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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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40여일 만에 낙동강 이남 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이 북한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판단을 한다. 8월 1일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 지대를 잇는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낙동강 방어선’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이 바로 칠곡·왜관이었다. 이곳을 거점으로 동북쪽은 국군이, 서남쪽은 미군이 맡았다. 최후 배수의 진인 만큼 전투는 치열했다.



칠곡은 왜관뿐 아니라 다부동 전투와 가산전투 수암산전투 유학산전투 328고지전투 369고지전투 등 수많은 전투가 치러진 곳이다. 그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곳이 왜관 동북쪽 다부동이었다. 다부동은 대구로 가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이 뚫리면 대한민국은 공산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그해 8월 15일 부산에서 통일기념식을 갖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여의치 않자 이날을 ‘대구 점령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에 나섰다.

적은 수중교를 가설해 낙동강을 넘어왔다. 동시에 주력부대를 다부동 일대에 집결시켰다. 전세는 아군에게 극히 불리했다. 병력 규모만 따져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북한군은 2만1000여명의 병력을 다부동 일대에 투입해 대구 점령을 노렸다. 국군과 미군은 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200여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뺏고 뺏기는 전투는 8월의 날씨만큼 뜨거웠다. 다부동 일대의 주요 고지에선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8월 13일부터 12일간 전투가 벌어진 328고지에서는 고지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뀔 만큼 치열했다.



한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나면 전우 절반이 사라지고 없었다. 죽은 전우를 땅에 묻을 시간도 없이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더 끔찍한 것은, 고지 전체가 바위산이기 때문에 호를 파기 어려워 병사들의 시신을 방호막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등중사였던 황대형 노병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맡았던 다부동 전선 서부의 328고지 위에서는 한참 싸움이 벌어질 때 온전한 시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찢기고 해진 시신 조각들이 나무나 바위 등에 걸쳐 있는 상태였다. ‘시체를 쌓는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틀렸다. 부패한 시신은 절대 쌓이지 않는다. 미끄러져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건빵 먹는 것을 보고 고참병인지 신병인지 판단할 정도다. 병사들은 건빵 두 봉지를 배급받았는데, 고참병은 한 알 두 알씩 꺼내서 천천히 먹는다. 신병은 배가 고파 마구 먹는다. 고참병들은 건빵을 먹는 대로 갈증이 몰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천천히 먹으면서 갈증을 피한다. 신참은 허겁지겁 먹고 목이 메어 물을 마시려고 산에서 내려가다가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당시 국군 1사단은 태반이 전라도 출신 병력이었다. 사단의 첫 출발지가 호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병으로 충원되던 병력 대부분은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병력이었다. 말하자면 다부동 전투는 영·호남이 한데 뭉쳐 적을 막아낸 싸움이었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박형수 노병은 이렇게 증언했다. “다부동 그 지역에 328고지라고 있어요. 거기에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너와서 교두보를 확보했어요. 이제 제트기가 와서 네이팜 탄을 쏘고 뒤에서 미군 155㎜ 포가 사흘을 내리퍼부었어요. 푸른 산이 빨갛게 될 정도로 다 타버렸어요. 상부에서 328고지를 점령하라는 작전 명령이 내려와서 공격을 시작했는데 탄알이 비 오듯 떨어지는 거예요.”



류형석의 ‘낙동강’이라는 책에 보면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328고지 정상 주변에 2000여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328고지는 더 이상 인간 세계가 아니었다. 검게 탄 시체,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창자가 터져 나오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시체가 땅바닥에 널려 있고, 나뭇가지에도 걸려 있다.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의 신음과 비명과 절규, 염천의 열기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시신의 배가 ‘펑’하고 터질 때는 수류탄이 날아온 줄 착각하고 또 한 번 놀랜다. 파리 떼가 극성을 부리고, 악취가 진동하여 숨을 쉴 수가 없다.”


 

낙동강 방어선을 끝까지 지켜낸 워커 주한 미8군 사령관.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영웅 워커 사령관은 전황이 불리한데도 다음과 같은 사수 훈령을 내렸다. “우리는 지금 시간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북한군이 먼저 부산을 점령하느냐, 아니면 맥아더 원수가 보내기로 한 증원 병력이 먼저 도착하느냐가 문제이다. 지금부터는 더 이상의 철수나 후퇴는 있을 수 없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부산까지 후퇴한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분의 희생이 있었다. 이 땅의 자유는 대한민국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김재동 목사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