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대한 이해
글 쓴이: 신 장 미
우리가 가장 흔히 듣는 말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 고난이 우리가 잘못 선택함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라면 말입니다. 시편에서 나오듯이 우리가 불순종함으로 고난가운데 들어가게 되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해 고난을 당해도 더 악하게 나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더 악을 행하는 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고난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한 핍박이요 고난이었습니다. 로마는 종교에 있어 너그러운 정책을 펼쳤습니다. 다신교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로마 교황도 경배의 대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일신 – 여호와 하나님 만 인정하니까요. 두 신을 겸하여 섬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로부터도 핍박당하고 로마로부터도 핍박당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한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3:13-15)
일반적으로 선을 행하면 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데도 위협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선인데 사람들 눈에는 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늘 위협과 핍박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아마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너 왜 사서 고생하느냐, 무슨 득이 되는 일이 있다고 예수를 믿어 그 고통과 위협을 당하느냐고, 도대체 무슨 배짱이냐,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느냐 등등…
사도 베드로는 그렇게 질문해 오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말씀을 순종하기로 결정했기에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기꺼이 고난을 받고자 했습니다. 즉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운 것이 아니라 순종하려고 했기에 고난이 온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선배들은 이 땅이 아닌 영원을 바라보았습니다. 로마시대 그리스도인들을 화형하는 화형장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차례가 되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화형당하기 위해 얼른 뛰어 나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고난을 한가지로 규정지으면 무리가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고난과 이스라엘 사람들과 시편에서 보여지는 고난은 분명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고난 그리고 시편에서 보여지는 고난의 대부분은 잘못 선택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았을 때 처하게 되는 고난으로 깨달으면 순종을 배우게 되고 고난을 깨닫지 못하면 더 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삶에서 언제나 잘못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서서 도움을 청하면 언제나 구원하셨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다윗은 잘못 없이 무고히 고난 당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그럴 때 다윗은 스스로 원수 갚지 않고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윗이 죄를 범하고 고난을 자초하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잘못을 고했고 자비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죄로 인한 열매가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세우셨고 그 언약은 법이기에 만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고난을 주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법이 있고 법이 집행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법에 따라 즉 말씀하신 언약에 따라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낙망하지 않고 소망가운데 살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즉 사랑입니다. 늘 잘못하지만 잘못했어도 진정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살 길을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복들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여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무당들이 말하는 신들처럼 변덕이 심한 하나님, 우리가 정성을 들이면 하나님 마음을 바꿀 수 있고, 돈을 내면, 무언가 기쁘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받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 나를 교훈하기 위하여 먼저 치실 수 있다는 생각, 내 뒤에서 내가 잘못 하나 안 하나 지켜보시다가 잘못하면 한대 탁 치시는 하나님 등등…
하나님은 항상 변함없으십니다.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을 통해 먼저 말씀으로 경고하셨고 그것을 듣지 않을 경우 고난이 왔습니다. 항상 먼저 말씀으로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즉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교훈하기 위해 율법도 주셨고 그것도 안되기에 선지자들을 지속적으로 보내어 귀막고 듣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경(오늘날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함께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훈하시는 제 일의 원칙은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말씀으로 교훈하시고 책망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
그 말씀을 떠날 때 고난과 많은 문제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교훈하기 위해 고난을 알아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셔도 우리가 무시하고 우리가 잘못된 것을 선택해서 고난 가운데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분을 따라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되어지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긍휼이 늘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설명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장애자, 어려운 환경에 태어난 경우 등… 내가 그렇게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빌레몬서에 나오는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기억합니다. 빌레몬이라는 좋은 주인에게 악을 행하고 도망한 노예였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을 만났고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는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이라고 추천했습니다. 예수 믿고 놀라운 변화가 있었던 경우입니다.
환경에 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련된 약속들로 인해 아버지의 공급하심과 돌보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모두에게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논쟁거리를 찾으려 하기보다 필요가 있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줄 수 있고 사랑을 나눠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4:16-21)
18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he Anointed One, the Messiah] to preach the good news (the Gospel)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announce release to the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send forth as delivered those who are oppressed [who are downtrodden, bruised, crushed, and broken down by calamity],
19 To proclaim the accepted and acceptable year of the Lord [the day[l]when salvation and the free favors of God profusely abound].
우리는 영원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고 인정받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살았는가 입니다. 악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오는 고난을 겪을 수도 있고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면 그 믿음은 소망이 있기에 그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아니라 빛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5-39)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녀도 늘 찬양이 끊이지 않았던 다윗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땅의 복들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글 쓴이 : 신장미 집사 / Bethan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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