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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속으로] 바울의 2차 전도 여행과 밧모섬 요한의 발자취를 따라


<선교전략가인 유승관 목사(선교학 박사)가 최근 바울의 2차 전도여행지와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쓴 밧모섬을 방문한 뒤에 국민일보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한국교회의 처한 현실과 관련해 시사점이 많은 내용이어서 이를 소개한다>

바울의 아덴(Athens) 설교- 한국 교회를 향한 사도행전 17장의 해석과 적용 (상)

“바 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2~25)

아레오바고 언덕에 선 바울

사도행전 17장을 통해 우리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 대한 경로와 사역의 결실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은 에그나타아 길을 따라 약 사흘 길 정도 되는 베뢰아로 향한다.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던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그 진리에 대해 날마다 상고하므로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말씀(행17:11~12)을 통해 알 수 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주님을 영접한 새 신자들을 돌보게 하기 위해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둔 채 자신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험난한 풍랑을 헤치며 배로 최소한 나흘 길인 아덴(아테네)에 도착한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를 수호신으로 삼은 도시로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서는 ‘미네르바’라는 지혜의 신, 학문의 신을 의미하는 그리스 문화와 철학의 중심지였다. 이런 지성의 도시, 철학의 도시로 유명했던 아덴에 입성한 바울은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어온 이 도시가 바로 우상의 도시, 죄악의 산실임을 영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행17:16). 그가 바라본 아덴의 실상은 하나님 없는 지성, 인간의 지식과 욕망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수많은 우상과 온갖 죄악이 관영한 그야말로 소돔과 고모라였다. 바울은 격분했다. 여기에서 ‘격분’은 헬라어로는 “파록시노(paroxyno)”라는 말로 ‘발작적인 분노’, ‘격렬하게 분노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당시 바울이 두 발을 딛고 섰을지도 모르는 아레오바고(Areopagus) 언덕의 널찍한 바위에 서서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본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에 우뚝 세워진 아테나 여신을 위한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 세계문화유산 제1호로 선정되고 유네스코의 상징 마크가 될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건축물로 회자되고 있는 이 파르테논 신전은 아직도 남아있는 직경 1.9미터, 높이 10.4미터에 달하는 46개의 거대한 돌기둥과 그 위에 걸쳐진 들보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또한 신전 안쪽 기슭의 약 1만 7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과 104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진 제우스 신전을 비롯해 수많은 신전과 아고라 신상들과 제단 등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 앞에 서면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당대 헬레니즘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아덴과 로마 제국의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와 위엄 가운데 아레오바고 언덕에 홀로 선 사도 바울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영에 속한 사람의 힘

이 름도 없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빈민 출신, 목수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삼고 그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걸음에 이곳으로 달려온 자신의 초라한 행색! 배고픔과 강도와 바다의 위험, 멀고도 험난한 여정에 지치고 까맣게 타버린 자신의 형편없는 몰골!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진 그리스 철학과 사상을 논하는 당대 최고의 종교 철학가들, 비단 옷을 걸치고 기름진 음식과 아름다운 여인들에 둘러싸여 껄껄대며 호기를 부리는 수많은 세도가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들 앞에 선 볼품없는 자신의 모습과 정체성을 과연 사도 바울은 어떻게 여기고 받아들였을까? 아니 세상의 정세자와 권세자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돈, 명예, 가문, 출세, 성공, 자녀 등과 같은 육에 속한 것들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바울의 믿음과 용기는 과연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

나는 믿음의 거장 사도 바울이 머물렀던 아레바오 언덕에 서서 그가 구주로 고백하고 따랐던,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나 된 연약함과 불충함에 할 말을 잃고 바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영에 속한 그에 비해 육에 속한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하다는 생각에….

바울의 창조론과 신관(神觀)은 분명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 24~25). 그는 하나님을 떠난 마음과 하나님보다 앞서는 인간의 지혜와 지성이 결국 우상 숭배임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그런 바울의 마음속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 성령의 소욕과 인간의 소욕이 늘 싸움을 벌였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21~24).

그러나 바울은 분명 영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의 법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려고 하는 연약함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게 하는 성령의 은혜에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실천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그가 세상의 힘이 지배하고 이단 사설과 우상이 창궐한 죄악의 도시 아덴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의로운 분노를 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바울 안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격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심령은 자신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과 교통하고 그의 힘으로 행동한다. 성령님에 의해 결단하고 행하는 믿음은 세상의 그 어떤 힘이나 그 누구의 권세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힘이다. 아니 영에 속한 사람의 주인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이다.

한국 교회를 향한 바울의 외침

사 도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에 대해 아덴 사람들은 세 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도 있었더라.”(행17:33~34).

예나 지금이나 복음과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동소이하다. 복음에 대해 자신의 지식과 머리로 판단하여 예수를 조롱하고 거절하는 사람들, 좀 더 생각을 해보고 좀 더 내 마음대로 살아본 후에 결정하겠다고 미루는 사람들, 비록 소수이지만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 나라와 의를 위해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 바로 아덴을 위해 세상을 위해 썩는 밀알이 된 이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인류 구속사를 면면히 이어 가신다.

오늘 조국 대한민국의 교회가 처한 현실과 모습은 어떠한가?

돈, 권력, 섹스, 명예, 성공 등 인간의 소욕을 대변하는 우상들이 왕 노릇하고 있는 일부 교회들,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불의와 손을 잡고 예수를 파는 이 시대의 가롯 유다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는 힘 있는 사람의 말을 믿고 바라며 눈치 보기에 급급한 비겁한 제자들, 의롭지 못한 일에 영적 격분을 느끼지 못하고 대세에 떠밀려 현실과 타협하는 성도들… 이 모두가 ‘알지 못하는 신들’로 가득한 21세기 한국판 아덴의 자화상이다. 한국 교회는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바울의 아덴 설교를 재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위해 썩어지는 밀알과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인류 구속사의 교훈이요 한국 교회를 향해 바울 사도가 외치는 아덴 설교의 핵심 메시지이다.

유승관 목사(선교 전략가, SIM International Consult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