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상 앞에 모여든 수많은 귀신 떼거리를 보았다.”
하나님을 참으로 만난 후에도 제사문제는 내 마음속에 항상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 말하지는 못했지만 내게 심각한 갈등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갑자기 제사를 지내기 싫다는 깜짝 놀랄 생각으로 갈등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사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때 나는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신앙적 확신에 거하였던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제사 문제에 대해 어떤 영적 해답이나 계시 같은 것도 듣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그토록 많은 제사에 단 한 번도 참석지 않았을까? 다만 제삿날마다 제사 지내기 싫은 마음이 변함없이 나를 지배했고, 해가 지나면서 제사 지내지 않는 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고착되어 버리고 말았다.
내게는 신앙과 같았던 제사가 갑자기 싫어진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도 답답할 노릇인데, 더 답답한 것은 제사 지내기가 그토록 싫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 아련한 향수처럼 아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갈등을 어느 누구에게 털어 놓을 수 있었겠는가.
특히 하나님을 만난 후, 나의 영이 거듭나고 기적처럼 모든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난 후에도 이 갈등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기도에 깊이 몰입하려는 순간마다 마귀가 길목을 가로막고 서서 제사문제를 내 앞에 내밀었으며, 나는 그 때마다 정리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수없이 주춤거려야 했다.
왜 우리 기독교는 제사문제를 그토록 극단적으로 평가하는가? 왜 우리나라의 제사를 꼭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이나 이방신에 대한 제사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한국 전통문화로서 조상에 대한 경애와 뿌리 찾기의 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성경에도 많은 족보가 있으며 혈통의 문제가 때로는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그 맥락에서 유교적 전통과 제사문화를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상에게 절하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한번 시작된 불신과 회의는 좀처럼 꺼질 줄 모르고 내 가슴 깊은 곳에 고집스러운 성(城)을 쌓아가고 있었다. 기쁨의 노래가 점점 사라지고, 신앙의 열정이 식기 시작했으며, 목사님의 피를 토하는 설교마저 마음에 와 닿는 강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영적 침체와 스트레스가 극한에 다다른 어느 날 나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놀라운 해답을 주셨다.
그날 나는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믿음의 동역자 한 사람과 밤늦도록 기도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새벽 1시를 넘긴 무렵이었다. 텅 빈 도로 중앙을 같이 걸어오던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간증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전도로 은혜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데 옹기도마(옛날에 옹기를 굽던 동네라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 같다) 앞을 지나쳐 오는 순간에 썩는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했던 엄청난 악취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고 태우는 듯했다. 동역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인 무언의 교감, 옹기도마 안에서 틀림없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봅시다!”
옹기도마 안으로 들어갈수록 독한 냄새는 한층 더 코를 찔렀다. 사냥개처럼 냄새를 따라 걸어 들어가는 우리 눈앞에 이윽고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이 나타났다. 활짝 열린 대문, 환한 전등불 아래 대청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니 제사 지내는 집이 분명했다.
“더 가까이 가 볼까요?”
“예, 그랍시더.”
사람들은 빨랫줄을 풀어 마당에 늘어놓고(귀신이 들어오다가 빨랫줄에 걸리지 않게) 제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제상 위에는 갖가지 제물들이 진설되어 있었고 제상 중앙에는 지방과 함께 돌아가신 내외분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다소 긴장하며 다시 한 번 대청 안을 살펴본 순간!
나는 그때까지 귀신이나 악령을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영적 존재도 동일한 범주에 국한시켜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눈앞에서는 기상천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기술하는 내용은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신학적인 논쟁거리나 오해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제상 위는 물론이고 제상 아래에도 천장에도 비로드처럼 진한 흑색의 영체(靈體)들이 온통 북적대고 있었다. 혹시 잘못 보았나 싶어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수백을 헤아리는 엄청난 귀신떼들이 온 집을 누비고 있었다. 육신을 가진 제한적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여서인지 그들은 마치 공간이동 하듯이 제상의 위아래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그들은 흡사 여름날 강물 속의 숱한 피라미떼처럼 한꺼번에 무리를 지어 종횡으로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사람들의 몸속에까지 들락거렸다. 수백의 떼거리들이 사람의 입으로 한꺼번에 들어가 그의 온몸을 휘젓고 다니다가 옆구리로 빠져나오질 않나, 다시 제상 위로 올라가 제물들을 밟아대면서 춤을 추다가 허공을 빙글빙글 맴돌질 않나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놀란 것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의 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기에도 섬뜩한 귀신들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북적대고 있을 뿐 정작 제사를 받는 사람의 영혼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내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셨다.
