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란 나라- 그 전쟁속의 조선의 여인들

 



겹겹
                                               안세홍 사진·글

끌려감, 감금, 성폭행, 그리고 마침내 버려짐으로 이어지는 인생 이야기를 듣기란 가난과 질병, 고통으로 무너지고 쪼그라든 몸뚱아리를 보는 일만큼이나 힘들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안세홍(41)씨가 우리에게 내민 포토 에세이 <겹겹>은 그 두 가지를 모두 하라 한다. 그는 1934~1942년 사이,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중국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쓰이다 버려진 8명의 여성을 만나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다. 사진도 글도 고통스럽게 생생하다.

이들은 여전히 중국에 산다. 박서운(1915년 생, 2011년 사망)씨는 죽는 날까지 자신이 짓밟히던 위안소 5분 거리에 살았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천불이 난다”면서도 어떻게, 어디로 가면 살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난한 식민지 나라, 가난한 집안에 딸로 태어나 13~22살의 나이에 선금 몇백원을 받아 집에 주고는 일자리 준다는 중국으로 떠났다. 속은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부터 일본군에게 윤간을 당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위안부’란 호칭과 일본 이름이 따라 붙었다.

전쟁이 끝나자 군대가 떠난 중국 벌판에 남겨졌다. 김순옥(90)씨는 “전쟁이 끝나고 소련군이 들어오자 그들에게 잡히면 또 당할까 싶어 도망다녔다”고 했다. 살기 위해 그곳의 남자와 결혼했지만 의처증이 심했다. 김의경(1918년 생, 2009년 사망)씨는 남편에게 맞아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북한도 남한도 그들을 잊었고 우여곡절 끝에 만난 가족에겐 오히려 상처를 받았다.

안세홍씨의 ‘겹겹’ 프로젝트는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일본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록하고 사진전, 강연회 등을 여는 작업이다. 안씨는 서문에서 “태평양 연안 나라들과 일본 여성들까지 일본군에게 인권을 유린당했고 아직도 고통 속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의 오늘을 찍은 사진에는 진한 빈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어디서부터가 고통인지,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최근 일본은 “국가의 의지로 조직적 납치, 인신매매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지만 얼마 전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이 기록된 버마·싱가포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까지 발견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피맺힌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이 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우리는 꼼꼼히 듣고 보아야 한다. 책에 등장한 8명 중 6명이 사망했다. 남은 두 분의 나이는 아흔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흑백으로 찍은 <겹겹> 안 중국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에는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1. 충북 진천이 고향이라는 박대임(사망 연도 미상) 할머니는 늘 한국 지도를 들여다본다. 2. 박서운(2011년 사망) 할머니가 어둡고 눅눅한 방에서 피를 토한 뒤 누워 있다. 3. 김순옥(90) 할머니의 등 뒤로 한평생 의처증으로 아내를 힘들게 한 남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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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토하고 눈을 잃어도…한국지도 매만진 할머니

중국 난징까지 갔는데 중간중간 역에 정차할 때면 일본 군인들이 들이닥쳐 여자들을 끌어내려 윤간을 했다.
저항을 하고 일부는 도망쳤더니 군인들이 총을 쐈다.

올해로 8·15 광복 68주년이다. 35년 동안의 일제 식민통치를 벗어난 지 그리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이 휩쓸고 간 땅에서 아픈 것을 아프다고 제대로 말하지도 못한 채 시간은 흘렀다. 전쟁터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한이 풀리지 못한 채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다. 중국에 버려진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록한 포토 에세이 <겹겹>의 페이지마다 보이는 깊은 주름, 쪼그라든 몸뚱어리, 마침내 사망했다는 기록은 그 무심한 시간의 결과물이다.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안세홍씨는 2001년 중국에 남겨져 있는 조선 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존재를 알았다. 그해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둥닝현의 오지 시골 마을에서 이수단(90)씨를 만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지난해까지 태평양 전쟁의 최전선 곳곳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한 사람에게 두 번, 세 번 찾아가 사진을 찍고 그의 삶을 되물어 기록했다. 10여년 사이 여섯 분이 돌아가셨고 이제 두 분이 남았다. 책으로 정리해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출간했다.

고통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가난은 오래 피해 여성들을 짓눌렀고 남성은 그들을 짓밟았으며 질병은 늘 몸을 지배했다.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어린 나이에 선금을 받아 가난한 가족에게 주고 멀리 중국까지 일을 나갔던 여성들은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살아야 했다. 여성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해방되지 못했다.

