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정치로 구현하다 – 윌리엄 윌버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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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정치로 구현하다 – 윌리엄 윌버포스

 

  '고지론(高地論)'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제가 침례신학대학원에 들어갈 때 논술 문제이기도 했는데요, 말 그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90년대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가 있었던 주제였지요. 이렇게 소박한 구호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공부해서 남 주자!" 멋있죠? 

   그런데, 곧 이어서 그에 대한 반론이 일어났지요. 그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지론을 핑계로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앗! 뜨끔) 고지론이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의 모습은 교회 내에 세속적인 성공주의를 조장하고,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풍토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들이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미답지론(未踏地論)'이었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라는 것이었지요. 

   제 생각은 어떠냐구요? 저는 미답지론을 지지합니다. 영향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있는 그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는 것까지가 본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성실하게 공부하거나 일해서 그에 걸맞은 위치를 정당하게 획득하는 것은 선한 일이지요. 그렇게 높은 위치에 올라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참 좋은 일이구요. 그런데, 그러기는 참 쉽지 않거든요.(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만..) 위로 올라갈수록 우리의 시야는 위를 향하게 되고, 낮은자들과 함께 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테니까요. 작정하고 부패하지는 않을 수는 있겠지만,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참 어렵지 않습니까? 사실, 고지론을 전적으로 따르자면 예수님도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왕자로 오시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물론 높은 자리에 올라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도 적지 않지요. 그 대표적인 경우가 오늘 소개하는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입니다. 정치가의 자리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잘 사용해서 영국 사회를 개선하는데 큰 공을 세웠거든요. 고지론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단골 예화이기도 합니다. 사실 다들 이렇게만 된다면 고지론을 두손 들어 환영할 수도 있겠습니다!

   윌버포스의 삶을 보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18세기, 영국은 청교도 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군림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국가가 부강해지면 그 열매가 골고루 돌아가기 보다는 양극화로 나타난다는 것을 자주 보여줍니다. 당시 영국도 마찬가지여서 부가 소수의 대지주에게 독점되고 빈부격차는 극심해지지요.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도시로 흘러들어서 빈민층을 구성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당연하게도라고 해야 할까요..) 성직자들도 특권층이 되어 하층민들의 고통에 무심합니다. 그 와중에 사회는 향락으로 물들게 되지요. 겉으로는 부강해지고 있었지만, 복지나 도덕적인 수준에서는 영국은 큰 혼란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영국은 당시 세계 최대의 노예 무역국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유럽에 팔리는 노예의 절반 정도가 영국배로 이동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지요. 한 통계에 따르면 1776년까지 영국이 팔아 넘긴 노예의 수가 약 300만명이라고 하더군요. 당시의 영국의 항구들은 노예 무역으로 인해 먹고 살고 있었고, 수천명의 선원들이나 농장주들에게는 노예 무역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국가 수입의 1/3정도까지 노예 무역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휴..  

   하지만 모두가 아시다시피 이러한 노예 무역은 정말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습니다. 흑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사냥되어서 각국에 팔렸고, 옮겨지는 배 안에서 짐승처럼 갇혀서, 그리고 팔려간 현장에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심한 노동, 혹독한 학대, 굶주림 등으로 죽어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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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윌버포스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큰 고생없이 무난하게 잘먹고 잘살고 잘놀면서 대학까지 마치게 되지요. 원래 말을 잘했던 그는 졸업 무렵에 정치가의 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말을 잘하면 정치가가 될 수 있군요 ㅋㅋ) 그리고 재력과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1780년에는 21세의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지요. 그리고 탄탄하게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여전히 잘먹고 잘놀고 잘살면서 말이지요.

   그러다가 1784년, 자신의 스승이자 선배인 아이작 밀너와 함께 여행을 하며 토론하다가 '참된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에 있어서 종교의 성장과 진보]라는 책을 읽고는 '회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탕했던 삶을 청산하지요. 상류 클럽에서 탈퇴하고 매일 아침 말씀을 묵상하고 일기를 쓰면서 경건한 삶을 이루어가기 시작합니다. 원래는 아예 정치를 그만두고 성직자가 될 생각을 했지만, 주변에서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말렸다고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어메이징 그레이스(한국 찬송가에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으로 실렸지요)'의 작사자로 유명한, 노예 상인이었다가 회심해서 성직자가 된 존 뉴턴이지요. (그래서 윌버포스의 삶을 그린 영화의 제목이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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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턴은 정치가로 남을 것인가 성직자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며 찾아온 윌버포스에게 '주님께서는 자네를 주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의 유익을 위해서 길러 주셨네'라고 이야기합니다. 굳이 성직자가 되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서 주를 위해 일하라는 의미였지요. 그리고 윌버포스는 정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1786년, 이미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던 그룹의 요청으로 그 일에 뛰어들게 되지요. 1787년 10월 28일 일기에는 이렇게 적어 놓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앞에 노예무역의 금지와 풍속의 개혁이라는 두 가지 큰 목표를 놓으셨다."

