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1>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자유 언론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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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현 박사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온누리교회 사역장로몽골국제대학교  총장겸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그리고 그의이름앞에는 수많은 단체 장의 직함이 붙지만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직함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몽골 선교사다.

 

<역경의 열매 1>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자유 언론 실천

“경희대 원우현 교수 외 12인은~”으로 시작되는 긴급 뉴스가 당시 청취율 최고를 자랑하던 동아방송을 통해 뉴스 시간마다 톱뉴스로 전파를 탔다. 1973년 동아일보 사회면 톱에도 ‘자유언론 동아일보지지’ 헤드라인이 큼직하게 실렸다.

“언론의 자유가 없이 진정한 학문의 자유가 없다고 믿는 우리 신문방송학과교수들은 자유언론을 실천하는 동아와 뜻을 같이 한다.”는 광고 문구를 경희대,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한양대 순서(가나다 순) 12명 교수님들의 직함과 성명을 밝히고 국내외에 천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 당시 오글 목사 가족이 출국 당하고 경찰이 갑호 비상을 내리고 사회적 긴장감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철통같이 신문 광고를 막아대는 경제적 통제 방법으로 언론을 탄압하는 현장에서 분연히 맞서 언론의 자유를 학자들이 천명한 사건이었다.

 

필자는 정의를 실천하는 선배학자들과 함께하여 동참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1973 9월 경희대 정경대 조교수로 부임하여 서른을 갓 넘은 풋내기 교수의 행동으로서는 너무나 의외여서, 주위를 놀라게 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 당시 언론법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던 언론학자로서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고 핵심적 가치다.”라는 기초적인 명제에 언제나 익숙해 있었다. 유학 중 언론법에 관심을 둔 언론학도로서, 보스턴 대학 언론학 풍토와 강 건너 하버드 법대생들의 법치주의가 나도 몰래 나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사회지도자들이 좌우 이념과 정파적인 투쟁의 일환으로 대정부 투쟁을 하던 분위기와는 달리 나는 어찌 보면 미국 유학중 터득한 합리적 사고와 민주시민의 정신을 젊은 학자로서 실천한 결과일 뿐이다.

12인 공동 선언 후에도 아내 이방숙 교수가 동아일보 콩쿠르 입상자로서 동아콩쿠르 성악부문 테너 이인범 상금을 기증한 연세대 음대 교수라는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흔쾌히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방숙과 원우현’ 부부이름으로 제2차 광고를 했다. 대부분 광고인이 익명으로 광고하던 때였다. 흥미롭게도 서울법대 선배이신 서울대 정치학과 최명 교수님도 “나도 따라 갑니다.”라는 의미로 광고를 내면서 이목을 끌면서 부분적인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

그 후 어느 날 침구가 구비되어 즐겨 밤잠도 자던 나의 경희대 교수 연구실에 개인적으로는 가깝지 않은 경희대 김성식 명예교수님이 찾아오셨다. 저명한 서양사학자이시고 그 당시 동아일보 칼럼에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와 국민을 일깨우시던 애국지사이셨다.

“나 김성식인데요. 생긴 걸보니 얌전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냥 걱정이 돼서 한번 찾아왔지요.”라고 하시며 한참 나이에 연구에만 몰두하고 자신의 신상도 관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친구처럼 한 마디를 던지시고 금방 떠나시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어느 날 김성식 교수님 부고를 보고 주소를 찾아서 명륜동 빈소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문상을 했다. 때 마침 상주 노릇을 하는 사위인 경복고 동창 J 회계사를 만났다. 서로 반기면서 고인이 주신 사랑의 충고를 얘기를 나눈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4)

 

<역경의 열매 2>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코 수술 후 50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부를 때는 반듯하고 중심이 잡힌 심성을 갖춘 집안사람들을 칭한다. 그 중 코뼈는 얼굴의 바로 중심에 자리 잡아서 사람마다 줏대가 확실한 남성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다.

