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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Carnegie Hall, gospel singer Wintley Phipps delivers perhaps the most powerful rendition of Amazing Grace ever recorded.  He says, “A lot of people don’t realize that just about all Negro spirituals are written on the black notes of the piano.  Probably the most famous on this slave scale was written by John Newton, who used to be the captain of a slave ship, and many believe he heard this melody that sounds very much like a West African sorrow chant.  And it has a haunting, haunting plaintive quality to it that reaches past your arrogance, past your pride, and it speaks to that part of you that’s in bondage.  And we feel it.  We feel it.  It’s just one of the most amazing melodies in all of human history.”  After sharing the noteworthy history of the song, Mr. Phipps delivers a stirring performance that brings the audience to its feet!

제공: Bethany UMC kwangchul kim

 여러분도  피아노나 키 보드의 검은건반 만으로 해보십시오.

저도 해 봤습니다. 권문웅

 

 

존 뉴턴에 대하여

찬송가 405장은 존 뉴턴이 목사가 되어 부끄러운 과거를 회개하고 자신을 죄악에서 건지신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사랑을 찬양한 신앙간증적인 찬송시다.

존의 아버지 존(이름이 같다) 은 작은 상선의 선장이었다. 매우 엄격한 프로테스탄트이나 당시의 예수회 식의 훈련을 해왔다. 1666년 영국은 빵집에서 시작한 화재가 크게 번져 거의 모든 도시를 태웠다. 존은 아버지를 따라 11세에 첫 항해를 했다. (1736) 그는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뱃사람들이 쓰는 용어들을 금방 익히는 영특함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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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 아버지는 항해를 하면서도 주일이면 갑판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존은 17세가 되었을 때 선원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평을 받고 서인도제도의 자메이카로 보내어지게 되었고 노예감독관으로 갔으나 그는 그곳을 탈영을 하다 매를 맞고 기절까지 하기도 했다. 다른 배로 옮겨 가서도 사고뭉치와 같은 존, 그러나 그가 신앙을 가졌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한때 백인으로서 노예의 생활을 하기도 했다. 흑인 노예감독관이 지키는 가운데 노예생활을 했던 존은 1746 11월에 노예에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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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 된 존은 하나님께 대한 이교적인 사상과 신성모독에 대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배에 극심한 풍랑에 키를 잡은 존은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을 함으로 선장을 놀라게 까지 했다. 성경말씀이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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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이 아길공작호의 선장이 되었을 때 450페이지 가량되는 노트를 준비하고 항해 일지를 쓰고자 했다. 존은 항해를 하며 주일을 지키고 선원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예배를 드리기는 했지만 선원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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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자신이 고상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예를 학대학대 있다는 것이 마음이 쓰였다. 노예를 위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들은 이해하거나 감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존은 매일 밤 노예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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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다시 아프리칸호의 선장을 맡게 됐다. 운항을 하던 중 존은 심한 열병을 앓았고 죽음을 기다리기 까지 했다. 물론 노예들도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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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알렉스라는 사람을 만났다. 알렉스는 영국의 설교자들이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고 사람들은 교회로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영성을 고취시키는 목사도 있게 됐다. 링컨셔 출신의 조지휘필드와 같은 사람들이었고 존은 북미와 영국을 여행하며 야외나 헛간 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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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람들은 주로 개혁파(Reformer), 복음전도자(Evangelist), 감리파(Methodist)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속했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은 존은 그들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한다. 존은 30세에 선장에서 은퇴했고 노예무역을 9년이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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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아내의 건강이 나빠져 요크셔로 이동했다. 마침 그 곳은 전도운동이 한창이었다. 기도회에 모인 존은 간증을 하는 기회를 자주 갖게 됐고, 설교자가 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존은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설교자가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존은 설교자에 대한 생각에 고민을 하다 아침 6시부터 저녁이 되도록 기도를 하기도 했고 결국 설교자가 되기로 작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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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노예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688년 퀘이커 교도들은 북미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자는 운동이 있었다. 