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불의한 재정운영 -상습적헌금남용과 교인 이탈


 

교회의 불의한 재정운영

 

상습적헌금남용과 교인 이탈

 

아래글은 한국교회의  이야기다. 

우리이민교회가 빠르게 한국교회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교회재정 운영이 투명하지않음이 밝혀지자 교인들은 헌금봉투를 든채 주춤하고있는 모습을 보이는 교회도 보게된다.

이민 생활에서 땀과 때로는 피까지 얼룩진 소득에서 준비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헌금이 소원하고 바라는 목적대로 쓰여지고 있지 않다는 의구심이 들게되는 교회재정운영 때문에 교인들은 당황하게된다.<KCC News> 
 

지난 20년간 우리는 참으로 희한한 현상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은 신도 수가 급증하고 있는 반면에 유독 개신교만 마치 썰물 빠지듯이 교인이 줄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회적 환경에 속해 있는 두 기독교 집단이건만 왜 이같이 상반된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반기독교적 헌금 남용


이런 가나안 현상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다양한 분석이 가능합니다만,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한국 개신교 특유의 ‘반강요적 헌금 제도’의 운용입니다. 무려 85종이나 된다는 기존의 헌금 종류 외에도 최근에는 새로운 종류의 ‘듣보잡’ 헌금들이 줄줄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일천번제 헌금, 오병이어 헌금, 씨앗 헌금, 벽돌 헌금, 한평 헌금, 만사 헌금, 아나니아와삽비라 헌금, 부자청년 헌금, 사르밧과부 헌금 등 일일이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발한 헌금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돈 이야기가 시작되고 심지어는 동네 구역 예배에까지 빠짐 없이 돈을 걷습니다. 이렇게 모이는 집회마다 돈을 부지런히 걷고 있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돈을 사용할 때입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명분으로 걷은 공교회의 소중한 헌금을 소수 직분자들이 은밀하게 관리하며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일부 교회에서는 교인들은 아예 재정 장부를 볼 필요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 일단 바쳐진 돈이기에 교회가 알아서 잘 사용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담임목사는 그 돈을 물 쓰듯 하며 터무니 없는 고액 연봉과 판공비를 받고, 자식 유학 보내고, 고급차 굴리고, 집회 핑계로 해외 여행 즐기고, 아주 우아하고 품위있게 사치를 부리며 삽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아직 약과입니다. 어떤 대형 교회들은 교육, 선교, 구제, 언론, 출판, 그리고 장학 사업 등을 명분으로 하여 별도 법인체를 만들어 교회 돈을 대량 투입하고 자기 사람으로 이사진을 구성한 후 나중에 서서히 그 단체를 사유화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식들에게 그 운영권을 물려줍니다.

그 투자금의 액수가 작게는 수 억이고 보통은 수십 억 또는 수백 억에 달합니다. 이런 식으로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를 한번 열심히 하면 자손 대대로 먹을 가업이 하나 확보되는 셈이지요.

필자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한 목사님도 위와 유사한 방법으로 군소 신학교를 하나 만들고, 교회 돈을 이용해서 수십 억대의 건물과 부지를 구입한 후 지금은 부인과 딸이 독립된 학교법인의 이사가 되어 매년 적지 않은 급료를 가져가며 사실상 가정 사업체처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처첩을 거느리며 부귀를 누리던 중세 고위 성직자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이래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순진한 교인들은 그저 ‘돈 내는 기계’가 되어 맹신적 아멘만 복창하고 있습니다.

과거 중세 교회는 교인들이 ‘성경’에 무지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신도들이 성경을 못 보게 제한했습니다. 교인들이 너무 똑똑하면 골치가 아픕니다. 그들이 성경을 잘 모를수록 더 고분고분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치하기 쉬우니까요. 만일 그래도 몰래 성경을 보면 즉시 이단으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상당수의 교회는 교인들이 ‘장부’에 무지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야 삯꾼 목사들이 교회 돈을 쉽게 유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신도들이 장부를 못 보게 기를 쓰며 방해합니다. 만일 그럼에도 계속 장부를 보자고 요구하면 역시 이단이나 불순 세력으로 몰아버립니다. 과연 해 아래에 새 것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배도한 성직자들의 행태는 별반 차이가 없고 그 수법이 거의 비슷한 셈이지요.

그러므로 제 아무리 깨끗하고 거룩한 척하는 교회일지라도 교회 재정 장부를 공개하지 않고 숨기려는 악한 시도는 모두 사탄의 역사라는 점을 분명히 아시면 좋겠습니다.


