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4>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세계 대학 총장협의회 기조연설자, 노벨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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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현 박사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온누리교회 사역장로, 몽골국제대학교 부 총장겸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그리고 그의이름앞에는 수많은 단체 장의 직함이 붙지만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직함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몽골 선교사다.

 

 <역경의 열매 4>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세계 대학 총장협의회 기조연설자, 노벨상 수상자

 

세계 대학 총장협의회 (IAUP)가 1974년(?), 미국 보스턴 캔모어(Kenmore) 광장에 위치한 컨벤션 센터에서 열렸다. 1965년 이 협의회를 창립하신 경희대학교 조영식 총장님이 개회사를 하시는 건 당연한데 그 다음 기조연설 축사는 누구를 청빙하는지가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했다. 내가 그 당시 이 협의회의 보스턴 현장을 총괄하는 신임 교수로서 선발대로 파견되어 모든 심부름을 기꺼이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유학생으로 보스턴에서 대학원 시절을 보냈지만 70년대 초에는 한국에서의 재정 조달도 전무했고 학문의 수준도 많이 뒤떨어진 열악한 조건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하는 고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 캠퍼스와 일자리 외에 보스턴 전반에 관심을 가질 여유라곤 거의 없었다.

그런데 본부 조영식 총장님과 윤세원 부총장님이 기조연설자는 노벨상 수상자를 수소문해서 초빙하고 축사는 저명대학 총장으로 모시라는 팩스를 보내왔다. 우선 누가 보스턴 지역에 노벨상 수상자인가를 확인해보니 하버드대 경제학과에 Kenneth Arrow 교수였다. 축사는 보스턴 대학 총장인 John Silver 박사가 적임자로 떠올랐다.

여러 번 수소문해서 하버드대 경제학과 Arrow 교수 연구실을 방문했다. 노벨상 수상 교수는 생면부지의 동양 청년교수가 느닷없이 찾아와 엉뚱한 제안을 하는 걸 듣고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IAUP는 각국의 대학총장들이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서 협력하는 단체인데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논지를 피력했던 기억이 난다. 교육학자들을 수소문해서 부탁하는 게 순리에 맞지 않는가 반문하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어도 넉넉하지도 못하고 순리에도 벗어나는 억지를 생면부지의 젊은 학자가 우겨대니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세계 대학의 미래를 전망하는 대회는 많습니다. 그러나 이미 참석한 총장들과 교육 행정가들의 경험이나 교육자로서의 견해는 이미 같은 주제로 여러 번 다루었기 때문에 보스턴 대회는 색다른 사회과학의 조명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교수님 같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기조연설자로 모시어 ‘경제적 관점에서 본 세계대학의 현재와 미래’를 경청할 기회가 있다면 최고로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겁니다.” 결론적으로 나의 논지가 매우 타당하다고 Arrow 교수가 칭찬하면서 기조연설을 응낙해주셨다. 

종신 교수 100여명을 퇴직시키며 보스턴 대학을 혁신한 John Silver 총장도 교육개혁을 강연하시기로 하셨다. 경희대 본부로 희소식을 팩스로 회신하니 본부에 조영식 회장, 윤세영 이원설 위원님들의 칭찬과 격려가 내게 쇄도했다. 그야말로 가슴이 벅찬 날이었다.

미국 독립기념일 바로 그날, 기대하던 IAUP 세계 대학총장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조영식 협의회 회장님의 개회사가 끝나가는 데도 대망의 Kenneth Arrow가 나타나질 않는 게 아닌가? 원우현 교수가 그 어려운 난제를 어찌 그리 쉽게 풀어낼 수 있나 기대 반 회의 반을 했던 이원설 학장님 조영식 회장님 등 주변에서 나를 쳐다보면서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하고 한 목소리를 냈다. 마침 순서를 바꾸어 John Silver 총장의 축사를 먼저 듣고 있던 중 차를 현관에 세우고 양 손에 책을 든 노교수가 헐레벌떡 회의장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독립기념일 퍼레이드 행사 때문에 자가 운전하고 여유 있게 오시다 길이 막혔다고 사과를 하고는 그 멋진 기조연설을 시작하던 순간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검박하고 겸손한 미국 대학자들의 일상을 체험하면서 그 후로의 나 자신의 학교생활에 크나큰 교훈을 얻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언 15:23)

 

 

<역경의 열매 5>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서울의 봄

 

고려대학교에 1976년 9월 부임하여 2007년 8월 은퇴할 때까지 맡았던 과장, 소장, 원장이란 보직과는 달리, ‘정경대 교수협의회 회장’이란 돌출적인 보직은 아직까지 생소한 타이틀이다.