 

   윌버포스와 그의 친구들 (그들은 나중에 '클래펌 파(派)'라고 불리게 됩니다. 클래펌이라는 마을에 모여 살았거든요.) 은 완전한 노예제도 폐지에 앞서서 노예 무역폐지를 주장하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아무래도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현실적이니까요. 정치가다운 전략이었지요. 사실 이것만으로도 큰 반대가 있었지만요.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예 무역으로 이득을 보고 있었겠습니까? 어떤 분은 당시 영국에서 노예 무역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자동차 산업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시더군요. 

   1789년 5월 21일, 윌버포스는 하원에서 노예 무역 폐지를 주장합니다. 그는 두가지 접근법을 함께 사용합니다. 일단 노예 무역은 도덕적으로 범죄라는 것을 강조하지요.

   "저는 아무도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 끔찍한 노예 무역이 의회의 권위 아래서 시행되도록 방치했다는 점에 대해서 영국의 전 의회와 더불어 저 자신을 참으로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는 유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우리 자신들만 무죄를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노예의 추가 수입을 중단하면 노예주들은 노예를 아껴 줄 것이고, 그러면 노예들이 더 열심히 일해서 생산성이 올라갈 것이라면서 회유책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뭐, 잘 먹히지는 않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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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그 법안은 부결되었지요. (뭐, 그들도 한번에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첫 걸음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들은 더욱 열심히 증거를 모으고 여론을 움직이고 동료 의원들을 설득하면서 노예 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리고 1807년 2월 23일, 12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법안이 통과됩니다. 무려 18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였지요.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노예제도의 폐지였으니까요. 1823년에 그들은 다시 노예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위한 모임을 결성하고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제 본색을 드러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원래부터 약했던 윌버포스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져 있었고, 그는 정계를 은퇴하게 되지요. 그래도 그는 뒤에서 동지들을 돕는 일에 계속 열심이었고 결국 1833년 7월 26일, 영국의 모든 노예를 1년 내에 해방한다는 노예제 폐지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게 됩니다. 윌버포스가 일기장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적은 지 46년이 지난 시점이었지요. 윌버포스는 이 소식을 병상에서 들었고, 사흘 후 눈을 감았습니다. 아마 그는 행복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지 않았을까요?

 

   윌버포스는 노예제도 폐지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복권제도를 폐지시키고, 빈곤층을 위한 무상병원을 세웠으며 야만적인 형벌제도를 개혁했고 어린이의 노동도 보호했지요. 또한 제도 뿐 아니라 풍습개혁에도 힘을 써서 남자들의 결투 제도를 폐지하는데 노력했고, 복음전파에도 힘을 썼습니다. 그로 인해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지요. 젊은 의원들 중 상당수가 그의 영향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윌버포스는 신앙과 삶이 분리될 수 없다고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당시의 영국은 이름만 기독교 국가였을 뿐이었지요. 1797년에는 이런 생각을 담아서 [참된 기독교](원제는 “참된 기독교에 비추어 본, 이 나라 중상류층의 자칭 기독교도들에게서 유행하는 종교체계에 대한 실천적 견해”라는 장황한 제목입니다. )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그는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거나 머리로만 믿고 마음으로 믿지 않는 태도, 그리고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불행한 처지의 사람들을 외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사실상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에게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야기네요. 과연 그가 보기에 우리는 참된 기독교인일까요..

 

   윌버포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과 더불어 하나 더 생각할 것은 '동료들의 힘'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윌버포스는 '클래펌 파(派)' 와 함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정치인인 클랙슨, 그랜빌 샤프, 작가인 모어, 성직자 존 벤, 은행가 헨리 손턴 등이 모여 살면서 함께 신앙으로 교제하며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고 국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끊임 없이 토론하면서 서로 격려했지요. 아마 그들의 도움과 격려가 없었다면 제 아무리 윌버포스라 해도 46년이나 되는 시간을 견뎌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삼겹줄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들도 어떤 사명을 꾸준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좋은 믿음의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아니, 사실 사명을 감당하는 것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냥 이 세상에서 각자의 믿음을 지키는 데도 그런 친구들이 필요하지요.

 

   우리 나라에도 사회 지도층의 자리에 기독교인들이 이미 많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지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계셔서 그런걸까요..) 오히려 비리 정치인의 명단에서 기독교인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구요ㅜㅜ (그래서 고지론을 신뢰하기 어렵다니까요..) 

   우리의 믿음은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주일 따로 평일 따로의 '따로국밥신앙'에서 벗어나야 하지요. 더러운 세상을 피해 떠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구요. 각자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한줄기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높은지 낮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느냐가 중요하지요.

 

   사실 윌버포스같은 지도자가 너무 필요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편협한 태도를 보이거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현장에서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지혜롭게 법과 제도를 보완하는 지도자가 말입니다. 아,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저도 의견을 바꾸어 고지론을 지지할 마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profile

장영기 목사 (한국의 함께걷는 교회를 담임하는 침례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