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속히 새벽이 와서 밝은 날 오기를" 충남 보령 고대도에 상륙했던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 이야기

[한국기독역사여행]

"조선에 속히 새벽이 와서 밝은 날 오기를"

충남 보령 고대도에 상륙했던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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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25일 귀츨라프 한국 선교 184년을 기념해 고대도에 세운 조형물. 스페인 설치미술가 후안 갈레이사발의 작품 '칼 귀츨라프, 베를린 그리고 고대도'. 작가가 현장에 와서 설치했다.

 

1517년 10월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던 독일의 마르틴 이야기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었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복음과 무관한 조선에서 서구의 종교개혁과 같은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개혁적 인물 조광조가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도교적 부패기구 소격서를 혁파한 것이다. 

그로부터 315년 후. 충남 보령 앞 고대도 안항이라는 곳에 범선 한 척이 정박했다. 폭 46.5m, 깃대 높이 34.1m의 507t급 이양선 로드에머스트호였다. 이 배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국적 통상요구선이었다. 폭 9m 세곡선이 고작이었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섬 주민에겐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고대도는 여의도 3분의 1만한 넓이였다.  

그 통상선엔 특별한 인물이 타고 있었다. 루터의 후예이자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1803∼51)였다. 이 이방인은 이역만리 항해에도 한자성경과 한글자모음 책을 들고 온 것이다. 미스터리였다.

귀츨라프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복음을 전하려다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머스 선교사보다 34년,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 앞서 미지의 땅 조선에 내려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떠난 신비의 인물. ‘조선왕조실록 순조 편’과 ‘일성록’ 등에 등장하는 이 ‘푸른 눈’의 선교사는 ‘우월적 세계관의 방주’에서 내려 어떤 동선을 보였을까. 서양인에 의해 동양은 ‘야만’으로 타자화되던 시기였다.  

2017년 첫 주일 새벽 보령 대천연안여객터미널. 고대도 삽시도 원산도 등 근해 섬으로 떠나는 훼리호가 출발을 알렸다. 귀츨라프라는 역사 속 인물을 만난다는 설렘에 밤잠을 설친 채 기다렸던 승선이었다.

이날 고대도 안항 선착장으로 가는 뱃길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가는 비까지 내렸다. 다만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 하심에 그리 된 것 같았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비추자 섬과 섬, 섬과 뭍, 바다와 펄이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의 해안임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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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귀츨라프 선교사(1803∼51)

혁대 제조공원, 선교사돼 조선에 이르다 

1832년 7월 조선에 푸른 눈의 개신교인이 단 한 명이라도 체류했다는 기록은 없다. 귀츨라프가 유일했다. 

귀츨라프는 독일 북부 포메라니아의 한 경건주의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폴란드계 유대인 혼혈아로 어학 재능이 뛰어났다. 아버지는 마구상이었다. 네 살 때 어머니가 죽고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열네 살 때 혁대 제조공장 공원이 됐다. 

그 어려운 시기 개혁파 목사 아들이자 친구인 하이덴라이히가 그를 사역자로 이끄는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10대 후반 베를린의 루터교 야니케선교학교에 진학했고 이 학교에서 6개 국어를 습득했다. 그는 선교의 불모지 동남아를 놓고 기도했고 네덜란드선교회가 그를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 무렵 그는 20여년간 중국선교에 헌신하다 일시 귀국해 파리에 있던 모리슨 선교사를 만나 극동을 알게 됐다.  

1826년 루터교 목사가 된 귀츨라프는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태국 등에서 열정적으로 목회했다. 특히 동남아의 화교 선교에 관심을 갖고 한자를 익혀 중국어 능력을 키웠다. 태국 최초의 선교사였으며 태국어로 신구약을 번역해 태국 복음화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귀츨라프는 런던선교회에서 일하는 아내 뉴웰이 쌍둥이 딸을 낳다 아이 한 명과 같이 죽고, 남은 딸마저 몇 해 후 죽자 깊은 실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때 모리슨이 영국 동인도회사 통상교역지 탐사선에 동승하는 선교여행을 권했다. 그 탐사선이 로드에머스트호였다. 선장 린제이와 67명의 승무원은 1832년 2월 27일 중국 광저우를 출발해 산둥반도 웨이하이를 거쳐 7월 17일 ‘바실만 북쪽의 Chawang-shan이라는 섬’에 닻을 내렸다. 그들이 말하는 ‘Chawang-shan’은 황해도 장산곶이다.

귀츨라프는 탐사선의 선의(船醫)이자 통역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조선과 일본 백성의 구령과 해상 복음 루트 개발을 위한 미션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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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츨라프 선교사가 조선에 전한 한문성경 '신천성서'(왼쪽), 고대도 분교 교정의 닻 용도로 쓰인 남부지방 돌. 제주화강암 닻석도 남아 있어 고대도가 큰 항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산곶에 도착한 ‘문명’은 ‘야만’을 향해 자신들의 배가 탐사선이라고 했다. 야만은 군함으로 여겼다. 문명은 자신들이 상인이라고 했다. 야만은 무장한 군인임을 알았다. 문명은 야만에게 단추(영국 왕실 문양)를 선물로 주었다. 야만은 이를 거부하고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  

귀츨라프는 배위에서 이 문명 충돌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무장한 8명의 군인이 하선하자고 했을 때 내리지 않았다. 동양 사정에 밝은 그는 이미 조선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를 알고 있었다. 문명의 탐욕은 야만의 저항을 불렀다. 가톨릭 선교 정책의 공과를 알았던 귀츨라프는 자신 또한 문명으로 포장된 제국의 군대와 함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 문명충돌에 대한 조선의 기록. 순조실록 32년 8월 11일자(양력 9월 6일) 황해감사 김난순의 보고는 이러하다.

