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16>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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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국제대학 제자들과 함께

 

원우현 박사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온누리교회 사역장로, 몽골국제대학교 부 총장겸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그리고 그의이름앞에는 수많은 단체 장의 직함이 붙지만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직함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몽골 선교사다.

 

<역경의 열매  16 >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미디어학부와 국제언론연구원 개설 기념 국제심포지엄

 

몽골에 파견되어서 하늘의 지상 명령을 어떻게 감당할 있을지를 염려하던 나에게, 2016 9 2일의 개원 축하 국제심포지엄은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하신지를 보여주고 몽골 사회에 존재감을 알리는 기회였다.

 

몽골 국제대학원 메인 연단에는 당시 KBS 이사장 이인호 박사를 비롯한 한국과 미국에서 방문한 언론학자와 몽골 언론학자들, 그리고 몽골 미디어계 고위층 정치인들이 자리를 했다.

권오문 총장의 인사말 세미나 개회를 선언하는 개회사를 원우현 원장이 했다. 당시 국제언론연구원 원장과 부총장의 자격으로 실질적인 주관자였기 때문이다. 개회사에 이어서 국내외 저명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오송 몽골대사와 몽골한인회 회장은 물론 B. Galaarid 몽골 언론인연합회 회장(Mongolian Confederation of Journalists) 축사를 했다.

몽골국제대학은 열악한 재정으로 캠퍼스를 건립하면서도 본관 메인 홀은 아담하고 푸근한 기독 선교대학의 분위기가 있는 장소로 꾸몄다. 대부분 MIU 행사가 열리는 곳인데 그날도 바로 메인 홀에서 개원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영어로 진행된 기조연설과 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발표자의 명성이나 발표문의 수준이 신설된 미디어학부와 국제언론연구원이 지향하는 미래를 몽골 교육계에 홍보하기에 충분했다.

그날 심포지엄이 함의하는 의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한국 언론학 교육 현황을 한국 언론학자가 분석했다. 그리고 몽골 언론학자는 몽골 언론의 특징을 발표했다. 급변하는 언론 환경에 새로 탄생한 미디어학부와 국제언론연구원을 비롯한 몽골 언론계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에 대한 해법을 모색했다.

둘째는 몽골 언론계에 인터넷 미디어가 유행되면 몽골의 전통 미디어인 신문 방송 통신 분야가 어떻게 대응하면서 대책을 마련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숙제를 풀어 나갔다.

셋째는 몽골 교육기관 전체가 국가 정책기조를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거시적으로 접근해 나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과 미국과 몽골에서 교육자와 언론학자와 언론인, 정부 관리들이 모처럼 자리에 모여 국제적으로 전문지식과 정보를 자유롭게 교환하며 친선을 도모하는 공론의 장을 마련한 점이 역사적 의의를 더해주었다.

원우현 부총장의 개회사에 이어 이인호 KBS 이사장님이국가 건설과 미디어라는 주제로 청중이 감명을 받은 기조연설을 했다. 이인호 박사는 개인적으로는 100 노모의 급환과 KBS 이사장직으로 경황이 없으신 와중에도 참석하여 학술논문 같은 연설문을 능숙하게 전달해 주셨다. 격조 높은 영어로 미디어의 사명을 제시하면서 몽골 사회에 도전을 주면서 지성인의 메시지로 몽골 청중을 사로잡았다.

한국 측에서는, 원우현 원장과 이창근 교수가미디어교육의 최근 경향과 신설된 MIU MC 학부의 교육과정 방향이란 주제로, 몽골 저명교수인 M.Munkhmandakh(뭉크만다) 박사가몽골 미디어 저널리즘의 현환과 특성이란 주제로, 미국 Syracuse 임준수 교수는 ‘The Impact of Digital Social Media on the Media Industry’ 주제로 각각 논문을 발표했다.

몽골 측에서는 몽골국립대학 저널리즘학과 Dr.M.Zulkaphil 교수가몽골 저널리즘 교육의 경향과 쟁점이람 주제로, MIU MC 학과에 당시 조교수로 부임한 USC 영화 미디어박사인 조은선 박사가 ‘Korean Television Drama Jewel in the Palace and Hallyu’ 논문을 각각 발표했다.