1980년 5월13일부터 각 대학교마다 대정부 투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던 서울의 봄. 대규모 집회를 예고하는 듯한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였고 고려대학에는 더 확연하였다. 총학생회와 운동권 진용은 총장, 학장, 과장, 학생처장 등 공식행정 라인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질적인 학교와 학생 간의 대화 채널이 전무한 상태가 되었다.

12,12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국가 통치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김옥길 문교장관을 내세웠지만 각 대학 총장을 비롯한 행정 체계는 무시되고 총학생회장단이 주도하는 학내시위나 대정부 집회는 멈출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고려대 경우도 당시 여석기 총장권한대행(대학원장)과 학처장들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밀려가는 분위기였다. 고려대 경우도 전 교수들은 고려대 교수협의회 회장을 무기명 비밀투표로 선출했다. 그 결과 교무처장을 역임하신 영문학자이신 김진만 교수를 고대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선임하면서 총학생회와 긴급히 대화 창구를 마련하였다. 정경대학도 다른 단과대학처럼 정경대 교수협의회 회장을 무기명 비밀투표로 선출하였다. 당연히 회장감인 선배 교수들이 즐비한 정경대학이었지만 모두가 내심 골치 아픈 그 감투는 기피하고 싶어서인지 투표 결과는 엉뚱했다. 고려대 부임 3년차인 무명의 원우현 교수가 투표 결과 당선되었다.

그 후 즉시 교무처 직원이 나를 찾고는 5월 14일경 데모 학생들이 상여를 몰고 4.19묘역을 향하는 행진이 시작된다고 알려주었다. 협의회를 맡으셨으니 교수님이 학생들과 동행하여 큰 불상사가 없도록 감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 P 전 의원이 지휘봉을 들고 단체 행동을 통솔해서인지 아무런 불상사 없이 귀교하며 행사는 마무리가 됐다.

다음 날인 15일은 이미 시내 모든 대학이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기로 결의를 했다는 것을 나는 사후에 겨우 알게 되었다. 정경대 사무실에서 고려대 행진이 시작되었으니 시위 학생 보호 차원에서 정경대 교수협의회가 동행하며 선도해야 한다는 별로 실효성 없는 조언을 해주었다. 

정경대 Y교수와 L교수가 나서는데 뒤따라서 성북경찰서 쪽으로 행진하는 고려대 팀을 뒤쫓았다. 성북경찰서를 지나칠 무렵 학생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교수님 성북경찰서에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유치장에 있거든요.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마태복음 25:36)

 

<역경의 열매 6>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성북경찰서 유치장 방문

 

 

성북경찰서에 이르러 시위학생 대열은 그대로 종로 2가를 향해 행진을 했다. 그중 일부 십여 명 학생들이 고대생이 잡혀 있는 성북 경찰서를 들러 가야 한다고 소리쳐서 나는 그 권유를 따랐다. 

