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년 바보의사 – 안수현
1972년 1.17 출생
대성학원 재수
1991 고려대 의학과 입학
내과 전문의
2003년 군의관으로 입대
2006.1.5 유행성출혈열로 사망
겨우 33년 동안 이 땅에서 살다간 고 안수현형제의 약력입니다. 의료계의 권위자도 아니었고, 유명한 학자도 아니었지요. 그런데 그가 불의의 사고로 떠난 후, 그 청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 청년이 남기고 간 흔적을 널리 알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깊이 있는 성찰의 글들과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기억들, 무엇보다 그가 평생 보여주었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모여서 책이 되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2009년에 출간된 '그 청년 바보의사'입니다. 2013년에는 두 번째 책, '그 청년 바보의사, 그가 사랑한 것들'이 출간되었구요.
안수현형제는 저와 같은 나이입니다. (저는 71이지만 이 친구는 빠른 72더군요.^^) 더구나 저처럼 90년에 대성학원에서 재수했다고 하니, 어쩌면 몇번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같은 반이었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구요.
그렇게 같은 위치에 있던 형제라고 생각하며 그의 글들을 읽으면, 부끄럽다 못해 솔직히 질투가 나기까지 합니다. 머나먼 나라나 머나먼 시대에 있었던,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위인이 아니라 저와 같은 곳에서 같은 시대를 살며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살다간 친구인데 그의 삶은 너무 특별했으니까요. 음악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이나 글솜씨도 감탄스럽고 부럽지만,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섬김은 정말 진지하고 탁월했거든요.
그는 자기가 맡았던 소아 환자의 생일 때 집으로 찾아가 케이크를 주기도 하고, 죽어가는 환자를 밤마다 방문해서 손을 잡고 치유를 위해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에게는 간절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환자들이나 동료들, 교회 제자들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선물 주기를 좋아했습니다. 1년에 선물하는 책이 300권정도나 되었다고 하니 그 양도 어마어마했지만, 그것보다 그 선물들을 그냥 준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들의 상황이나 마음에 맞추어 엄선해서 주었기 때문에 그 책이나 음반들을 통해 사람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사랑이 흘러가는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바쁘다는 의대생활과 인턴생활을 하면서 성경공부 리더를 하고, 대학부 교사를 하고,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흔'팀을 이끌고, 성경공부 끝나고는 제자들이나 후배들을 집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힘들어 하는 후배를 데리고 한강 불꽃놀이를 보러 가기도 하고, 명절에는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러내어 식사를 같이하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연애는 늘 뒷전이어서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기도 했지요. 그의 수첩에는 중보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과 기도 제목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하게 드러냈습니다. 병원장과의 회식에서도 술한잔 입에 대지 않았고, 공부가 밀리고 심지어 유급을 당해도 예배와 섬김을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밥맛없는' 사람일 수 있었지만, 그의 삶을 본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밥맛없는' 사람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수현 형제의 글 하나를 그냥 그대로 옮겨볼게요.
응급실을 돌던 어느 날 새벽 2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저 여기 방학동인데요. 환자가 복막이 터졌다는 것 같거든요. 그 병원 가면 수술할 수 있나요?"
전화를 받으며 내가 고개를 갸웃한 것은 말 그대로라면 응급상황일 텐데 전화 거는 사람의 말투가 너무 덤덤했기 때문이었다. 환자 보호자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오세요. 저희가 봐서 이상이 있으면 수술하게 될 수도 있어요. 아닐 수도 있구요."
환자가 새벽 4시 반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환자는 집에서 온 게 아니었다. H병원에서 온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응급 수술이 시급한 위궤양 천공 환자였는데 H병원을 불신한 환자 보호자가 병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우리 병원으로 옮긴 것이었다.
하필 그날은 응급실에서 자정 즈음에 두 명의 환자를 연속으로 응급수술실로 보낸 날이었다. 아마 수술 팀들은 새벽 2-3시가 돼서야 겨우 눈을 붙이러 갔을 것이다. 그런데 또 긴급 수술환자를 보내야 할 판이었다. 응급실에 있던 내 친구는 나의 승낙이 성급했다고 지적했다. 처음 그런 일을 당한 나는 보호자 말만 곧이들었다가 곤경에 처한 꼴이 되었다.
순간 화가 났다. 보호자의 얕은 생각으로 위중한 상태의 환자가 몇 시간이나 치료가 지체되고 있다는 게 하나의 이유였고, 그로 인해 내가 억울하게 질책을 당할 상황에 처했다는 게 또 하나의 이유였다. 어쨌든 환자 보호자에게 화를 억누르며 설명을 하고 당직실로 뛰어갔다. 답답하고 화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곤히 잠든 주치의를 깨워 상황을 설명하고 응급실로 뛰어내려오는 수 분 동안,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화가 나는가?'
되돌아온 답은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생각했다.
'환자가 치료받는 것과 네가 혼나는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순간 내 머리를 스치는 찬양 한 대목이 있었다.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내가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6층에서 2층으로 뛰어 내려오는 동안 내 안에 있던 분노의 불씨가 꺼져갔다.
'그래, 중요한 건 응급환자가 치료를 받는 것이지, 내가 혼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님이시고 내가 두려워해야 할 분 역시 선배의사 이전에 주님이시다.'..
그 일이 있고 두 주가 지났지만, 당직실에서 응급실로 뛰어내려오던 몇 분간은 매우 소중한 깨달음의 시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을 다스리신 소중한 경험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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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ID는 '스티그마(흔적)'였는데요, 갈라디아서 6장 17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아마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가지게 된 수많은 상처들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몸 뿐 아니라 무수히 겪어야 했던 마음의 상처까지도 포괄하는 단어였겠지요. 바울은 예수님의 손과 발, 몸에 있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을 생각하면서 그 단어를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수현형제는 자기 몸에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흔적을 새기고 싶어했던 것 같구요.
그런 그의 바램을 넘어, 그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았던 동료들과 제자들은 그를 닮은 삶으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후배 의사는 죽음을 앞둔 외로운 환자의 넋두리를 새벽 3시까지 들어 주다가 다음날 브리핑을 망치기도 했고, 이제 교회 교사가 된 그의 제자들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양들을 일대일로 만나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책과 간식을 나눕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싸이월드의 미니홈피에는 그를 사랑했던 혹은 그를 새로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들어와 그의 글을 읽고, 그가 선곡해 놓은 음악을 듣고 무언의 위로를 받으며 돌아갑니다. (오늘 들어가보니, 누군가 지난 달에 쓴 글도 있더라구요.)
그의 글을 엮어서 이 책을 쓴 작가의 마지막 말이 멋지더군요.
"그는 '부재 중'이지만 그의 사역은 '진행 중'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미완성 교향곡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명반(masterpiece)으로 남기셨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되네요.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어떤 교향곡을 쓰고 있을까요?
장영기 목사 /함께걷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