나는 주님께 깊이 감사하면서 폐회사를 했다. 7분가량의 폐회사를 영어로 마무리하면서 모든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하는 이웃의 협력 때문이라는 잊을 없었다. 특히 고촌장학재단 이사 황규승 명예교수, 온누리교회의 이재훈 목사와 윤영섭 장로, 그리고 김영대 회장 등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라, 내가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이사야 43:19)

 

<역경의 열매 17>

자이승에 나타난 쏘는 어린 예수

 

온누리교회에서 사역장로가 70 후에 장기 전문인선교 실행에 착수를 하는 경우는 75세의 원우현 장로가 최초란다. 수석 부목사님이 몽골로 떠나기 전에 교회 정기예배 인사드릴 시간을 마련했다고 연락을 주셨지만 나는 극구 사양하고 교인들 앞에 서지 않고 조용히 선교 일정을 시작했다. 다만 선교 총괄담당 K목사가 심의위원회에 선교비전을 얘기하라고 해서 인사말을 전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MIU에도 온누리교회 소속 전문 선교사 부부가 봉직하고 있고 두란노선교란 단체와 선교사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K목사는 행정 총괄로서 늙은 선교사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선교의 띠를 연결할 있도록 하는 어떤 소개나 조치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소개하는 몽골인을 통하여 교회를 만나게 주시려고 기획하고 계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선교를 쉽게 하려면 지역 한인회라든지 먼저 선교사의 소개라든지 내가 사회적 자산처럼 확보한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현지인을 접촉하여야 말도 쉽게 건널 있고 선교도 있는 보통이다. 그런데 내가 부총장인 몽골국제대학의 일과는 20 이상 몽골에 적응해온 선교 대학으로서 짜인 속에 기능만 맞추어 나가야 하는 보이지 않는 제약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나이에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몽골 현지인을 만나서 몽골인들 개척 교회에 뛰어 들어가 기독교인이 극소수인 몽골 땅에서 영혼 구원을 하게 주십시오.”라는 외로운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주님은 나의 작은 소망보다 훨씬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내가 몽골에 3 근무하는 동안 몽골인들만 모이는 미세하고 부족하지만 게르 개척교회에 참여할 기회를 주시고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설파할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계시록교회, 아멘축복교회, 믿음의길교회를 잉태하고 지탱하는 일을 돕게 하셨다. 하나님은 작은 교회를 통해 몽골 선교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변함없이 신실하신 사랑의 빛을 비춰 주셨다.

 

그중 할리웅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아멘축복교회에서 경험한 나의 몽골에서의 부활절 때의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이승 야외 예배 구름 가운데 두둥실 있는 쏘는 예수님 명료한 모습이 나타난 기이한 사건에 관한 설명이다.

아멘축복교회는 그해 부활절 예배를 100 계단을 오르면 전승기념탑이 보이는 관광지에서 드렸다. 자이승 전승기념탑은 몽골이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본에 승리한 전쟁을 기리는 역사적인 관광지다. 아침에 비가 내리고 초행길이라 나로서는 찾아가기가 불편했다. 고비사막 춥고 건조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몽고골인들은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쓰지 않고 그냥 비를 즐기며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관습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은 자이승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는데 바람이 어찌 세찬지 신도들은 서로 붙들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겨우 올라갈 정도였다. 아이스크림 선물 소식에 몰려온 어린아이들이 어른을 앞서면서 신바람 나게 속력을 내며 거뜬히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사이 신기하게도 비는 멈추고 모든 교인이 아이들과 함께 부활절 예배를 올렸다.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찬송과 기도가 드려지고 말씀이 선포되었다. 할리웅 목사님의 뜻을 따라서 성도들이 함께 자리를 옮겼다. 울란바토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성도들은 몽골 민족의 구원과 울란바타르에 세워진 교회의 부흥을 위해 통성기도를 하면서 울부짖었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몸을 억지로 가누면서 바람에 날아가는 소리를 제대로 살리려고 크게 목청을 돋우었다. 울란바타르 사회에 만연한 잡신이 떠나가기를 기도했다. 위에서의 통성기도로 성령의 바람이 집집마다 몽골 사람 사람씩 찾아가 정결케 하길 간구하였다.

우리가 통성기도에 몰두하고 있는 순간 교인이 신기한 장면이 하늘에 나타난 것을 스마트 폰으로 찍었다며 감격해서 뛰어왔다. 사진에는 영화로운 천국 백성과 어린 예수님의 모습을 구름이 담겨 있었다. 모두가 사진 구름으로 나타난 신기한 형상을 보고 제각기 마디씩 하였다. 합창이나 하듯이 몽골 성도들은어린아이가 활을 쏘는 모습 같다.” 했다. 몽골에서 활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강력한 무기로 여겨져 왔다. 다시 영상에 집중해 자세히 보니 어린 예수님이 활을 겨누고 있는 자세가 더욱 뚜렷했다.

나는 다음 주일예배 사진을 확대 인화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배포하고 간증했다. “우리의 통성기도 응답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 주셨듯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언약의 징표였습니다. 천국엔 어린이 마음으로만 들어갈 있습니다. 어린 예수가 천국을 가리키듯 정조준하신 화살은 순간 이미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우리 죄를 씻어 주셨지요.

