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십자가


 

□예수님과 십자가①



다른 종교 창시자들에 비해 예수님의 일생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30년 동안 평범한 목수로 살다가 갑자기 약 3년 동안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열두명의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셨습니다.
그 리고 그 사역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까지 확장하다가 예수의 세력이 무섭게 커지는 것을 우려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무고하게 고발되어 로마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는데,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40일을 더 있다가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3년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1년이 조금 더 되는 기간을 ‘공생애’사역이라고 합니다. 목요일에 체포되어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으니, 시간으로 따지면 28시간 정도이지만 날짜로는 3일인 십자가 부활사건이 그냥 예수 생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을 당한 그 사건이 인류의 죄를 대신 용서받기 위한 사건이었다! 죄는 반드시 피와 죽음을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일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잠깐! 여기서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아셨을까요? 예수 말고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었습니다. 꼭 예수만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인류가 구원받는 것일까요?
당 연히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바울은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2:13)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인류구원의 역사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알았다면 예수를 그렇게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용우



□예수님과 십자가②



만약 예수님이 2천년전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태어나셨다면 그래서 무고를 당해 사형을 당하셨다면 아마도 당시에 가장 처참한 처형 방법인 육시(戮屍)를 당하셨을 것입니다. 몸을 목과 팔다리를 잘라 여섯 토막을 내는 것을 육시처형이라 합니다. 아니면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셨을 수도 있는데 팔과 다리와 목을 말이 끄는 수레에 묶어 몸이 찢어질 때까지 사방으로 달리도록 채찍을 가하면 온 몸이 찢어집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 온 몸이 똑똑 잘라진…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에서 가장 처참한 처형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방법이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십자가는 반드시 예수님이 달려있어 그것을 ‘십자고상’이라 합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부활하셨기 때문에 없습니다. 아예 십자가 자체가 없는 교회도 많습니다.
예 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할 수만 있으면 그냥 안하고 싶습니다.’하고 기도했지만 그것은 그 고통이 너무 힘들거란 생각 때문이지 진짜로 불순종의 마음은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이후에는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물리학에 ‘불가역의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번 일어난 일은 일어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후 이제 그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에 어떤 의미와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의 결과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은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에 의해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최용우



□예수님과 십자가③



사실 구약성경에 메시아가 와서 인류를 구원한다는 예언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우리 죄를 대속할 것이라는 예언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보다 성경을 천배는 더 잘 아는 유대인들이 ‘예수는 구약에서 말한 그 메시아가 아니다’라며 믿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스승님인 아무개목사님 글 중에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왜 예수가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는가? 왜?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가 용서받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데 무조건 못 믿겠다. 이유를 알아야겠다.’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신다면 그냥 시간 질질 끌지 말고,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를 죽이지도 말고, 그냥 싹 다 한 순간에 온 인류를 용서하셔서 다 천국으로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겁나게 지옥같은 것은 뭐 할라고 만드셨을까?
켄터베리의 주교였던 안셀룸의 책에 ‘배상만족설’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배상해야 한다는 논리를 근거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께 만족스러울 정도로 보상을 제공하는 수단이 된다. 만약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은 채 죄를 용서한다면 그 죄는 처벌받은 것이 아니며 그로 인해 세상은 무질서하게 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천주교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예수 십자가 구원’에 대한 변론중 아직까지는 ‘배상만족설’보다 더 나은 설명은 없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사막의 교부들, 어거스틴, 칼빈같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리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예수가 구원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해가야 합니다. ⓒ최용우



□예수님과 십자가④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무수히 많은 정치범들 중 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류 구원 방법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복음서와 사도신경과 다른 신약성경이 쓰여진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자칭 예수들이 가짜인 것은 그가 죽어보면 압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진짜 재림예수이지만, 구더기가 시체를 파먹어버리면 그는 그냥 인간입니다. 어떤 가짜 예수가 계룡산에서 죽었습니다. 죽기 전에 그를 따르는 신도들에게 자신은 부활할 터이니 몸을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15일이 지나도 살아나지 않자 하나 둘 다 떠나고 나중에 경찰들이 와서 썩어버린 시체를 치우고 소독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변화시켜 인간들이 인갑답게 살아가게 하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려는 차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걸 바라셨다면 다른 종교로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부활사건을 근거로 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게 하며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하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다시 살아나셨을까요? 무섭게.
그 답은 부활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15장에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가에 대해 증언한 다음 우리도 예수님처럼 ‘변화’된다고 합니다.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변화되게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썩어지는 것의 변화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영의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복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썩지 않는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 본질입니다. ⓒ최용우

 

□예수님과 십자가⑤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다. 무당이나 점쟁이에 대해 실망했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고로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은 그래도 기독교는 이래야 한다는 기대감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을 기본적으로 심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추구합니다. 무신론자라도 다급한 상황에 처하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절대자를 찾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는 것을 보면 그 마음에 있는 그리움의 원형(原型)이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실망감을 표현합니다.
오 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이상하게도 십자가와는 정 반대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된다는 식의 설교는 ‘물질만능주의적 시대정신’이지 기독교 정신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버림을 받아 죽으신 대가로 이제 그것을 믿는 이는 사망에서 건짐을 받아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십 자가는 “이제 너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뭐가 못미더워서 근심 걱정 염려가 가득하여 이 세상에서 나를 보호해 줄 ‘성공’이라는 것을 불나방처럼 쫒아가고 교회는 그것을 가르쳐주기에 혈안이 되어 있단 말입니까?
교 회가 목숨 걸고 가르쳐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이 아니라 예수 믿고 새 생명을 얻었으니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법’을 목숨 걸고 가르쳐야 합니다. 안티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딱 뒤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최용우

 

최용우 (햇볓같은 이야기 사역자)의 글 7월 11일부터 15일 까지  매일 쓴 글을 하나로 묶어 올린다-  권문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