노예를 소유한 교인들을 죽출 했으며 1755년 존이 노예무역을 그만 둔 해 노예제도를 반대한다는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제도의 폐지에 동의를 하면서도 실생활은 노예에 의존하는 양심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생활에 필요한 담배, 면화, 설탕, 럼주 등을 수입하는데 열을 올리면서 그것을 생산하고 있는 노예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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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를 무역하는 사람은 고상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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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는 노예무역을 그만 둔 존의 흥미진진한 과거를 엿 볼 수 있는 편지들을 책으로 만들라는 권유를 했다. 존은 거부했으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책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은 넣지 않는 익명으로 하고 책의 제목은웨하이스 목사에게 보낸 일면의 편지 속에 들어있는 흥미로운 특별한 인생기록이라 했고 책은 출간 된지 몇 주 만에 팔려나가기도 했다. 존은 책을 판 수익금을 마을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했다. 책을 본 사람들은 영국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는 소식도 접하게 되었다. 영국의 다르머스 백작의 친구이자 부유한 상인인 존 손톤은 매년 200파운드의 돈을 기부하겠다 하기도 하고 존은 올네이의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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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가장 만족을 준 것은 윌리엄카우퍼의 편지이다. 윌리엄카우퍼는 33세의 헌팅 출신의 시인이다. 윌리엄과 존은 서로 가깝게 지내며 장난치듯이 서로 경쟁하듯 순수한 재미로 찬송시를 만들었다. 훗날 올네이 찬송으로 알려진 많은 찬송시들이 이때 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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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순수한 올네이, 올네이사람, 올네이농장, 올네이 레이스 만들기 등을 주제로 한 일부 시 들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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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카우퍼의주하나님 크신 능력”, “오 하나님과 더 가까이 걷고파”, “나의 영혼 주님의 것”, 귀하신 주님 계신 곳”, “찬송하는 성도그리고 존의나 같은 죄인 살리신”, “봄날”. “귀하신 주의 이름은”, “저 높은 천국에서”, “오 내 영혼”. “시온성과 같은 교회”, “오 주님 우리의 연약한 영혼을”, “내 마음에 평안을같은 찬송시들이 지금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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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
년 존은 아내를 먼저 보냈다. 10년 후 영국선교회, 영국국교회선교회 등 성서공회를 세우는데 열정을 쏟았다. 1807 5 1일 영국의 영토에는 노예수입을 폐지할 것이 의회에 통과됐다. 1807 12 21일 존 뉴턴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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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
3 2일 영국영토에 노예를 내리는 것을 금지에 통과, 26년 후 1833년 노예해방이 발효됐다. 영국제국의 노예제도가 폐지됐다. 그 동안 1500만 명의 노예가 아프리칸 노예가 매매됐고 이들 중 900만 명이 다른 나라로 이송도중 사망했다. 1962년에 이르기 까지 전 세계의 노예제도는 완전히 폐지, 노예를 삼는 것은 불법이 됐다. 18세기를 이성의 시대, 계몽의 시대, 기품의 시대라 불렀다. 노예들이 고통을 당하며 이 시대가 지냈다. 18세기는 이성도 계몽도 아니다 기품의 시대는 노예들의 불행에서 뽑아 엄청난 이익에서 기안된 것이다. 19세기가 되어서야 양심을 돌아보고 인신매매의 옳고 그름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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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뉴턴이 살았던 18세기의 이성적이고 소위 말하는 기품의 시대라는 것은 오늘날 이해 할 수 없는 사회의 정황과 특히 예수교의 사상으로 영성이 결여된 신앙으로 혼탁한 시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어쩌면 노예를 사들이거나 팔고, 핍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존 에게도 이러한 혼란한 상황을 겪으며 신성모독의 발언을 서슴지 않고 방황을 하고 노예들에게 못된 짓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 그의 참다운 고백, 그리고 훗날 자신을 회개하며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은혜에 감격해 찬송시를 썼다. 이외에도 알렉스와 경쟁을 하듯이 쓴 찬송 시들이라도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의 깊은 곳에서 지금도 심령에 위로를 주는 아름다운 찬송 시들이 지금도 불려지고 있으며 은혜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노예,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자유와 흑백의 사이에서 사람을 서로 사고 팔기도 하며 같은 인간으로서 자유를 빼앗긴 한 세기에서 이들은 입으로, 생각으로 노예제도의 폐지를 이야기 했지만 실상은 노예에 의존을 하고 생필품들을 노예에 의해서 공급을 받으면서도 그것들을 생산하는 노예에 관심을 두지 않음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의 하나님과 일치되지 않는 생활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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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짖고 있지만 실제 생활은 예수그리스도와 정 반대 되는 생활을 하는 현실이 뉴턴이 살던 시대처럼 노예와 사회풍토만 다를 뿐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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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치된 신앙생활, 그것은 진정으로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며 과거의 죄악 된 생활에서 회개를 통해 존 뉴턴과 같은 찬양으로 고백을 하여야 할 것이다.


 

글 쓴이 : 김정길(크리스찬 타임스 뉴욕지역 담당기자 / 목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