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은인 – 허드슨 테일러
복음서진론(福音西進論)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복음이 서쪽으로 계속 전파된다는 이론이지요. 여기에 복음이 계속 전진해서 지구를 한바퀴 돌아 이스라엘이 주님께 돌아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이야기가 결합되기도 합니다. 'Back to Jerusalem'운동이 이런 사상이지요. 사실 생각해보면 복음이 중동에서 유럽, 유럽에서 미국, 미국에서 아시아로 왔으니 틀린말은 아니지요? 물론 주님 재림시기에 대한 것은 좀 over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복음이 서쪽으로 계속 가기 위해서는 복음이 중국을 거쳐서 이슬람을 뚫고 가야만 합니다. 중국인 선교사들이 그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지요. 사실 중국이 워낙 어마어마한 인구를 가지고 있다보니, 복음화율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있고, 그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도 이제 꽤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중국이 복음화되는데는 수많은 선교단체들과 선교사들의 수고가 있었지만, 오늘 소개하는 허드슨 테일러 (James Hudson Taylor)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라는데는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선교학적으로도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고수한 탁월한 전략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구요.
허드슨 테일러는 1856년 생입니다. 부모님도 모두 신실한 크리스천이어서 아예 잉태되었을 때 부터 중국 선교사로 키우겠다고 기도하신 분들이라고 하더군요. (기도가 아주 제대로 응답받은 셈입니다!)
그런 집안의 영향과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결국 중국에 가기로 결심한 허드슨 테일러는 한편으로는 의료선교를 위해 의학을 공부하고 한편으로는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국어를 아주 무식한 방법으로 공부했더군요. 선생님도 교재도 없고 단지 누가복음 중국어 성경만 한 권 가지고 있었는데요, 영어 성경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한자를 익히고 그 한자가 또 다른 경우에는 어떻게 쓰였는지를 모두 찾아서 용례를 익혔다고 합니다. 그 복잡한 한자를 말이지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준비하고 또 준비해서 1853년, 21세의 나이로 중국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미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사역하지요.
당시 중국은 청나라 말기로, 태평천국의 난이 매우 고조되고 있던 혼란기였습니다. 또한 망해가는 청나라를 서구 열강들이 달려들어 뜯어먹고 있던 시기였지요. 그 유명한 아편전쟁이 1840년에 발발했습니다. (이것참, 옛날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사건들이 마구 등장하는군요!)
그런데, 태평천국의 난이 기독교와 관련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위의 사진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인데요, 책을 통해 기독교를 접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둘째 아들이라고 칭하며 난을 일으킵니다. (첫째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주요도시 중 하나인 남경을 점령할 정도였으니까 엄청난 영향이었지요. 결국 내분으로 망하긴 합니다만. (이건 역사의 공식인 것 같아요)
이런 상황은 중국 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서구가 함포를 앞세워 청나라와 조약을 맺으면서 보통 선교의 자유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그에 따라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더욱 악화되는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서구 열강의 앞잡이로 인식되거나 아이들을 잡아 먹는 서양귀신으로 몰려서 테러의 표적이 되는 경우도 많았지요. 허드슨 테일러와 동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구요.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는 한 가지 결심으로 인해 동료 선교사들에게 비난을 받게 됩니다. 바로 변발과 중국식 복장이었지요.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중국인들의 국제화가 아니라 중국인들의 복음화'라고 주장하면서 "죄가 아니라면 모든 면에서 중국인이 되라. 그렇게 함으로써 몇명의 영혼을 구원하라"고 외칩니다.
지금 보면 너무도 당연한 생각이지만 당시 그의 이런 방식은 너무도 혁명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옷이야 그렇다치더라도 헤어스타일까지 변발을 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처음에 변발을 하면서 머리를 암모니아로 스스로 염색하다가 부상을 입기도 했지요.
다른 선교사들은 그의 이런 모습에 경악을 했습니다. 어떤 선교사는 "그는 원주민과 같이 되어 버렸다. 체면을 버렸다. 그를 반역자라고 부르는 것도 지나치지 않다."고 까지 비난했답니다. 물론 허드슨 테일러는 꿈쩍도 하지 않았구요.
당시 중국 선교 활동은 거의 해안지대의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서양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거부감이 적기도 했고, 위험도 거의 없었으니까요. 본국과의 소통도 편리했구요.