‘지금 네가 보는 것이 바로 사단의 실체이며 귀신의 실상이다. 인간의 영은 육신을 떠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그 날까지는 임의로 이 세상을 들락거릴 수 없다. 영계(靈界)에 들어간 인간의 영이 제삿날이라고 외출하여 제사상 앞에 찾아온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일 뿐!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윗대 조상님들도 죽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 낙원(樂園)과 음부(陰府)로 구분되어 들어간다. 제삿날에 후손들이 벌여놓은 이 제사상에는 조상의 영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네 눈에 보이는 저 더러운 귀신들이 대신 몰려들어 무지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외에는 그 어느 제사라도 귀신들의 놀이터요, 인간을 더럽히는 사탄의 유희임을 알라!!’
짧은 시간에 내 마음이 정리되고 있었다. 성령님의 놀라운 가르치심에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전율을 했다. 그랬구나! 내가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그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살펴보시며 나를 사랑하셔서 저 더러운 제사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지켜 주셨구나. 나는 아내에게 진 빚을 갚아보겠다는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교회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려는 구원의 경륜 안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신 결과였구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보면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지내도 괜찮다는데 왜 기독교에서만 그렇게 기를 쓰고 안 된다는지 모르겠어요. 제사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교회에 갈 텐데.”
이 말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제사라는 것이다. 더럽고 사악한 귀신들은 제사로 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옹기도마 제삿집 문 앞에서 목도한 현실을 바탕으로 이 거대한 비밀의 세계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성경이 밝히고 있듯이 귀신은 거짓과 기만의 천재들이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과 충효의 아름다운 사상을 이용하여 하나의 계략을 만들었다. 곧 조상을 잘 섬겨야 한다는 인간의 근본 윤리를 이용하여 제사라는 의식을 만든 것이다. 그들은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 조상의 혼백이 오신다’는 거짓사상을 심어놓고는 누구보다 조상을 잘 섬기기를 원하는 백성들의 제사자리에 자신들이 찾아와 지옥의 동반자로 사로잡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엑소시스트(영매 혹은 무당)들이 접신하는 귀신들은 어김없이 조상신들이다. 특히 그 귀신들은 그 가문과 가정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귀신같이’, ‘족집게처럼’ 알아맞힘으로써―영물(靈物)인 귀신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들이므로 인간역사의 과거를 알아맞힐 수 있다.―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옭아맨다.
그런데 미국이나 서구 쪽의 영매들이 접신하는 귀신들 중에는 ‘조상’이라고 자칭하는 것들이 거의 없고 대부분 친하게 지내다가 먼저 죽은 ‘친구’를 빙자하여 나타난다. 그네들의 의식 세계에서는 조상을 숭배하는 마음보다는 친한 친구와의 우정이 더 깊고 우월하기 때문이다. 또 중국 쪽에는 조상이나 친구가 아니라 ‘장군신’이 나타난다. 중국인들에게는 장군 숭배 사상이 있어서 가는 곳마다 관우, 유비, 조자룡 등 장군들의 사당을 지어놓고 숭배하기 때문에 귀신들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귀신들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그들이 노리는 대상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와서 그 곳에 영적 갈고리를 꿰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효도사상은 극히 칭찬받아야 하고 장려되어야 할 미덕 중의 미덕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이것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안 이상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개인적인 체험을 덧붙인 것이다.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 : 20)
-박효진 장로/ 전 구치소 경비교도대 대대장,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홍성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