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원수 사랑하라”한 이유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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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함무라비 법전. 170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법전이다. 1901년에 발굴됐다.

 

 

 

예수 “원수 사랑하라”한 이유 따로 있다

 

‘눈에 눈, 이에는 이’.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왕이 선포했던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92~1750년)의 골자다. 법전에 기록된 내용은 더 구체적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면 자신의 눈알도 빼야 한다.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리면 자신의 뼈도 부러뜨려야 한다. 부모를 구타한 자식은 손목을 자른다. 구멍을 통해 남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한 자는 그 구멍 앞에서 사형에 처한다.’

 

근동(近東ㆍ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서아시아 일대) 지역에는 오랜 세월 바빌로니아 왕국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통용됐다. 바빌로니아가 멸망한 후에도 그랬다. 예수도 설교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복음 5장38절)고 언급했다. 당시 유대 사회에도 ‘동해(同害ㆍ똑같은 해를 가함)의 복수법’으로 불리던 이 정서가 녹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역사서를 보면 예수 당시 갈릴리 호수 주위에도 여러 성(城)들이 있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이들은 경쟁 관계였다. 때로는 칼과 창을 들고 서로 싸우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신체 일부를 잃기도 했다. 그러니 원수가 오죽 많았을까. 나의 부모를 죽인 이도 원수고, 형제를 죽인 이도 원수다. 남편이나 처자식을 죽인 이도 철천지 원수다. 그런 원수를 향해 2000년 전의 유대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예수는 달리 말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복음 5장44절)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표정이 어땠을까. 황당하지 않았을까. 복수를 해도 속이 풀릴까 말까한데 말이다. 예수는 “원수를 잊어버려라”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예수의 출생 전부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왔다.

높다란 바위 언덕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벽은 탄탄했다. 유대인들은 항전을 택했다. 폼페이우스는 안식일까지 기다렸다. 율법에 따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 군사 행동도 하지 않는다. 폼페이우스는 그걸 노렸다. 안식일에 그는 성(城)을 공격할 공성 병기를 위해 높은 토담을 쌓았다. 그걸 바탕으로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높은 성탑을 무너뜨렸다. 탑과 함께 성벽이 무너졌고, 벽이 갈라진 틈으로 로마 병사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예루살렘은 결국 함락됐다. 당시 2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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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헤이즈의 1867년작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는 광경을 그렸다.



 

 유대인들에게 로마 제국은 원수였다. 자신들의 거룩한 종교 행위를 전쟁의 아킬레스건으로 활용했다. 그런 로마에 대한 증오심이 오죽했을까. 전쟁에서 패한 후 유대인들은 많은 곡식을 바쳐야 했다. 생활은 갈수록 궁핍해졌다.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생산된 쌀이 일본으로 나가고, 숱한 착취와 수탈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지금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제국주의를 ‘원수’로 여긴다. 당시 유대인들이 품었을 로마에 대한 감정도 짐작할 수 있다.

 

갈릴리의 언덕에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청중은 다들 ‘각자의 원수’를 떠올렸을 터이다. 누구에게는 로마의 군대이고, 누구에게는 자신의 이웃이고, 또 누구에게는 가족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원수들’을 향해 예수는 파격적 행동을 제안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어찌 될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자녀’가 뭘까. 아버지를 닮은 이들이다. ‘신의 속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는 ‘길’이 담겨 있다. 무슨 길일까.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길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길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교회에서 봉사활동만 하면 그 길을 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건 율법만 지키면서 그 길을 간다고 생각했던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착각’과 무엇이 다른 걸까. 예수는 정확하게 지적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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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 백성호의 현문우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