 
경찰서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차 씨 성을 가진 당시 성북경찰서장이 손에 작은 붕대를 싸매고 P 데모 주동자 앞에서 지친 표정으로 황급히 내게 말을 건넸다. 
“교수님이신가요? 마침 교수님 아주 잘 오셨습니다. 아, 글쎄 유치장에 지금 있는 학생들을 10분 안에 풀어주지 않으면 실력 행사를 하겠다고 지금 겁박을 계속합니다. 석방 지시가 상부에서 내려온다고 가정해도, 그 석방 절차를 밟는 행정 서류를 꾸려서 처리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을 교수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교수님이 직접 이 학생에게 잘 설명해주십시오. 중재자로 해결사로 나서 주시면 저는 정말 고맙지요.”
그러는 사이 사복을 입은 정보과장이 다가왔다. “저는 고려대 출신입니다. 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유치장에 고려대, 경희대, 외국어대 등 학생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한번 들어가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정보과장을 따라가 보니 구치소 안의 학생들이 모두 소리치면서 “교수님 잘 오셨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만세 ,즉시 석방 촉구”라고 외쳤습니다. 정보과장이 한 말씀하시라기에 “여러분 고생하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합니다. 자중자애하고 질서를 지키십시오.” 
여기저기서 소리치며 박수치면서 떠들썩했던 구치소 앞 그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다시 정문 앞으로 돌아오니 검은 경찰 검은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정보과장이 차문을 열어주면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하면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나는 “우리와 함께했던 행진 대열이 어디로 갔는지 따라가서 동참하고 싶다. 나를 궁금해 할지 모르니 그곳으로 가주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경찰서 차를 타고 선발대를 쫒아가다가 얼마 안 되어서 종로2가 YMCA 건물 근처에서 바로 하차했다. 종로 근처는 이미 여기저기 화염에 휩싸이고 행진 대열로 길이 꽉 막혔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날은 할머니 추도식 날이었다. 종형 집 금호동에서 추모예배를 드릴 예정이었다. 홍은동이 우리 집이라서 시내 전체가 교통 정체인 사정을 감안해서 유진상가에서 국민대로 가는 우회로를 택하려 했다. 그러나 그 지역도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추도식도 마친 시간이 되어서 그냥 홍은동 집으로 귀가하고 말았다.
그날 나의 동선을 하나하나 자세히 여기서 기술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얼마 후에 경찰 특급 수배자로 분류되어서 합동수사본부 수배 명단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유를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도피생활을 하다 합동수사본부에 잡혀가서 일주정도 취조를 받는 말미에 진짜 이유를 일부 눈치 챌 수 있었다. 바로 서울의 봄날 서울역에서 명지대생 전투경찰이 버스에 깔려 숨진 불행한 사건 때문이었다. 엉뚱하게 내가 그 살인 현장의 교사범으로 지목되었다. 현장 탐문 과정에서 다방 마담의 목격담이 문제였다. 머리가 하얀 교수 풍의 남자가 버스를 지휘하면서 그 명지대생 경찰을 바로 치어 사망케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그래서 수사팀은 하얀 머리에 학자풍의 남자로 그 시간 그 자리에 나타날 수 있는 인물을 수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나는 바로 그날 경찰차를 타고 종로2가에서 하차했다. 서울역 현장까지 갈 수 있는 개연성이 아주 높은 인물로 성북경찰서에서 나를 지목했다. 고대생들 데모 행진마다 동행하면서 학생을 선동 격려했다고 오판할 수 있다는 추정까지는 속으로 했으나 살인교사라는 엄청난 죄목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서울치대 학생회장을 한 최목균 성모병원 치과 과장의 집에서 지내다 집으로 들어간 새벽에 험상궂은 수사관 3명이 구두 소리를 쾅쾅거리면서 온 집안을 뒤적거리고는 나를 바로 연행해 갔다. 당사자인 나는 면역이 되어 있었는데 아내와 어머니와 아이들이 혼이 많이 났던 것 같다. 아직도 그 장면이 섬뜩하다고 애기들을 하니까 말이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니”(베드로전서 2:19)
 
