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년 이장호 감독의 변신


 데뷔 40년 이장호 감독의 변신

 그들(관객)의 영혼을 망친것 같다. 죄악의 영화였다.

부끄럽다.

돈벌이로 돈독이 올라 만든 영화가 많았다. 바람도 피우고 방탕하게 살았다. 그빚 갚으려 기독교 영화 만들고 있다.

4년전, 교회 장로도 되고 서울 청계산 입구에 조그만 개척교회도 일궜다.

 데뷔 40주년을 맞은 이장호 감독 “사람들의 영혼을 비추는 빛과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앙포토]

 

한국영화사의 명대사를 꼽는다면 다음 장면을 빠뜨릴 수 없다.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문호·신성일) “술 한잔 하실래요. 제 입술은 조그마한 술잔이에요.”(경아·안인숙)

이 장호(69)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이다. 지금 들으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하지만 40년 전에는 폭발력이 대단했다. 국도극장 한 곳에서 105일 동안 46만 관객을 불러들였다. 요즘으로 치면 ‘1000만 영화’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별 들의 고향’은 유신 시절 통기타·청바지·생맥주로 상징됐던 청년문화의 탄생을 선언했다. 호스티스 경아는 대단한 신드롬을 일으키며 70년대 멜로드라마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영화에 삽입된 가수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한 잔의 추억’ 등은 ‘불후의 명곡’으로 남게 됐다.


당시 스물아홉 열혈청년 이장호는 이 데뷔작으로 벼락스타가 됐다. 그리고 40년이 흐른 오늘, 그가 20번째 작품 ‘시선’(4월 17일 개봉 예정)으로 충무로에 돌아온다. 흥행에 참패했던 ‘천재선언’(1995) 이후 19년 만의 복귀다. 10일 만난 그는 자유로웠다. 푹 눌러쓴 모자 뒤로 빠져 나온 머리칼, 신발끈이 풀린 워커화 등 예술가 체취가 물씬했다. “한 번 땋아볼 요량으로 머리를 기르고 있다”고 했다.

 “왜요?”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차라리 빨갛게 물을 들이시죠.”

 “그건 옛날에 많이 해봤고.”

  사실 그의 지난 20여 년은 저물어가는 시간이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며 영화인 타이틀을 이어갔지만 과거의 영광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그런데 연초 즐거운 소식이 들렸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역대 한국영화 톱10에 그의 작품 셋이 포함됐다. ‘별들의 고향’,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바보선언’(1983)이다. 두 작품이라도 순위에 올린 감독이 없는 만큼 그가 한국영화에서 차지해온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현역 감독 대열에 다시 합류했으니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싶었다. 그런데 웬걸, 그는 차분하기만 했다. 아니 참회의 분위기가 또렷했다.




  “명예·인기에 대해 둔해졌다. 전에는 민감했었는데…. 27년 전 ‘Y의 체험’ 이후 쭉 내리막길이었다. 전성시대는 지나갔다. 고통이 컸다. 만드는 영화마다 실패하고, 집은 경매에 넘어가고. 어느새 후배들의 병풍 노릇을 하고 있더라. 자식들 앞에서 내 신화가 깨지는 모습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 그래도 숱한 화제작이 있는데.

 “부끄럽다. 돈벌이로, 돈독이 올라 만든 경우가 많았다. 제작자 주문도 있었고. 바람도 피우고 방탕하게 살았다.”

 - 자신의 영화 세계를 부정하나.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시선’을 처음 공개했을 때 한 관객이 묻더라. ‘그러면 지금까지 당신의 영화를 좋아했던 우리는 뭐가 되느냐’고. 할 말이 없었다. 예전에는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들의 영혼을 망친 것 같다. 죄악의 영화였다.”

 - 좀 과장된 표현이다.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을 즐긴 이도 있겠지만 이제 내게는 ‘감독님 책임지세요, 제가 성(性)적으로 피해를 봤어요’라고 들린다. 제 영화에 감동받았다고 하면 킬링 타임을 한 것이다. 저로선 시대의 이슈를 이용한 이기심의 표현이었고.”

 - 그건 에로영화 얘기다. 시골 청년 셋의 고단한 서울살이를 다룬 ‘바람 불어 좋은 날’은 70년대 한국사회의 초상화처럼 평가된다.

  “‘별들의 고향’ 이후 대마초 사건으로 4년간 활동이 정지됐다. 집도 팔고, 자동차도 팔고, 천호동 월셋집으로 밀려났다. 밑바닥 현실을 알게 됐다. 한국영화에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까, 내가 살아온 시간을 의심하게 됐다. 그게 터닝 포인트가 됐다. 70년대 군사정권에서 다루지 못했던 빈곤과 부정부패를 주목하게 됐다. 한국영화의 사라진 리얼리즘을 회복하고 싶었다.”

 - ‘별들의 고향’에도 술집 여성 등 소외된 사람이 여럿 나오는데.

 “그땐 부끄러움이 없었다. 단지 감각적으로 그렸다. 오죽했으면 미대 조교로 나오는 화가 신성일이 나름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살았겠나. 의식이 없던 때였다.”

 - 영화감독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바보선언’도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힌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3S(섹스·스크린·스포츠) 정책을 야유하지 않았나.

  “정부의 검열 정책에 염증을 느끼던 때였다. 영화를 그만둬야겠다, 한번 망쳐봐야겠다고 작정했다. 처음 생각한 제목이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였다. 뜻밖에 대학가에서 입소문이 났다. 영화 성공의 절반은 전두환 정권 덕분이다. 시대에 대한 저항을 내가 이용한 측면도 있고.”

