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마우,
‘세상문화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하는가?’
우 리의 은혜의 신학이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형용할 수 없는 은혜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혹은 스펄전의 말대로 “의로운 통치자가 불의한 반역자를 위해 죽었다”고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면, 정말 우리가 ‘은혜’라는 용어를 일반 은총이 말하는 ‘은혜’에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분 자들이 서로 결합하도록 작용하는 힘이나, 계절이 주기적으로 돌아가도록 감독하고, 죄인들이지만 아름다운 멜로디를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이웃들과도 평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마음을 주시는 것, 이 모두를 놀랍고도 엄청난 구원의 은혜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 중에 일부는 본회퍼(Bonhoeffer)의 ‘값싼 은혜’의 개념을 들어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으면서도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온전한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완전히 참되시고 정의로우신 오직 한 분뿐인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는 것도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반틸이 일반 은총과 ‘은혜’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에 대해 우려한 부분에 주의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 전히 일반 은총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논할 때 일반 은총을 지지하는 자나 반대하는 자 모두 하나님이 구원과 상관없는 일에도 호의를 베푸신다는 부분이 핵심적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 자체를 은혜의 역사로 묘사하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하 나님은 사실 아무것도 창조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그것들의 존재를 좋게 보셨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선택받지 않은 인간 피조물에게도 호의를 베푸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 나님은 분명 비그리스도인 여인이더라도 잔인하게 강간당하는 모습에 마음 아파하며 공감하실 것이며, 믿지 않는 세속적인 부부이지만 서로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 기뻐하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아름답고 선한 업적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관심이 있으시다. 이를 설명할 만한 더 적절한 용어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힘을 일컬어서 일종의 ‘은혜’라고 이름 붙였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 의 근본적인 입장은 하나님은 복합적인 목적(multiple divine purposes)으로 세상을 이끌어가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그분의 계획을 드러내심에 있어,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을 집중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도 분명 관심이 있으시지만, 더 나아가 그분의 계획은 더 넓은 창조세계에까지 미친다.
헤르만 바빙크와 아브라함 카이퍼 모두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의 결과도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가치가 있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렇게 주장하는 성경적인 근거로 요한계시록 21장 24-26절을 들고 있다. 사도 요한은 땅의 만국이 거룩한 성의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며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는” 환상을 보았다고 기록한다.
분 명 성령으로 영감받은 저자는 신비의 영역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존재하는 것들은 마지막 영광스러운 날에는 어떻게 되고,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이방 문화의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들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은 들어가지 못하는”(계 21:27)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직 이 땅에 저주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는데 과연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그러한 것들을 어느 정도나 사용하고 누릴 수 있단 말인가?
우 리 중 일반 은총을 인정하는 자들은 그 가르침이 자주 오용되어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일반 은총의 가르침은 죄악된 문화에 마치 큰 변혁이라도 불러올 것인 양 승리주의적인 거짓 희망을 조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은총 신학자들의 옳은 점은 하나님이 복합적이고 다양한 목적으로 현 시대를 이끌어가고 계시며 그의 신실한 백성을 부르시어 다양한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실현하는 대리자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이 렇게 문화적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일수록 칼빈주의적 온전함과 겸손함으로 문화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깊은 상처를 입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잡하고 다양한 뜻을 분별하는 작업 또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일반 은총 신학자들이 우리에게 주문해온 것이다.
-리처드 마우(미국 풀러신학교 총장), ‘문화와 일반 은총’(새물결플러스)에서
글보낸이 : 한은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