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만델라, 그리고 남아공 이라는 나라

 

 

 

로벤 섬과 흑인 하녀

 

넬슨 만델라가 세상을 떴습니다. 향년 95. 그의 명복을 빕니다.

만델라의 타계 소식을 듣고 10여 년 전 남아공을 여행했을 때의 애잔한 기억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대서양에 외로이 떠 있는 로벤 섬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포 사업가의 집에서 본 흑인 하녀의 모습이었습니다.

 

남아공 제2도시 케이프타운은아프리카 속의 유럽으로 불립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남아프리카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유럽풍의 도시가 그지없이 로맨틱하게 보입니다. 테이블마운틴의 산맥 끄트머리에시그널힐이라는 높은 언덕이 있는데, 그곳에 서면 대서양의 둥그런 수평선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 바다에 조그맣고 평평한 섬이 하나 떠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인종분리정책을 편 남아공의 소수 백인 정권에 저항하다 반역죄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3년부터 1982년까지 18년 간 수감되었던 유형지 로벤 섬입니다.

 

면적이 160만 평 되는 섬 주위는 대서양 물결이 해안에 부딪히면서 생기는 파도로 하얀 띠를 두른 듯합니다. 육지와 가장 가까운 거리는 11, 헤엄 잘 치는 사람이 쉽게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렇지만 로벤 섬과 케이프타운 사이의 바닷물은 이 세상에서 헤엄쳐 건너기에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남극에서 흘러온 차가운 벵겔라 한류가 한순간에 몸의 열기를 빼앗아 버립니다. 또한 이 한류를 타고 상어 떼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헤엄을 친다고 해도 상어 떼에게 몸이 갈기갈기 찢겨 버립니다.

 

이런 자연환경으로 로벤 섬은 백인들이 남아공을 통치한 400년 동안 천혜의 격리지 또는 유형지가 됐습니다. 이 섬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400년 동안 딱 1명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흉악범의 유형지 또는 나병환자의 격리지로 쓰이다가 점차 정치범 수용소로 변했고, 20세기 후반 들어서는 소수 백인 정권의 인종분리정책에 반기를 든 흑인 반체제 정치범들이 이곳에 수용됐습니다.

 

현지에서 설명을 들었을 때 영화빠삐용의 주인공 스티브 매퀸의 얼굴에 만델라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기억에 떠올랐습니다. 빠삐용은 자신의 탈출만을 궁리했지만, 만델라는 남아공 원주민들을 소수 백인 통치로부터 해방시키는 방안에만 골몰했습니다.

 

케이프타운을 방문했을 때 만델라는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끝내고 물러난 이후였고, 로벤 섬도 400년 유형지의 운명을 마치고 국립 박물관으로 거듭 태어나 관광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델라가 떠나버린 로벤 섬의 주인은 펭귄과 사슴뿐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델라는 1982년 로벤 섬에서 케이프타운의 형무소로 옮겨진 후 남아공의 소수 백인 정권과 협상하여 인종분리정책을 종식시키는 해방운동을 완결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남아공의 원주민이면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흑인의 비통함과 원한을 어떻게 화해로 승화시킬 것인지, 보복의 두려움에 떠는 백인을 어떻게 안심시킬 것인 지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혁명적 상황이나 마찬가지인 흑인 정권의 탄생 과정에서 평화로운 정권이양이 가능했던 것은 만델라의 화해와 용서의 신념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고문하고 44세에 71세까지 27년간 형무소에 수감한 백인 지배자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그의 내공은 아이러니하게도 로벤 섬의 수형 생활에서 배태되었다고 만델라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로벤섬을 그와 동료들의대학이라고 술회할 정도였습니다. 백인의 언어를 배우고, 백인 통치자들을 다루는 전략을 다듬게 됩니다. 특히 만델라를 가혹하게 다루던 백인 간수들도 반성하고 신문과 외부 정보를 만델라에게 넣어주면서 만델라는 그들과의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인종분리정책의 종결 후 남아공의 미래 청사진을 그렸습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 식장에 로벤 섬의 교도관들을 초청했을 정도였으니 그의 내면 세계를 짐작할 만합니다.