김의경(1918~2009년)씨가 버려진 중국의 우한 지역은 여름이면 섭씨 40도를 넘는 기온에 높은 습도로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곳이다. 그의 고향은 경성, 지금의 서울이다. 스무살이던 1938년, 혼자 집에 있는데 군복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쳐 “이제는 여자도 군인으로 나가야 한다” 했다. 부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끌려나와 다른 여자 여덟 명과 중국행 기차를 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기차는 달렸다. 난징까지 갔는데 중간중간 역에 정차할 때면 일본 군인들이 들이닥쳐 여자들을 끌어내려 윤간을 했다. 저항을 하고 일부는 도망쳤더니 군인들이 총을 쐈다. 그렇게 끌려간 난징에서 1년 동안 ‘아카리’란 이름으로, 이후 군인 트럭을 타고 이동해 후베이성 이창과 창사에서 6년 동안, 모두 7년을 위안부로 살았다. 검사도 하지 않고 무조건 강력한 성병 주사인 일명 ‘606호’를 맞아야 했고 김씨를 비롯한 여성들은 불임이 됐다.


김의경(2009년 사망) 할머니는 전쟁이 난 뒤 만난 남편에게 하도 맞아 한쪽 시력을 잃었다. 서해문집 제공

다큐 사진작가가 피해자들을 만나
80여년 전 상처를 되물어 기록했다

어린 나이에 선금을 받아
가난한 가족에게 주고
중국까지 일을 나갔던 여성들은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살아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여성들은 해방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우한으로 갔다. 우한 지역의 한커우 적경리 지역만 해도 위안소가 20곳이 있었다.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이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1992년 한-중수교 뒤 한국정신대연구소가 이곳에서 찾아낸 피해 여성만 10명이 넘었다. 1970년대에는 북한이 피해 여성들에게 해외공민증을 만들어주고 학습을 지원하는 등 활동을 벌였지만 80년대 들어 그마저도 끊겼다. 김씨는 낯선 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곳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매일같이 두들겨 맞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배삼엽(1925~2011년)씨는 1937년 월경도 하기 전인 열세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부모를 잃은 직후였다. 만주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군복 입은 남자의 말을 믿고 따라 나섰다. 선금 400원은 여동생의 중국행을 적극 권했던 친오빠가 챙겼다. 12명의 여성이 중국 네이멍구 바오터우까지 동행했다. 배씨가 가장 어렸다. ‘아사히칸’이란 이름의 위안소에 들어서고서야 속았다는 걸 알았다. 처녀라서, 첫 관계를 한 장교가 위안소에 큰돈을 지급했다는 기막힌 이야기를 훗날 들었다. 그날 이후 배씨는 일주일 동안 피를 쏟았다.

3년을 위안소에서 보낸 뒤 배씨의 목구멍에서 피가 솟기 시작했다. 그는 쫓겨났고 부산 이모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조카도 위안부로 끌려간 뒤였다. 부모 없는 한국에서 가난은 견디기 힘들었다. 다시 중국으로 갔다. 톈진과 베이징의 ‘춤방’에서 춤을 췄다. 손님은 대부분 미군이었다. 1958년 박스 제작 공장에 취직한 것은 그의 인생에서 매우 운좋은 일에 속한다.

스무살에 중국 지린성 훈춘시 춘화진에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던 박서운(1915~ 2011년)씨는 죽을 때까지 그 동네에 살았다. 가난한 집, 입이라도 덜기 위해 열아홉에 시집을 가 시집의 집안일과 농사일을 했다. 1년 만에 소박맞아 친정에도 못 돌아간 채 식당을 전전하다 선금 300원을 받아 친정에 주고는 만주로 떠났다. 허드렛일이나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성병이 심해져 군인을 받지 못하자 위안소에서는 밥조차 주지 않았다. 구걸을 하여 간신히 목숨을 이었다. 한족과 조선족 남자 세 명과 살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무너진 벽, 눅눅한 이불 위에 누워 박씨는 “몸을 너무 굴렸다”며 “창피하다”고 했다.

안세홍 작가는 “할머니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사진을 찍는 것 외에 없어 자책했다”고 적었다. 위안부 피해 여성과 그들의 기록을 남긴 작가가 부끄럽다고 말한다. 전후 일본 정부도, 남한도, 북한도 피해 여성들을 위해 한 게 별로 없다. 이들은 묻고 있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누구인가. 겹겹으로, 여전히 부끄러운 시대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