 

50년 전 어느 날 나는 코뼈가 굽었다는 진단 소견을 들었다. 그러면 숨을 드리고 내쉬는데도 불편하고 비염 증상으로 답답하고 염증이 자주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그 후 차일피일 킁킁대기도 하고 그럭저럭 임시방편으로 넘어가던 중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마쳤다는 동창을 우연히 만났다. 전문의로 마치고 초롱초롱하고 기만한 그 친구를 보곤 내가 코뼈 문제를 먼저 꺼냈다.

그동안 코뼈를 건드린다는 것이 섬뜩한 느낌이라 잊고 지내고 싶었다. 미신처럼 내 뼈의 완고증으로 인해 뼈대 있는 우리 집안에 누가 되지 말자는 심정으로 즉시 코뼈를 바로세우는 수술을 그 친구에게 맡기기로 했다. 나는 고려대 재직 중이었는데 그 친구가 근무하는 미아리 S병원이 멀지 않아서 편리했다.

수술실에서 준비하고 집도하기 전 그 친구는 아주 간단 수술이니 몇 분 만 잘 참으면 된다고 했다. 금방 집도를 마치고 “자, 다 끝났다.”며 빙긋이 웃으며 하루만 입원하라고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누구를 만나든지 뼈대 있는 집안 내력을 내세울 때마다 코뼈를 들이대면서 감쪽같이 몇 분 만에 코뼈를 교정한 날쌘 돌이 Y원장 자랑을 거르질 않았다.

그런데 보청기를 달려는 이웃을 동행했다가 무심코 내 코를 검진해 보았는데 의사의 반응이 충격적이었다. 내 코를 들여다보고는 코뼈 수술이 크게 잘못되었다며 의료사고 수준의 실수였다고 했다. “이것 보세요. 빈 공간에 들락날락할 정도로 구멍이 아물어서 자리 잡혔어요.

 

“강남 이비인후과지요? 어제 보청기 진단하는 이웃을 따라 갔다가 이비인후과 진료 받은 방문 환자입니다. 연고 처방을 받고 귀가해서 연고를 열어보니 오큐프록스라는 안연고였습니다.

50년이 지났으니 어떻겠습니까? 연고나 불편하실 때 바르시고 참고 지내세요.

“그런데 원장님, 코에 바르는 연고를 주셔야지 눈에 바르는 안연고를 처방하셨습니까? 무언가 착각 있으셨는지 의아해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여자 의사가 전화로 가장 부드러운 게 안연고라서 코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오큐프록스를 코에도 종종 쓴다고 했다. 그간 나는 최고의 코 수술 전문가인 내 동창이 코뼈를 7분 만에 후다닥 나도 모르게 해치웠다고 홍보를 해왔다. 손재주가 뛰어난 고교 동창이 50여 년 전에 한 수술이라 코 얘기가 나오면 나의 콧대를 내세우며 자랑하듯 막힌 코 뚫기 무용담을 서슴지 않았던 나에겐 청천 벽력같은 괴담 수준의 파열음이었다.

그 원장이 그 수술을 어디서 했으며 의대를 어디서 나왔는지까지 스치며 물어 보는 건 수준을 내려 보는 듯한 낌새였다. 수술이 의료 사고 수준의 실패이든 완벽한 시술의 표본이든 이제 다시 따지고 들추어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그 코수술 전문가인 동창에게 전화를 걸고 점심을 초대하고 마나자고 했다. 상처한 후 68세 후속을 얻고 두문불출로 집 밖은 거의 안 나간다고 했다. 허리 고장으로 이동이 거북하다는 것이었다. 코 수술 얘기는 말문도 못 열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래 지나긴 것은 지나간 대로 잊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사야 43:18)

고장으로 이동이 거북하다는 것이었다. 코 수술 얘기는 말문도 못 열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래 지나긴 것은 지나간 대로 잊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사야 4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