 

뉴욕타임스는 2007년부터 만델라의 부음 기사를 준비했습니다. 그 때 인터뷰에서당신에게 그런 야만적인 행위를 가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어떻게 다스렸습니까?” 라고 묻자, 만델라는증오는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지도자는 미워하는 데 마음을 쓸 수가 없습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남아공 최대의 도시 요하네스버그는 소수 백인과 다수 흑인이 얼마나 다른 환경에서 사는지를 보여주는 곳이었습니다. 인종차별정책이 존재할 때는 흑인이 백인 거주지를 방문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10년 전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는 차별정책은 무너졌지만 경제적으로는 변한 게 없었습니다. 빈민가는 끝없이 이어졌고, 도심은 할릴없는 청년들이 떼 지어 다니는 모습으로 공포를 느낄 정도였습니다.

 

교포 사업가의 안내로 백인 주택가에 위치한 그의 집에 갔습니다. 경비시설이 잘된 주택가였는데, 야자수가 우거진 수영장과 스페인풍의 주택은 미국 플로리다에서나 볼 수 있는 부잣집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그 교포는 나를 넓은 거실 소파에 앉게 하고 벨을 눌렀습니다. 곧이어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흑인 하녀가 문지방을 넘자마자 카펫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커피를 가져오라는 지시에 그녀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뒷걸음으로 물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치 내가 영화 속에서 중세 부호 저택에 들어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리에 넘쳐나는 그 많은 실업자들의 군상을 떠올리니이 하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사람들이 넘쳐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는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지만 경제와 문화는 쉽게 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만델라는 지난 15년간 대통령직에서는 물러나 있었지만 그의 정신적 유산이 강력하게 남아공 사회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새로운 흑인 지배층은 흑백의 경제적 불평등을 급속히 치유하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은 만델라의 카리스마와 세계 여론의 향배 때문에 급진적인 변화를 자제해왔습니다. 이제 만델라가 세상을 떠났으니 남아공화국이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합니다.

 

남한의 12배가 넘는 넓은 국토에 5,0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 최대의 부국입니다. 부의 원천은 수백 년의 백인 통치 동안 축적된 경제 시스템 및 기술과 인프라가 융합된 결과라고 합니다. 만델라는 흑인을 인종차별정책으로부터 해방시키되 남아공의 번영을 위해서 백인 정권이 이룩한 경제 시스템을 발전적으로 융합하는 일종의무지개 국가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남아공 내부의 정정은 매우 불안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새로이 등장한 흑인 엘리트의 권력 투쟁과 부패 스캔들입니다. 오랜 망명 생활의 궁핍함에 지친 지배 엘리트들은 쉽게 부패하기 시작했고, 이들과 빈곤한 대중들의 갈등은 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광산 파업과 주변 국가에서 이주자가 늘어나면서 거리 범죄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경제권을 쥐고 있는 10%의 백인들은 불안한 나머지 투자 의욕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통합의 상징성을 가진 만델라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프리카는검은 대륙이란 슬픈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피부 색깔이 검어서 생긴 이름이기도 하지만 근대 이후 겪은 아프리카의 비극적 상황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아공은 에티오피아에서 남아공 해안까지 이르는 인류 탄생지에 속합니다. 하나가 된 지구촌, 아프리카의 안정이 세계 평화에 중요합니다.

 

남아공이 아프리카 대륙의 희망의 빛으로 떠오르기를 바랍니다. 만델라의 정신적 유산이 마법을 발휘했으면 좋겠습니다.

          

 

 

 

<필자 소개> 김수종

1974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30여년 기자로 활동했다. 2005년 주필을 마지막으로 신문사 생활을 끝내고 프리랜서로 글을 쓰고 있다. 신문사 재직중 신문방송 편집인협회 이사와 정보 통신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환경책 ‘0.6지구 온난화와 부메랑(공저)”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