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조선을 사랑한 무교회주의자 – 김교신
'가나안 성도'라고 들어보셨나요?
신앙은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에 안 나가고 있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어보세요^^) 처음에는 우스갯소리로 시작된 단어였는데 지금 이들의 비중이 제법 커지면서 교계에서도 이들에 대해 다시 조명하면서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등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이 있으면서도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사실 진정한 교회를 갈망하지만, 현실의 교회 모습이 너무도 실망스럽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을 무턱대고 비난하려고 하기 보다는, 교회가 먼저 바로 서서 그들을 다시 초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나안 성도'도 일종의 '무교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무교회주의자하면 당장 떠오르는 김교신 선생님의 삶을 들여다 보는 것도 좋겠네요. 그분의 삶과 믿음을 보면, 그분의 신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게 됩니다. 옷깃을 여미게 되지요.
김교신은 1901년에 태어나 삼일 운동 직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20년에 길거리에서 외치는 마츠다라는 청년의 복음전도를 듣고 깊이 감동해서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가문대대로 지켜왔던 유교적 세계관을 버리고 개종한 것입니다. 보통 결심이 아니지요.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으며 교회는 그 이상향이라고 생각했던 그 때, 김교신은 권모술수에 의해 담임목사님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군요..ㅜㅜ) 이제 막 신앙에 눈을 뜬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지요. 교회를 떠난 그는 방황기를 거쳐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교육을 받게 됩니다. 아마 이 때 무교회주의사상이 정립되었겠지요.
김교신이 주창한 '무교회주의'는 성경에 기록된 교회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서양의 제도, 문화, 전통에 따라 만들어진 제도적인 교회를 부정하는 태도라고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특히, 일상과 분리된 종교생활로서의 교회, 세속화된 교회와 형식화된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김교신 자신도 무교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나에게 무교회주의란 진정한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단코 교회를 타파하며 대립 항쟁하는 일 같은 것을 사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 무교회주의의 사명이다. 기독교의 제1은 하나님과 사람의 화평을 도모하는 동시에 사람과 자기의 이웃 사람을 중히 여기는 교훈인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신교 교회가 교회주의에 타락하지 않았다면 무교회주의가 생길 필요가 없었다. 무교회주의는 일명 '전적 기독교'이다."
물론 그의 이런 태도는 기존 교단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그의 신앙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야했지요. 더구나 김교신은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기독교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국인 스스로 깨닫고 만든 기독교를 가지고 한국 민족이 겪는 역사적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공격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믿음을 말과 글로, 그리고 그의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1927년, 27세의 나이에 귀국한 그는 약 15년동안 교사의 길을 걷습니다. (과목은 지리였습니다.)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늘 이야기했고, 그들에게 참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척 엄격하면서도 눈물이 많은, 진실한 교사로 그를 기억하는 제자들이 많더군요. (시험문제지 위에 '쓸데없는 답을 쓰면 0점으로 처리한다'는 경고문을 써 놓았었다고 합니다.^^) 양정고등학교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는데, 우리가 잘아는 마라톤 손기정 선수도 그분의 제자였다고 하더군요. 무엇보다 그는 한국의 지리를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길러주려고 노력했던 선생이었습니다.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인들이 된 제자들도 많이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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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하면 역시 「성서조선」을 빼놓을 수 없지요. 그의 분신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고, 그가 평생 자신의 온 힘을 다 기울인 일이니까요. 「성서조선」은 우찌무라 간조 아래에서 기독교를 배운 6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1927년에 창간한 잡지였습니다.
'성서'와 '조선'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두 가지였습니다. 창간사에서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고의 선물은 성서 한 권 뿐이니 그 둘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하여 정해진 것이 바로 그 이름이다"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지요. 「성서조선」의 정신을 '성서를 조선에게, 조선을 성서 위에'라고 정리하기도 했더군요. 이 「성서조선」을 통해 선생은 기독교 복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을 내세워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을 폅니다.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창씨개명을 실시했으며, '황국신민서사'라고 하는 천황에 대한 충성의 말을 복창하게 했지요. 지금 우리가 분노하고 있는 위안부(사실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성노예가 맞지요)동원과 강제 징용도 자행되었습니다. 당연히 「성서조선」도 탄압을 받아 정간과 휴간을 반복하며 위기를 이어갑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조와(弔蛙)사건'이 일어나지요.
'조와(弔蛙)'는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이라는 뜻인데요, 1942년 3월 1일에 발행되었던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의 글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는 내용입니다. 한번 볼까요. (내용을 요약해 볼께요)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연못 위에 있는 널찍한 바위이다. 이 바위 위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있노라면 개구리들이 7,8마리가 기어나온다… 늦은 가을이 지나서 두꺼운 얼음이 얼어 연못이 보이지 않게 된 후로는 개구리들이 보이지 않았다… 봄이 오자, 바위 속의 얼음도 풀리는 날이 왔다. 개구리 친구들을 찾으러 연못 밑바닥을 보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연못 끝에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짐작해 보면 지난 겨울의 매서운 추위에 이런 슬픈 일이 생긴 모양이다… 얼어 죽은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땅에 묻어 주고 보니 연못 밑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에 대한 단순한 감상 같은 이 글이 실은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민족이 어떤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 남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일제도 알아보았습니다. 결국 김교신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성서조선」의 정기구독자 300여명까지 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게 되지요. 그 때 일본인 경찰들이 했던 질문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천황 폐하가 더 높으냐? 예수 그리스도가 더 높으냐?" "하나님이 천황 폐하도 만들었냐?"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김교신은 1년 동안 이런 말도 안되는 취조를 받으며 옥에서 고생하다가 결국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납니다. 당연히 잡지는 폐간되었구요.
이후 그는 고향인 함흥 근처에 있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취직해서 계속해서 낮은 자들과 함께 합니다.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해 애쓰고, 역사 의식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지요.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는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제자들에게 흥남으로 모이라고 연락을 하기도 합니다. (해방 이후를 준비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다가 아뿔싸, 김교신은 공장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에 걸린 노동자들을 치료하고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가 자신이 그 병에 걸려서 일주일만에 유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라 제대로 유언조차 하지 못한 죽음이었지요. 1945년 4월 25일, 그렇게 염원하던 조선의 해방을 겨우 4개월 앞둔 때였습니다.ㅜㅜ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너무도 연약한 개인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며, 피차 가르치며, 서로 섬기며 함께 자라가는 것이지요. 교회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며, 성숙해지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실천할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교회는 이런 모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교회가 제도나 건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용보다 형식이, 의미보다 절차가, 사람보다 의식, 삶보다 제도가 중요해지는 일이 종종 생기게 되었구요. 그래서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슬픈 이야기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교회주의는, 그리고 가나안성도는 그런 현상에 저항하고 본질을 찾으려는 모습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삶과 종교생활의 이원화를 극복하고, 신앙의 세속화를 경계하며 오히려 참 교회를 소망하는 절실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모이기에 힘쓰며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리를 사용하소서!"
장영기 목사 / 함께걷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