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이야기 > 아나니아의 죽음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자신과 모두에게 정직하기. 누군가의 부정직한 행동은 모두에게 부여된 공평한 기회를 훼손하고 공정한 원칙의 집행을 방해하는 일이 된다. 거짓 증언으로 사법부의 판결을 방해하거나 조작된 증거로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일은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직은 한 공동체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셈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부정직과 이로 인한 비극적 결말이다.(행 5:1~11)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나타난 두 부부의 음모 사건을 놓치지 않았다.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카툰들’ 중 하나로,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궁전에 있는 시스티나예배당의 직조벽걸이를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그림은 현재 영국 런던의 한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는 르네상스의 획기적인 원근법에 따라 상하좌우 엄격한 대칭 가운데 커다란 타원을 형성하며, 이 사건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묘사했다.
그림의 상단에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행 4:32~37) 오른쪽엔 “한 마음과 한뜻”이 돼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기 위해 자신들의 것을 아낌없이 사도들 발 앞에 내놓으려는 모습이, 왼쪽에는 사도들이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모습이 표현됐다. 단상의 사도들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가운데 정중앙의 베드로는 위엄 있게, 거짓 보고를 하는 아나니아를 정죄하고 있다. 그 옆의 사도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아나니아는 바닥에 쓰러져서 숨지고 있는 상황이며, 좌우에 있는 주위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워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직이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내 삽비라 역시 남편의 파멸을 알지 못한 채 똑같은 거짓말을 하고 똑같은 비극을 맞았다. 이렇듯 한 번의 기회도 없이 즉각적이고 단호한 처벌이 취해진 것은 그만큼 인간 공동체가 거짓과 속임수에 취약하다는 의미이자, 이에 대한 가차 없는 경종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훈은 이것이다. 곧, 정직하지 못함은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누룩처럼 사회를 좀먹어 공동체의 좋은 가치를 무너뜨리고 자멸의 길로 이끈다.
이야기의 역설은 이들 부부의 이름에 있다. 내세우는 것과 실제 행한 모습 사이의 괴리에서 우리는 더 큰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아나니아’는 ‘주는 은혜가 깊으시다’란 뜻이고, ‘삽비라’는 ‘청옥(靑玉)처럼 아름답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린 그들의 이름 뜻과 동떨어진 가증한 행위를 보게 된다. 허명무실(虛名無實). 헛된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는 삶을 산 것이다. 정직, 성실과 진실을 상징하는 사파이어가 삽비라의 이름이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자유 국민 바른 정의 새로운 믿음 소망 사랑 은혜 진리 나눔 같은 이름들이 그 뜻과 가치 그대로 구현되고 있을까. 이름만 은혜롭고 아름다운 교회, 그리고 단체, 사회가 있을 수 있다. 명심하자. “정직한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 바른길로 가지만, 사기꾼은 속임수를 쓰다가 제 꾀에 빠져 멸망한다.”(잠 11:3)
<미학자>금빛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