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간디 – 고당 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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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간디 – 고당 조만식

국정농단과 탄핵절차, 촛불과 태극기가 교차하는 시대에서 차기 대선주자들의 각종 주장들을 보고 있노라니 더더욱 과거의 큰 인물들이 그리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기독교인이면서 민족의 지도자로 좌우익 할 것 없이 존경을 받았던 고당 조만식 선생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조만식 선생님은 1883년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는 머리는 좋았지만 싸움꾼이었고 커서는 술을 좋아하는 난봉꾼이었다고 하더군요. (보통 큰 인물들의 과거는 이렇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그가 변한 계기는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이었습니다.

   일단 피난길에서 친구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나라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숭실학교에 들어가서 신학문을 공부하기로 했지요.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던 날 저녁에 술친구들을 불러놓고 마지막 술파티를 벌인 후에 다음날 술에 취한 채 비틀비틀 숭실중학교에 찾아가서는 입학을 신청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교장 배위량(원래 이름은 Baird입니다) 선교사가 "공부는 무엇하려고 하나?"고 묻자 고당은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술김에 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지요^^ 아래 사진은 배위량 선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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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실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특히 배위량 선교사로부터 사회봉사와 민족구원의 신앙을 전수받게 된 고당은 졸업후 동경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을 시작하는데요, 특히 눈여겨볼것은 연합운동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교회의 연합을 위해 노력합니다. 당시 동경에는 40여명의 장로교인들이 YMCA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요, 점차 감리교인들이 늘어나면서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에휴, 굳이 예배를 따로 드릴 필요까지 있었는지..) 고당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같은 민족이 이국땅에서까지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재일 조선인교회를 설립해서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합니다.   

  

   또한 지방별로 따로 놀던 유학생 사회를 통합하는데도 노력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호남 출신인 고하 송진우나 인촌 김성수와 함께 여러 유학생 단체를 조선유학생친목회로 통합합니다. 고당이 늘 했던 말이 "고향을 묻지 맙시다"였다고 합니다.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또 지방별로 나뉘는 것이 너무 가슴아팠던 것이지요. 나중에 해방 이후에도 사분오열된 나라를 보면서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아, 지금도 대한민국을 보면 가슴아파하겠지요ㅜㅜ)

 

   그리고 고향으로 귀국한 고당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평양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과 조국을 위해서 일하려면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신념 아래 학생들을 엄격히 가르쳤고,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기거하면서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운동장의 눈을 다 쓸고,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구두 대신 누가 버린 벨트를 주워서 꿰매어 '편리화'라고 이름붙이고는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학생들이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말과 행동이, 신앙과 삶이 일치되어 있는 최고의 스승이었지요.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도 모든 학생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했다니, 진정한 리더십이란 그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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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당의 특징 중 하나는 거의 전 생애를 평안도에서 지냈다는 것입니다. 당시 조금 알려진다 싶으면 다들 서울로 가서 활동하곤 했는데 (사실 지금도 그렇지요) 고당은 1년 정도 서울에서 조선일보사장을 한 것 외에는 평양에서 활동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자치, 풀뿌리운동에 힘쓴 것이지요. 그런 그를 위대한 민족지도자, 요즘 말로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준 것이 바로 물산장려운동이었습니다.

 

   물산장려운동이란 한마디로 "우리것을 사용하자!"는 운동입니다. 70년대에 한창 유행했던 "국산품을 애용합시다"와 같은 맥락이지요. 좀 유식한 말로 민간차원의 보호무역운동, 또는 시민경제주권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좀 유식한게 아니라 정말 유식한 말이군요^^) 사실 요즘 트럼프가 '미국 물건을 사라'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고당 선생님께 너무 실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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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에서 시작한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전국으로 퍼져가면서 전국적으로 무명 두루마기와 무명 천으로 된 모자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호응해서 목회자들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설교를 했구요. 심지어는 기생들도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니 전국적인 호응이 어느 정도인지 아시겠지요? 고당은 자신의 딸이 결혼할 때도 물산장려운동의 취지를 살리자며 면사포를 쓰지 않고 하얀 모시적삼과 모시저고리를 입도록 했다고 하네요. 주례를 부탁받으면 내거는 조건도 '한복을 입고 결혼식을 할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조선물산장려운동이란 범민족적인 애국 운동이며 민족 자각운동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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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일제가 이런 걸 모르겠습니까? 결국 물산장려회는 해산되었지요. 이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도 고당은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민족적인 관점에서도, 기독교인의 양심으로도 신사참배는 할 수 없었으니까요. 사실 고당은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였습니다! 정말 그 목사님에 그 장로님이네요^^ (아래 사진에서 제일 앞줄 제일 왼쪽이 고당 선생님이고 왼쪽에서 네 번째가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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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주둔하고 좌우익의 대립이 극에 달할 때 소련군과 공산당은 북한에 있는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고당을 회유하려고 매우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고당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면서 이념을 넘어선 민족국가수립을 주장했지요. 결국 공산당의 눈밖에 나게 되고, 고려호텔에 감금당하고 맙니다. 남한으로 모셔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고당은 "내가 어떻게 북한 민중을 버리고 나만 살자고 서울로 가겠느냐?" 며 남아있었습니다. 오히려 부인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이 든 봉투를 건네며 죽음을 준비했지요.

 

   그리고 1947년 이후로 그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50년 10월에 연합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한 것으로 보는 의견이 정설입니다. 그리고 1991년에는 부인 전선애여사가 45년 동안 간직해 온 그 머리카락을 국립묘지에 안장했습니다.

 

   고당을 조선의 간디라고 부르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두 사람 모두 상인 계급에서 태어나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둘째,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철저한 비폭력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입니다. 고당은 평소에도 산상수훈을 가장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간디도 비록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산상수훈은 좋아했다고 합니다.

   셋째, 두 사람 모두 강인한 정신력과 검소한 삶으로 민중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넷째, 두 사람 모두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 모두 종교나 이념을 넘어서 민족이 화합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고보니 고당도 이념의 희생자가 되었고, 간디도 종교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도 비슷하네요. 외세의 압제보다 내부의 분열이 항상 더욱 비극적인것 같습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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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보니 두 분의 외모도 비슷한데요!^^

  

   지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종교를 넘어서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지도자가 누가 있을까요? 흠.. 별로 없는 것 같네요. (하긴 골고루 존경받는 지도자 자체가 거의 없네요.ㅜㅜ)

   바른 신앙은 사적 영역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개인적 죄사함과 구원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고 공의와 사랑, 평화와 조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게 되지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나라 아니겠습니까!

   대표적인 인물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개인 구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대를 바라보며 민족의 죄악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지요. 고당도 그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미래를 일구려고 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 지금 우리 시대는 그와 같은 지도자를 다시 갈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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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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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걷는교회  장영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