하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을 제대로 복음화하려면 내륙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안지역은 그래도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위험한 내륙에는 선교사들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아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채 신음하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그는 1865년 아예 중국 내륙만을 선교하는 단체인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CIM)'을 설립합니다. CIM의 정책 중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뭔지 아시겠습니까? 예, 중국식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변발까지 강요하지는 않았더군요.^^)
중국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날 때도, 내륙 깊은 곳에서 사역하고 있던 CIM소속 선교사들은 거의 중국을 떠나지 않고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1964년, 창립 100주년을 맞이해서 선교의 범위를 아시아전체로 확장하기도 결정하고 이름도 '해외 선교회(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로 바꾸었습니다. 한국에도 지부가 활동하고 있구요.
사실, 허드슨 테일러에 대한 세간의 칭송은 그의 이런 활동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어린아이 같은 신뢰와 순종, 그리고 그의 모습 자체에서 풍겨나오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인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뢰는 절대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공급이 부족한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런 신념에 따라 CIM선교회는 모금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대는 선교사의 필수 자질 중 하나가 모금능력입니다. 적절한 후원자를 찾고 안정적으로 후원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래야 체계적인 사역이 가능하니까요.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는 그런 일반 상식을 믿음으로 뛰어 넘었던 것입니다. (아, 이에 비하면 저의 믿음은 왜 이렇게 작은 것일까요..ㅜㅜ)
허드슨 테일러의 이런 믿음은 사실 중국으로 가기 전에 형성된 것입니다. 중국 선교를 준비하며 일을 하던 어느날 '오직 기도로 하나님을 통해 사람을 움직이자'고 결심한 그는 스스로 첫번째 테스트를 실시합니다. 그 때 그는 3개월에 한 번씩 월급을 받았는데요, 건망증이 심한 사장이 날짜를 잊어버리고 봉급을 주지 않더라도 그에게 직접 말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월급날이 며칠 지나 내일 점심까지만 먹고 나면 굶게 된 어느날 저녁, 허드슨 테일러를 급하게 찾아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가난해서 병원에 갈 수 없었던 사람이 약국 조수였던 그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 것이지요. 그를 따라가 보니 그 집은 자신이 전에 전도하러 갔을 때 매몰차게 쫓겨났던 집이었습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간단한 진료와 기도를 해주는 그의 마음에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의 주머니에는 반크라운짜리 동전이 한개 있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ㅜㅜ) 이것마저 주고나면 당장 내일 점심부터 굶을 지경이었지요. 허드슨 테일러는 기도합니다. '아, 주님 이게 반크라운 동전 한개가 아니라 1실링 짜리 동전 두개였다면 1실링을 주고 나올 수 있겠는데요…'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지요? 구세군 냄비 앞에서 지갑을 꺼냈는데 천원짜리가 없고 만원짜리만 있는 그런 상황인 셈이지요.
그러다가 '이 위선자! 그러면서도 네가 선교를 가겠다고 한단 말이냐?'라는 내면의 음성을 듣고는 결국 동전을 꺼내어 그에게 주고 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우리의 예상대로) 갑자기 사장이 묻습니다. "참, 내가 월급을 줬던가?"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니요, 사장님 주지 않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런!, "아이고 어쩌지? 그런줄도 모르고 아까 돈을 다 입금했는데. 월요일이나 되어야 월급을 줄 수 있겠는걸." 낙심한 허드슨 테일러가 정리하고 퇴근하려 하는데, 사장이 기쁜 얼굴로 그를 다시 불렀습니다. "자네, 이 돈을 받게. 이상하게도 어떤 고객이 굳이 오늘 외상값을 내겠다면서 다녀갔어. 그것도 현금을 들고와서 말이야." 아, 허드슨 테일러가 얼마나 감격했을지 상상이 되시지요? (다시 한번 할렐루야!)
이런 경험이 그로 하여금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가지게 했습니다. "이제 중국에 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지요. 그 후 평생동안 하나님께서는 그의 필요에 매번 신실하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허드슨 테일러의 방식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또한 핑계일까요..) 당시 허드슨 테일러도 모든 선교단체들이 이런 방식으로 모금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믿음대로 행하라고 권했지요. (휴.. 다행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를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설교를 하고, 중국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등 평생을 헌신하다가 1905년, 73세에 자신이 사랑했던 중국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훨씬 전에 주님께 먼저 보낸 아들과 딸,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지요.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의 은인'이라고 부르며 존경했습니다. 심지어 중국 <인민일보>에서 중국의 근대화에 공헌한 외국 사람으로 허드슨 테일러를 선정하고 그의 전기를 발간하기까지 했다더군요. 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결같은 헌신이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허드슨 테일러에 대한 전기는 하나같이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장 열심히 일한 사람이기도 했구요.
그 중,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이 글의 마지막으로 적당한 것 같아 골랐습니다.
"선기도 후상식,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아이 같은 신뢰"
장영기 목사( 함께걷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