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사랑한다 – 한혜진 (수필가/ 한양마트 이사)


 “ 미안하다 사랑한다 ”                            

 



                                         한혜진 / 수필가·한양마트 이사

 






“엄마 나 할말 있어.” 아들 녀석이 이층에서 내려오면서 나에게 말을 던졌다. 녀석의 자원봉사 활동을 끝내고 돌아와서 옷도 갈아입기 전이었기에 성질도 급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은 작정을 한 듯이 보였다. 얼굴이 약간 상기된 채로 꺼낸 말은 대체로 담담한 어조였지만 힘겹게 입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내용인즉 엄마가 이젠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말 것이며 이래라저래라 하지도 말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거라는 얘기였다. 

사실 이 말은 따지고 보면 얼마나 기특한 말인가. 그런데 그 때 그 순간에는 난 가슴을 움켜쥐지는 않았지만 총 맞은 것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눈물이 핑 도는 모습으로 소극적인 대꾸를 할 뿐이었다. 

“울지 마세요. 엄마 이럴까 봐 여태까지 얘기를 못했어요.” 그리고는 약속이 있다며 녀석은 휑하니 나가버렸다. 물을 다 엎질러버린 상황 저도 아마 사태수습이 어렵다고 느꼈을 테니까….

나는 암만 곱씹어도 그렇게 말하는 투가 영 납득이 가질 않았었다. 다 저 위해서 한 일 아니던가. 난 그 긴 저녁 시간을 지나며 눈은 점점 퉁퉁 부어 올랐고 그 애가 왜 그러는 지에 대한 생각이 점점 부정적으로 흘러감을 감지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12학년의 9월이라는 스트레스의 시작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 혼자 어떡하라고. 마침 출장 중인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전화까지 걸어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잘 한 일이라 여겨진다. 둘이 궁리한다는 것이 도리어 부모라는 권력으로 아들을 우선 제압하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몇몇 아는 분들께 전화를 걸어 어안이벙벙한 사정을 알리고 조언을 구해보았다. 학교 카운슬러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려던 나의 계획은 “그냥 잠시 내버려 두라”는 어떤 분의 얘기에 조금씩 누그러들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내 속이 들끓었던 것은 아들의 말에서 배반감을 느낀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더 그렇게 여겨졌던 것이리라. 그만큼 우리 아들은 착하고 온순했다. 아니 엄마 좋아라고 착하고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모습만 보여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차분해지고 사태에 대한 대응이 명징해졌다. 엄마에게 대들 수 있었다는 것은 이젠 더 이상 엄마의 아이에 머물러있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래 주자. 이젠 줄 때가 되었지. Give the gift of Independence.

그날 밤 나는 밤늦게 들어온 아들과 마주 앉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때가 있다. 그 시간까지 엄마가 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엄마는 네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단다. 그 말에 엄만 처음엔 놀라고 당황했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엄마가 기뻐해야 할 말이었어.

왜냐하면 그건 네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였으니까…네가 아이의 심정으로는 엄마한테 그런 말 못했을 거다. 이제 우리 그런 말 하고 지내자. 하고 싶은 말 못하면 병이 된다고 누가 그러더라.” “엄마는 다 너 좋아라고 한 일이었어. 그런데 네가 불편했다면 미안하다.”

“엄마 그 말 들으니까 시원해요.” 얼마나 적절한 한국말 표현인가. 녀석은 감정의 소화불량에서 풀려나고 있었다. 아들과의 소통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이리저리 일을 크게 만들 수도 있었는데….

난 정말 몇 년 전 그 일이 있었음에 감사해 한다. 매도 빨리 맞는 편이 나은 것이다. 이젠 녀석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화를 자주 걸지 않아도 그 때 느꼈던 마음으로 나를 다독이곤 한다. 잘 할 것이라고 믿고 마음 편히 지내는 거다. 

그런데 때때로 하나님께 몰래 말을 걸고 싶어지는 걸 어쩌랴. “하나님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 주셔야 해요. 저는 이제 못합니다. 저 스스로 하겠다는 아들의 모든 일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티 나지 않게. 아멘.” 

약한 자여 나의 이름은 엄마다.

 

[뉴욕 중앙일보]  04/03/2014 미주판 

                                         한혜진 / 수필가·한양마트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