 - 인생은 역설인 모양이다. 감독의 아버님도 50년대에 영화검열관을 지내셨는데.

 “어 렸을 때부터 영화에 익숙한 환경이었다.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이승만 정부에서 틀지 못했던 채플린도 볼 수 있었다. 아버님이 개방적인 분이라 내가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도 적극 밀어주셨다. 내 영화의 아버지인 신상옥 감독에게 소개도 해주시고.”

  신작 ‘시선’은 그의 작품목록에서 다소 이질적인 영화다. 선교와 배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다룬 기독교 영화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샘물교회 선교단 피랍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이슬람 지역에 단기 선교를 갔다가 목숨과 신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이 감독은 “이제 인생 후반전을 시작한 것 같다. 제2의 데뷔작이다. 관객을 생각하고 만든 첫 영화”라고 했다.

 - 제작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아마추어들의 시대였다. 저도 아마추어였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찍었다. 노하우 축적이란 것도 없었고…. 배우들 연기도 상투적이었다. 동시녹음이 안 돼 대사를 외우는 배우도 없었다. 옆에서 불러주는 대로 읊었다. 반면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계산과 준비를 해오던지. 주연 오광록은 연기노트를 한 권 분량으로 만들어왔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느꼈다.”

 - 새 영화의 종교적 색채가 짙다.

  “비행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라. 산과 강은 아름답지만 도시는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자연 다큐 ‘마이크로코스모스(Microcosmos)’를 좋아한다. 송충이를 용처럼 크게 확대해보니 모든 털기가 무지갯빛으로 움직이더라.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즉 하나님의 시각이다. 우리의 육체를 벗어나면 영혼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육안에 비친 아름다움은 화장기 진한 여성과 비슷하다. 이번 영화의 주제와 통한다.”

 - 변신이 급작스럽다.

 “사실 오래됐다. 96년 두 번째 결혼생활에서 늦둥이를 보면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섹스의 목적이 쾌락이 아니었다. 그 전에도 교회를 다녔지만 신앙과 일상이 분리된 이중생활을 했다. 내 죄를 잘 몰랐다. 4년 전 장로가 됐고, 서울 청계산 입구에 조그만 개척교회도 일궜다.”

 - 목사님 같은 말씀이다. 영화는 일탈과 반란을 꿈꾸는 장르 아닌가.

  “오래전에 소설가 김승옥이 ‘교회를 가봐라’고 권했을 때 ‘이 형 날 샜구나’라고 생각했던 나였다. 지적 허영심이 컸던 거다. 초·중·고 동창이자 ‘별들의 고향’ 원작자인 최인호의 유고집 『눈물』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기도했다. 저도 최인호 같은 죽음을 맞게 해달라고. 최인호도 마지막 투병기 5년을 빼고는 속물적 삶을 살았다. 글재주라는 에고이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 최인호는 어떤 친구였나.

  “평생의 은인이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3류 딴따라에 그쳤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로 살지는 않았을까. 그가 조숙하고 영리했다면 나는 감각적이고 철부지였다. 인호에 대한 열등감도 컸지만 대신 그도 내게서 소설적 영감을 얻었다. 『눈물』에 대한 나의 답신을 영화화하고 싶다.”

 - 종교 영화를 계속할 것인가.

 “그렇다. 일부러 좁은 길로 들어섰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자기 복만 비는 기복신앙이 아니다. 자신을 낮춘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게 지금껏 관객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이다.”

내 인생의 배우 셋





이장호 감독은 원래 배우 지망생이었다. 대학(홍익대 건축미술학) 시절 신상옥 감독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연출을 하겠다”고 말한 게 그의 오늘을 결정짓게 됐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를 떠받쳐온 기둥은 배우들이다.

  그는 스타를 기용하기보다 신인 배우들을 키워온 조련사였다. 아역배우 출신 안인숙을 ‘별들의 고향’에서 파격 발탁한 게 대표적 사례다. 지금은 ‘국민배우’로 불리는 안성기도 ‘바람불어 좋은 날’ 출연 당시 신인급이었다. 문화부 장관, 국립극장장을 지낸 김명곤도 ‘바보선언’ 전까지는 주로 연극판에서 활동했다.

 이 감독은 ‘내 인생의 배우’로 이보희(왼쪽)·박원숙(가운데)·김명곤(오른쪽) 등을 꼽았다.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 등 에로틱 영화로 유명한 이보희에게 그 예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보희의 본명은 조영숙. 쉽고도 귀한, 섹시한 느낌이 좋아 ‘이보희’로 정했다고 한다. 그는 “이솝우화 같은 얘기지만 이보희가 나이 먹으면 거기에 맞춰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가 시집을 가서 다행이다”라며 웃었다.

 이 감독은 김명곤을 높게 평가했다. “연기력보다 정신적 자세가 좋았다. 서양 사람의 연기는 동양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탈춤·마당극에서 닦은 기량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간파했다. 그게 내게 먹힌 것 같다”고 말했다. 김명곤은 ‘어우동’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명자 아끼꼬, 쏘냐’에 잇따라 출연했다.



  드라마에서 억센 캐릭터로 자주 나오는 박원숙도 이 감독과 인연이 깊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과부춤’ 등에서 강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이 감독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배우였다. 집념의 연기를 보여줬다”고 평했다.

 

박정호 : 중앙일보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2014년  3 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