교회 탈출 현상


하여튼 이젠 교인들도 점차 진실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현대 십일조는 구약 신정국가 시대 조세법의 시대착오적인 억지 적용이고, 오늘날 십일조를 진정 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목사님이고, 십일조를 해야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이미 최고의 복이고, 땀 흘려 바친 헌금이 가난한 이들이 아닌 일부 종교인들의 배를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고도의 정보화 시대입니다. 한때 대형 교회들이 다양한 영상 예배로 고객들을 늘이던 기법이 이젠 오히려 교회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집에서 얼마든지 영상 예배가 가능해졌습니다. 도리어 온라인에는 하도 많은 설교와 예배가 넘쳐서 행복한 고민을 해야 할 정도입니다.

이른 바 ‘가나안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교회 부패도 없고, 헌금 강요도 없고, 사생활 간섭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적 기만이나 위선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그동안 교회 내에서 참고 또 참던 일부 성도들이 정든 공동체를 포기하고 ‘교회 탈출’의 결단을 내리기가 더 용이해진 것이지요. 과연 이 교회만 바른 교회고, 당신의 설교만 좋은 설교냐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교인들은 더 이상 ‘바보 성도’가 아닙니다. 가족들 반찬값까지 아껴 가며 헌금한 소중한 돈으로 목사 자녀가 유학을 가거나 목사 부인이 사치한 생활을 즐긴다면 이게 정상으로 보일까요. 더구나 그렇지 않아도 내 집 마련조차 포기하고 전세금 인상에 가슴을 졸이며 가뜩이나 살기 힘든데 뭐 때문에 십일조를 못 낸다고 눈총과 멸시까지 받으며 굴욕적인 교회 생활을 감내하려 할까요.

요즘 교회에 30대와 40대의 청장년층이 갈수록 얇아지는 이유가 짐작이 가시는지요. 그들은 전통적인 기복신앙 속에서 비교적 경제적 호황의 특혜를 많이 받은 이전의 ‘경제개발 세대’와는 사고방식이 많이 다릅니다. 상대적으로 삶이 더욱 각박해진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운영진에 대한 맹신적 충성보다는 합리적인 타협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당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런 현실은 근래에 들어 유초등부와 중고등부 등 교회학교의 학생수가 급감하는 현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학생들은 부모들을 따라서 함께 교회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 가정조차 저출산인 경우가 많아 아이들이 더욱 줄고 있는 것도 또 다른 원인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흐름이 한 세대만 더 지속된다면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는 충분히 상상이 되실 것입니다.

사실 일부 목회자들도 문제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진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 하고 침묵합니다.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면 교단 내에서 밥그릇을 내려놓아야 하니까요.

진실은 간단합니다. 교회가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으면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현재 한국 가톨릭과 한국 개신교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신부가 항상 목사보다 거룩하거나 인품이 고상해서 가톨릭은 부패가 더 적을까요. 꼭 그런 건만은 아닙니다. 제도적 문제도 매우 큽니다.

가톨릭은 일단 교역자들의 돈과 권력 추구를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가 어느 정도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순환 사역도 잘 합니다. 따라서 사제나 수녀가 치부하는 것을 보기 매우 힘듭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그 제어 장치가 먹통이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개신교 내의 교권주의 목사들이 교단법과 관습을 악용하여 그것을 지속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이지요.


불의한 기득권을 놓아야 교회가 산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아주 쉽게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가죽으로 자루를 만들되 입구를 아주 좁게 합니다. 원숭이의 손이 간신히 들어가고 나올 정도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자루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덩어리 과실을 넣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지나가던 원숭이가 자루 속을 들여다보곤 아주 기뻐합니다. 그리고는 자루 속에 손을 넣어 과실을 꺼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원숭이의 손은 자루에서 빠져 나오지 못 합니다. 손에 과실을 쥐고 있으니까요.

그냥 손 안에 쥔 먹이를 놓아버리면 될 것을 원숭이는 그리 못 합니다. 그 먹이를 잠시 놓으면 다시 저 자유의 숲을 힘차게 누빌 수 있으련만, 원숭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다름이 아닌 원숭이의 본능적 ‘욕심’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과 권력을 내려 놓으면 다시 소생할 수 있는데 그걸 움켜 쥐고 있으니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떠나는 교인들의 뒷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어찌 됨이니이까?”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즉시 십일조 강요를 포기하고, 헌금 제도를 자원적 무기명 헌금으로 단순화하고, 목사 임기제를 하고, 목사 연봉을 교사 수준으로 조정하고, 교회 장부를 매년 공개하여 열람케 하고, 교회 세습을 끊고, 그리고 중대형 교회들은 담임목회제를 공동목회제로 하거나 장로당회장제를 시행하면 교회가 당장 달라질 것이고 가나안 성도들도 다시 교회로 돌아올 것입니다.