‘지난 6월 21일(양력 7월18일) 이양선 한 척이 장연의 조이진에 와 정박하자, 관내의 어부들이 생선과 서책을 바꾸고 그 진의 이교(하급관리) 역시 필찰로 문답한 적이 있었는데… 추후에 들은 즉 배의 제작과 인물 언어 복색 등이 홍주(고대도)에 정박한 영길리(영국) 배와 다름없었으나.’  

귀츨라프가 하선하지 않으므로 한자 통역조차 불가능한 제국의 배는 장산곶에서 이틀밖에 머물 수 없었다. 이들은 해도를 그려가며 남하했다. 

그때 귀츨라프의 신앙적 고민은 34년 후(1866)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토머스 선교사에게로 이어진다. 주연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자. 당시 토머스 역시 통역이었다. 그는 “조선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로 이 배에 탑승, 대동강가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 

한데 선주 프레스턴은 약속과 달리 평양부 신장포에 닻을 내리고 총질을 해댔다. 통상을 요구했으나 평양감사 박규수 등이 법으로 금하고 있다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프레스턴 군대는 조선인을 인질로 잡고 충돌, 20여명의 조선인 사상자를 냈다. 토머스 선교사가 프레스턴에게 따졌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평양 백성은 “이양선을 쳐부수자”고 일어나 모래톱에 걸린 제너럴셔먼호에 불을 지르고 토머스 선교사 등 전원을 몰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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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주민이 성서를 기쁘게 받았다” 

다시 1832년 7월. 로드에머스트호가 녹도, 볼모도를 거쳐 고대도에 닻을 내린 것은 25일이었다. 고대도는 한양으로 향하는 세곡선이 경유하는 천혜의 선착장을 가진 섬이었다. 

그들이 하급관리 ‘Le(이)’에게 조선을 방문한 목적이 국왕에게 통상을 정식으로 청원하는 서한과 함께 선물을 전하려는 것임을 밝혔다. 조선 관리들이 어느 정도 호의를 보이자 한문성경 신천성서(神天聖書)를 포함한 선물을 포장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고 적었다. 귀츨라프는 복음을 전한다는 감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린제이 선장은 성서 한 질과 내가 가지고 있는 전도문서 각 한 부씩을 포장하여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갑판 위에 찾아 온 사람들이 성서를 기쁘게 받는 것을 보고 아주 만족하였는데, 이제는 은둔국의 통치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유익을 얻기를 갈망하게 된 것이다. 국왕이라 하여도 죄 많은 인생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말씀보다 더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홍주 목사 이민회 등이 순조에게 올린 장계의 회신을 기다렸다. 이때 귀츨라프는 섬 주민에게 한글을 배워 한문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 그는 훗날 이때 익힌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유럽에 알렸다. 그는 또 섬 주민에게 감자재배법, 산머루 음료 제조법을 가르쳤다. 감기 환자를 위해 양약 치료와 처방도 했다.

섬 체류 20여일간 귀츨라프는 전도를 했고, 군인들은 영화 ‘지중해’처럼 주민과 어울렸다. 그러나 장계를 받은 조선 정부는 천주교와 같다고 보고 성경, 망원경 등 선물을 되돌려 보냈다. 이에 놀란 홍주 관리와 섬 주민들은 “우리가 죽게 생겼으니 제발 한글 번역 주기도문 등도 없애 달라”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통상 교섭과 복음 전파는 무산됐다. ‘황사영백서’ 사건 등의 후폭풍이 개신교 첫 선교사 귀츨라프의 복음 전파를 막은 셈이 됐다. 귀츨라프는 이렇게 적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로 자비로운 방문의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진리를 전파하도록 서둘러야겠다. 조선 국왕이 처음에는 거절하였던 성서를 지금 갖고 있는지 또한 읽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안항의 관리와 주민들은 성서를 받았다. 이 첫 전도는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다. 조선에 어두움이 가고 속히 새벽이 와서 밝은 날이 오기를 다 같이 바랄 뿐이다.’

■2017년 고대도 
“한국 최초 선교지서 신앙생활” 자부심… 귀츨라프 유적 없고 기념교회·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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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귀츨라프 선교사에 무심했다.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 독일과 영국 등에 선교보고서와 저술물이 있었음에도 1980년대가 돼서야 알려졌다. 고대도에 교회가 들어선 것도 1982년이다. 100여명 주민 가운데 20여명이 한국 첫 선교지 고대도교회(박원열 목사)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간다. 주민 감소 전 50여명이 출석하기도 했다. 

고대도엔 귀츨라프의 직접적 유적은 없다. 다만 기념교회와 조형물이 들어서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측과 칼 귀츨라프 학회를 이끌고 있는 오현기(대구 동일교회) 목사 등의 헌신으로 성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고대도를 떠나는 배에서 섬을 바라보았다. 예전 당제를 지내던 산꼭대기에서 십자가 불빛이 빛났다. 첫 교인 하옥희(97) 권사가 1990년 권사 취임을 기념해 세운 등대 겸한 십자가탑이었다. 조선의 새벽을 알리는 십자가다. 

■키워드 

·로버트 모리슨(1782∼1834) 선교사 

영국 출신. 런던선교회 소속 중국 개신교 첫 선교사.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 이것이 한글 성경에도 영향을 끼쳤다. 

·로버트 토머스(1839∼1866) 선교사 

영국 출신.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 1865년 무렵 조선 연안을 탐사. 이듬해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전했다. 

·홍주(洪州) 

조선 시대 지금의 충남 홍성 보령 서산 당진 청양 땅 전부 또는 일부를 관할한 행정 단위. 수장은 목사(牧使)라 칭했다.  

고대도(보령)=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