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날에 생각하는 어머님

 어머니 날에 생각하는 어머님

                                                                        [뉴욕 중앙일보/2014-5-10)






김해종 / 목사·전 연합감리교 감독

 

어머니 날’이 되면 할아버지인 나도 어머님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머니를 추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 날에 무슨 추상적인 모성애에 대하여 쓰느니 나의 어머니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모든 어머니에게 청춘이 있었듯이 나의 어머니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때 어머니는 ‘신여성’으로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계셨다. 당시 중매하는 사람으로부터 아버지 사진을 받고 부끄러워 화장실에 가서 혼자 봤다는 이야기를 하시곤 하였다. 

아버지는 당시 동경 와세다대학 법학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계셨다. 아버님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기획처에서 경제계획관으로 일하셨다. 부모님과 2남2녀는 행복하게 살아갔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으니 6.25 전쟁이 모든 꿈을 앗아갔다. 

공산당의 눈을 피해 사시던 아버님은 병을 얻어 9월 27일 서울 일부가 수복되던 날 돌아가셨다. 그렇게 44세의 젊은 나이에 어머님은 홀로 되셨고 그후 불과 3개월 후인 1951년 1.4 후퇴 때 어린 4남매를 데리고 정처 없는 피난길을 나서게 되었다. 

춥고 추었던 엄동설한.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손수레를 끄는 이제 겨우 16살 된 장남인 나를 앞세우고 한강 얼음 위로 건너갈 때 어머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나 어머님은 강하셨다. 우리 가족은 이곳 저곳으로 전전긍긍하며 살아 남았다.

내가 부평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동안 어머님은 그곳 감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지성적이신 어머님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린 후 성경의 진리를 터득하시면서 기도에 열중하셨다. 

그렇게 외로우셨던 어머님은 신앙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와 감격의 생활을 하시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교회에 가서 “하나님 우리 가족을 어려웠던 피난길에서 보호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는 과부요 피난민이니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내게 있는 것은 4남매뿐인데 내 보화 4남매 주께 바치오니 주의 뜻대로 쓰시옵소서”라고 매일 기도하셨다고 한다.

어머님의 롤모델은 성 어거스틴을 하나님께 바치고 ‘어머니의 눈물이 있는 기도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 어머니 모니카였다.

하나님의 뜻은 나로 하여금 미 해병대 군목 뮐러 목사를 만나게 하셨다. 1주일이면 서너 번씩 그의 설교를 통역하게 된 나는 마침내 목회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뿐인가 동생(김중언 목사)은 물론 여동생 둘도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자 남편(나구용·김선량 목사)을 맞게 되었으니 어머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셈이다. 

어머님의 신앙은 뜨거웠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었다. 당신도 전도사로 교회에서 봉사하셨다.

우리 가족 7명이 공부한 감리교산학대학에서는 4남매를 다 하나님께 바친 어머님(강우진 전도사)에게 표창했다. 1980년대에는 뉴욕한인회가 이민교회를 위해 공헌하고 있는 4목사의 어머니로서 ‘장한 어머니상’을 수여했다.

거지가 오면 밥상을 차려 주시던 어머니 추운 겨울에 길가에 떨고 있는 걸인에게 새벽기도 가시던 길에 속옷을 벗어 주시는 어머니.

그러나 무엇보다 어머님은 44세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셔 일생을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다. 그것이 어머니라면 현인이 불렀던 국민가요 가사에서처럼 ‘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이 말해주듯 어머님 계신 곳이 곧 우리의 고향이요 어머님의 품이 우리의 안식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으니 또한 어머니와도 같으신 주님의 품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이리라.

 



김해종 목사 ( 뉴저지 연합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