즉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지요. 사실 이미 힘에 넘치도록 수고하시며 헌신하시는 신실한 목사님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항상 목회자에게만 희생과 헌신을 더 요구하는 듯 해서 늘 죄송한 마음이지만 이게 진실이니 어쩌겠습니까.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은 이걸 못 합니다. 차라리 십자가를 내려 놓을지언정 자기 욕심을 내려 놓을 순 없습니다. 교회 정의를 대적하다 영적으로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겨우 확보한 이권만은 절대로 포기하지 못 합니다. 이게 바로 요즘 맘몬의 돈을 움켜쥐고 있는 ‘원숭이 목사님들’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설사 제 아무리 고상하게 설교하시는 대형 교회의 고명하신 목사님들도 이건 쉽게 못 합니다. 다음 달부터 잡다한 지원비와 판공비를 모두 없애고 목사 연봉도 교사 정도로 하자고 하면 아마 큰 난리가 날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가 목사 개인의 사설 영업장도 아니고 목사직이 무슨 세속적 벼슬이나 감투도 아니건만,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 두둑한 주머니를 지킵니다. 교회 부패와 사회 불의는 얼마든지 용서하며 잘 참아내지만, 자기 주머니를 건드리는 것만은 결코 못 참습니다.

우선 공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들이 먼저 기득권을 내려 놓고 자기가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한국교회가 사는데, 그런 건 그저 설교할 때나 늘어 놓는 멋진 이야기이고 정작 자신들은 그런 희생을 못 합니다. 얼마나 고생해서 얻은 담임목사 자리인데 차라리 교회가 망하면 망했지 그건 양보를 못 합니다.

본래 개신교의 목사는 종의 신분이지만 이 귀족 종님들만은 아주 유별나게 특이해서 왕처럼 대접해야만 겨우 만족합니다. 마치 귀족 교회마다 중세 교황이 한 명씩 신정통치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제사장들처럼 교인들에게 영육으로 무거운 짐을 지우는 데에는 뛰어난 재간이 있지만, 실제 자신들은 교회당의 빗자루 하나도 들기 싫어하는 위인들입니다.


개혁인가 자멸인가


그래서 결론은 자명합니다. 앞으로도 상당수 교회들은 출석 교인이 반토막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자기 개혁을 거부하고 목회 독재를 유지하며 십일조를 강요하고 잡다한 헌금을 강조할 것입니다. 그래도 충성스런 순진파 신도나 눈 먼 맹신도들은 어느 정도 남게 될 것이니까요.

다만 전체적인 교세 몰락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과 헌금의 감소는 많은 교회들을 재정 파산 상태로 몰 것이고, 결국은 교회 간판을 내리는 슬픈 일이 더욱 급증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제도권 교회의 수가 감소한다고 해서 성도들 개인이 당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아선 안 됩니다. 유럽의 교회에서 보듯이 유형 교회가 크게 축소되는 경우 복음의 확산 또한 더욱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제도권 교회를 매우 중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무튼 한국 개신교는 지금 생사 선택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욕심을 모두 내려 놓고 굶어 죽을 각오로 자기 개혁을 감행할 것인가, 아니면 중세 교회처럼 그냥 욕심대로 계속 잘 먹고 잘살다가 서서히 자멸해야 할까요.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제법 건강하다고 해서 다른 이웃 교회들의 배교적 부패와 타락을 마냥 구경만 하며 방관해도 될까요. 그게 참된 경건이고 진정한 온유인가요. 결코 아닙니다.

이 순간에도 많은 성도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목회자들은 이를 모른체하고 도무지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교회가 아주 평안하다고 합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 제발 소란 좀 피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무속적 ‘복 팔기’와 ‘돈 걷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전혀 소통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양의 탈을 쓴 도적의 무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무허가 불법 ‘면죄부 장사’로 배를 채우고 있는 이 어두운 시대에 강도의 굴혈로 변질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보며 분노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돈을 횡령하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지 말라고 호통치는 교회, 재정 장부를 공개하라고 하면 신천지는 물러가라고 뒤집어 씌우는 교회, 무더기 표절을 하고선 그건 단순한 인용이라고 우기는 교회, 하나님 사업을 빙자하여 돈을 퍼준 후 목사 집안의 가업에 충성하는 교회, 헌금 많이 못 하는 가난한 교인을 직분으로 차별하는 교회, 십일조를 안 하면 사업이 망하거나 중병에 걸린다고 겁주는 교회, 명백한 불의와 배교를 보면서도 침묵하라는 교회, 그러다가 목회자의 부정과 비리가 들통나면 지상의 유형 교회는 어차피 완벽할 수 없으니 사랑으로 서로 허물을 덮자고 무마하는 교회, 그 곳은 그냥 불한당이지 결코 정상적인 교회당이 아닙니다.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아무리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세라 목상처럼 요지부동인 이 교회들을 과연 어찌해야 할까요.

선교 역사 고작 130년만에 스스로 만성 비만과 영적 치매에 들어 더 이상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회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가슴엔 오늘도 갈보리 십자가를 지신 어린양의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말라기 2:13).”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