 
<역경의 열매 7>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합동수사본부
 
합동 수사요원들이 양 옆에 타고 자가용 차로 나만 홀로 어딘가로 호송해 가는데 주변을 거의 볼 수가 없었지만 중앙일보 뒤쪽 독립문으로 가는 길모퉁이의 경찰서도 아닌 어느 건물에 도착했다.
곧 바로 신상 자술서를 쓰고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로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범죄 혐의점을 가늠할 수 있어야 시원시원하게 자백도 하고 부정도 하고 묵비권도 행사할 수 있을 텐데 왜 내가 지명 수배대상이 될 정도로 어떤 범죄혐의가 있는지 머릿속에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고 그저 백지 상태나 다름없었다.
수사관들이 범죄행각에 대해 확보한 정보와 증거 자료가 무언가 있으니 그렇겠지 하면서 낯설고 익숙지 않은 합동 수사를 받아들이면서 체념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관록이 인상에 꽉 찬 한 수사관과 마주 앉았다.
내가 흔쾌히 심문에 응답할 수 있는 행적이 거의 없었다. 고려대 부임 초 김상협 총장님이 맡기신 신문방송연구소 소장이 임무가 벅차서 씨름하고 발전시키는 데만 집중해야만 했다. 박대통령 시해사건 후 격동적인 정국엔 관심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소장을 맡은 연구소의 예산 운영에 학교 지원은 없었다. 연구소 스스로 물적 인적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하는데 그 당시 나는 아무런 인적 재정적 네트워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학교 당국과 학생 운동권의 대화를 위해 정경대 교수협의회를 구성할 때 무기명 비밀투표 결과에 떠밀려 회장이 됐을 뿐이다. 학생들 시위행렬에 회장으로서 지도 감독 차 두 번 따라 나선 게 전부였다.
73년 경희대 교수로서 동아 광고 사태에 맞서 관등 성명을 대고 기명으로 광고를 한 게 블랙리스트에 찍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까지 피 심문인으로서 각오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수사관이 의도하는 심의 항목이나 절차와 과정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예측할 수도 없었고 심리적으로도 그로기 상태였다. 우람한 모범 계엄군이 보초를 서는 상황에서 며칠간 계속되는 심문에 잘 적응하긴 쉽지 않았다.
담당 수사관이 긴장된 상태를 만들고 심문을 진행하면 험상궂은 다른 수사관이 불쑥 의자에 걸터앉고는 나의 약점을 몰아붙인다. 의심쩍은 대목에 관해서 추궁하다말고는 돌연히 사라진다. 지금 그 당시 취조 과정을 이 글을 쓰면서 되짚어 보니 다음 네 가지 항목이 떠오른다.
1) 총학생회 운동권이 주도한 학내 반정부 집회를 상세히 묻고 나의 배후 조정 여부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2) 정경대 교수협의회 결성과정 및 무명의 초임 교수가 회장에 당선된 내막을 자백하도록 종용했다. 즉 어느 교수 세력이 나를 비밀리 밀고 이용했는지 여부였다.
3) 5월 13일경 4.19묘지 행렬과 다음 날 성북경찰서를 거쳐 시위대와 동행한 이유와 실질적 역할에 관해서 집중 심문했다.
4) 가장 위중한 혐의 사항은 서울의 봄 대규모 반정부 시위 장소인 서울역에 그 시간에 있었는지? 거기 그 시간 동참하지 않았다면 알리바이를 대라고 추궁했다.
그날 버스에 치인 명지대생 전경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한 불행한 사건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심문 조사 과정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심문 후반에 근처 다방 마담 증언이 큰 쟁점이 된 걸 감지했다, 그 마담의 말 한 마디로 내가 살인 교사 혐의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머리가 하얀 교수 풍 남자가 버스를 밀치라고 지시하면서 소리쳐 전경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비상 상황이라 변호사도 없이 피의자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는 합동수사본부에서 하루하루는 형법 형사소송법 시간에 허황된 인권 보장을 위한 법체계를 답안지에 쓰던 동숭동 낭만의 시절이 그리웠다.
법대 ‘범죄문제 연구회’에서 현장 실사를 위해 여러 선후배들과 그 당시 불광동 넘어 소년원을 방문한 기억도 떠올랐다. 소년원 재소자 실태 조사 중에 나에게 심문을 받던 여러 소년원생 얼굴이 아른거린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4~6)
 
