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경술국치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과거에 눈을 감으면, 미래를 볼 수 없다.”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 중 하나다. 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유지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었고, 수치스러운 역사도 있었다. ‘자랑스러운 역사’는 널리 알리고 강조하여야 한다. ‘수치스러운 역사’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태 전 [명량]에 이어 요즘 [인천상륙작전]이란 영화가 흥행하고 있다. 12척의 배를 가지고 300여척의 왜군과 싸워 이긴 이순신의 활약상, 북한의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밀렸던 상황에서 단숨에 전세를 뒤집어놓은 인천상륙작전 모두 자랑스러운 역사로 널리 알리고 강조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도 안 되어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였다는 사실, 임금인 선조와 관리들은 살길을 찾아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 등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민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고,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관리들은 국민들에게 남으라 하고 자신들만 도망친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국가를 유지·관리해야 할 책임자들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에 대해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8월29일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지 106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제국은 1910년에 멸망하였다. 경술년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였다 해서 이를 ‘경술국치’라고 한다. 대한제국은 조선에서 비롯되어 519년이 된 나라였다. 500년 역사를 가진 나라가 망하였지만, 망한 원인을 찾거나 반성하는 일에는 눈을 감고 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일제의 침략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국가의 유지·운영을 책임진 군주와 대신들에게도 그 원인이 있고 책임도 있다.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의 제5조는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는 내용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갖고 온 것은 4개조뿐이었다. 제5조는 대한제국 쪽에서 요구하여 들어간 내용이다. 국가의 주권을 빼앗겨도 황실만 안녕하고 존엄을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병합조약’도 다르지 않다. 8개조 중 제1조와 2조는 한국에 관한 통치권을 양여한다는 것과 양여를 수락한다는 내용이고, 제8조는 공포일로부터 시행된다는 내용이다. 나머지 5개 조항은 무엇무엇을 해주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황제·태황제·황태자를 비롯한 황실, 그리고 전·현직 대신들은 그 직위에 맞는 대우와 세비 등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일제는 이 약속을 지켰다. 이들에게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지급하였다. 황실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신분보장과 대가를 받고, 500년이 넘는 나라를 일본에 넘긴 것이다.

해방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매년 8월29일이 되면 선언서를 발표하거나 기념식을 열었다. 국가의 치욕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다.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현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에서 제정하고 기념한 ‘3·1절’ ‘개천절’ ‘순국선열기념일’ 등은 모두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국치일은 기념하지 않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역사에서 책임과 반성이 사라졌다. 500년 넘는 나라가 망했지만, 책임진 사람이 없다. 그 원인도 모른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해서 눈을 감고 있으면,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더 이상 눈을 감지 말자. 과거에 눈을 감으면, 미래를 볼 수 없다.
[시론] 경술국치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 한시준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