 지사장을 지냈을 때는 우리 나라에서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유명하신 분들을 매주 만나곤 했습니다. 얼마 전 서재를 정리하던 중에 그 때 당시에 주고 받았던 명함들을 찾았는데, 그 명함들의 이름을 보니 지금 한국의 정계, 재계, 언론계, 학계의 리더격인 인사들은 거의 다 있더군요. 그 당시의 나는 이 명함들을 받으면서 생각했었구나. 이런 명함들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더 높은 자리, 더 힘이 있는 자리, 남들이 부러워하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런 성공의 주인공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구나! 제가 그렇게 되었다면 저는 지금 제가 누리는 이 사명의 기쁨, 목회의 행복을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압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의 정상에서 저는 그것이 무엇이며 어떠한 느낌인지, 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그토록 포기하지 못하고 추구하는 것인지를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러한 가치들을 포기하거나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포기나 내려놓음은 비교의 결과입니다.

 비교를 해보니 이것이 더 좋고 가치있어 보여서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주시고 제 인생을 새롭게 하시고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해 부족한 저를 불러주신 은혜와 그 기쁨은 비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뿐입니다. 저는 포기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강권적으로 잡아주시고 인도해주심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진 미천한 경험들이 목사로서 사역하는 지금 그 지경을 확장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도움과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운지 저는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무엇 때문에 시험에 들고 어려워하는지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자신이 초신자였고, 선데이 크리스챤이었고, 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나주셔서 중생을 경험했고, 집사로, 장로로, 교회사역에 목숨을 건 평신도로 살아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은 진실로 진리입니다. 제 부족한 인생의 역정이 그 말씀 위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저는 무익한 종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저는 아직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교회가 교회답기 어려운 시대라고들 합니다. 사방에 영적인 방해와 우리의 교만이 초래한 믿음의 부재가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 되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 능력으로는 어렵습니다. 어림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 바로 서면 하나님께서 시대와 세대를 깨우는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방주의 역할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리지우드 장로교회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세월은 가고 꽃은 시들어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할것입니다. Paradigm이 어렵다, 한계 상황이다, 너무나 강력하다는 패배의식이 한국교회에, 이민교회에 가득합니다. 저는 Paradigm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Shift할 수 있습니다.

 리지우드 장로교회가 시대적 상황속에서 교회공동체의 본질로의 회귀를 꿈꾸며 Paradigm Shift를 이루어 내는 하나님의 귀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나아갈것입니다.

 

  

  

연영재 목사 (리지우드 장로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