 
<역경의 열매 8>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목격자 증인과 대질 심문
 
합동수사본부에 수감된 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조차 순간순간 잘 잊어버리고 심문관이 하라는 대로 응대하면서 긴장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심문 사항이 고려대 교내 반정부 집회에 관한 대목에 이르자 수사관은 이미 확보한 첩보에 따라 나에게 질문하면서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는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기 전 학내외 흐름에는 관심도 관여한 일도 전혀 없어서 정보 자체가 아무것도 없는 게 오히려 문제였다. 고대 교내 시위에 대해 묻는데 내가 제대로 잘 대답을 하지 못하자 느닷없이 누군가를 불러대며 오라고 했다.
심문하다 말고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거기 고려대 학생 이리 와 봐요. 5월 달 이날 시위가 몇 시에 어디서 시작이 된 건지 학생이 자초지종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얘기해 봐요.” 그때 지금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이 바로 맨발로 조용히 앉아있던 그 학생이었다. “네, 전에 조사 받은 그날 시위 말씀이십니까?”하면서 마치 교가를 낭독하듯이 시위의 시간, 장소, 전후관계 상황을 술술 이야기했다. 고려대 시위 주동자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전의원과 함께 일주일 전에 합동수사본부사에 들어와 일단 심문은 끝내고 맨발로 방에 대기 상태였다.
A급 교수인 원 교수는 답답하게도 대답을 시원하게 못하는데 학생인 설훈 주모자는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으니 수사관은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노려보면서 “고려대학에선 가르치는 교수는 기억력이 뚝 떨어지고 배우는 학생은 암기력 뛰어나는군요. 교수로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어깃장을 놓으면서 핀잔을 주던 기억이 난다. 성북경찰서 유치장 방문은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진술했는데 그전 시위 행적은 아는 바가 없다고 하니 그걸 캐려는 수사관의 집요함이 느껴졌다. 
나는 종로2가에서 길이 막혀 금호동 할머니 추도식 방향으로 가다가 홍은동으로 귀가한 사실을 반복하고, 심문관은 시위대 일행을 만나겠다고 정보과장에게 부탁했으니 그 후 당연히 서울역으로 진입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을 반복했다. 나에게 알리바이를 대라는 데 내가 조모님 추도식을 가려고 전화한 것이나 내가 귀가하여 기진맥진 저녁 식사를 한 것을 증명해줄 사람은 나의 일가친척뿐이었다. 그건 증거 능력이 없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수사관이 물었다. “내일은 여인을 만나게 해주려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나는 “어떤 여자가 왜 합동수사본부에 있는 나를 보러 옵니까? 집 사람 면회 기회가 벌써 되진 않았을 테고요. 나는 딱딱한 얘기만 오가는 분위기라 수사관이 농담을 던지는 줄 알았다.
그 다음날 나를 불러서 엄숙하게 오직 진실만을 얘기하라고 당부하는 게 아닌가. 다른 수사관이 나를 어느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바로 그 방에 한 여인이 입장을 하여 의자에 착석했다. 그 심문관이 그 여자에게 증인선서에 도장을 찍게 하고는 나와 대질 심문을 시작했다.
“이 사람이 그날 서울역에서 본 하얀 머리 남자가 맞습니까?”하면서 나를 쳐다보는 그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며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한 번 더 자세히 보시고 말씀하십시오.” “네, 이분은 제가 거기서 본 적이 없습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서울시 내 대학생이 서울역에 집결하여 집회시위를 할 때 버스를 밀어서 명지대생 전경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은 불행한 그 사건 현장에서 하얀 머리 교수를 보았다는 목격자 증인이 다녀 간 것이었다. 무명의 평범한 교수가 갑자기 수배자 명단에 선두로 지목된 이유가 바로 그 목격자의 하얀 머리 증언에서 시작되었다. 즉 살인교사 혐의가 반정부 시위 선동에 더해지니 수괴 중에 수괴로 내가 분류되어서 교수 지식인 중에서는 제일 먼저 연행되어 심문을 받고 요란스럽게 반정부 투사로 낙인찍힌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 위반으로만 심문조서가 꾸려지는 것도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수배 과정 중에도 어머님과 아내는 새벽기도를 드렸고 아침에 연행되어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근심 걱정이 많을 때도 주님께 모든 걸 맡기고 기도했다는 얘기를 귀가하여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여성 증인과 대질심문 후에 큰 누명을 벗고 보니 그 다음 심문조사는 시내 시위행진 가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모든 걸 수용하고 심문조서에 사인을 했다. 그 수사관과 나는 서로가 긴 터널을 벗어난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수사관이 나에게 가볍게 귀띔을 해주었다. “내 주쯤 종로경찰서 구치소로 이감될 겁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편 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