 여러 몽골 성도 여러분도 아멘축복교회의 예배에 참여하여 성경 말씀을 믿고 주님께 순종하면 천국을 통과하는 축복의 은혜가 매사에 넘치실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 25~26) 

 

<역경의 열매 18>   원우현 온누리교회 사역장로

김일성대학 신문학과 61 졸업생과의 대화

 

아멘축복교회는 그렇게신비한 쏘는 어린 예수사진을 보여주며 예수님이 시작하신 교회다. 바로 교회의 할리웅 목사님은 동독의 방직공장에 선발되어 외국 문물을 접해본 여성이다. 한국 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을 탐구하다가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 언어 능력과 지혜를 모친께 물려받아서 한국어, 중국어를 보통 이상으로 구사한다. 자매의 맏이로 제일 총명했으며 여동생은 몽골 관광 사업을 운영하여 부유한 편이다. 유물사상을 신봉하는 어머니 오윤체츠크 여사에게는 할리웅 목사가 마음에 짐이 아닐 없다고 한다. 사상적으로도 다를 아니라, 몽골 국영방송 40 경력의 대기자인 오윤체츠크 여사 집에서 할리웅 목사가 10 아들과 함께 더부살이를 하고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어느 나는 빈민 구제 바자회를 끝내고 할리웅 목사님과 같은 버스를 탔다. 목사님 짐이 너무 많아 집에까지 들어주게 되었다. 짐을 들고 아파트를 들어서니 영국 고전풍의 서양식 의상을 어머니가 안방에 앉아 계셨다. 바로 멋진 전문인 풍의 세련된 미인이 몽골 방송계에 알려진 모친이시다. 순간 나는 오히려 집안이 어두운 기운으로 있어서 숨이 막히고 코를 찌르는 영적인 악취를 체감했다.

어머니, 분이 대한민국에서 오신 원우현 장로이십니다. 저의 아멘축복교회를 도와주면서 장로 역할을 감당해주셔서 하늘이 보낸 같아요. 오늘도 빈민 구제 바자를 후원해주셨지요. 제가 짐이 많아서 들어주시려고 집에까지 들르게 됐습니다.” 할리웅 목사의 소개에 평양 사람의 말투와 자태를 그대로 보이면서 오윤체츠크 여사가 인사를 했다. “그렇게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남조선에서 오셨다고요? 반갑습니다. 몽골에는 , 어디서, 무엇을 하러오셨습니까?”

원우현 장로입니다. MIU에서 신문방송을 가르칩니다. 불쑥 들러서 아무런 선물도 가져 왔는데 예수님을 믿는 교인들은 기도로 하늘의 선물을 전하는 예법을 존중합니다.” 대답하고 모친이 거절할 틈도 없이 과감히 머리에 손을 얹고 통성기도를 시작했다. “예수님의 보혈로 오랫동안 집에 둥지를 모친의 주체사상과 유물사관 같은 어둠의 영은 떠나갈지어다. 세상 권세로 짓눌린 할리웅 목사님의 영권을 회복하여 주십시오. 집안에 예수님이 주인 되게 하시고 하늘의 사랑이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기습적으로 손을 얹고 한국말로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고나니 모친은 부동자세로 순간적으로 숙연해지면서, “무슨 선물을 머리에다 주십니까?”하고 웃는 얼굴로 목사에게 장로가 지금 무슨 말씀을 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할리웅 목사의 통역을 들으시더니 나는 오직 따님이 살고 고생하는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고 실토를 하셨다. 교회 생활을 마땅치 않게 여겨오면서 목사님의 사상적 일탈을 질타해오던 몽골의 앵커로서 인기가 높은 오윤체츠크 여사로는 당연하고 솔직한 고백이었다. 나중에 친근해진 들었지만 그녀는 북한 고아들이 몽골로 피난을 왔을 몽골에서 돌보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여사는 북한의 선발 과정을 거쳐 몽골인으로는 최초로 1961 김일성대학 신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면서 공산주의 언론관으로 선전 선동에 세뇌된 북한식 엘리트 엘리트였다. 김일성대학에서도 특출해서 졸업 북조선 몽골 대사관에 근무할 정도였다. 북조선몽골 김일성 방문 동행했으며 한국 노태우 정부 몽골 대통령이 한국 방문 시에도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북한의 풍물이 생활 속에 녹아있는 김일성 수령의 신봉자였다. 평양 말투는 물론 자태는 평양 인기 배우를 만난 기분이 정도였다.

나는 75 나이로 몽골 선교지로 떠나기 , 세상의 좋은 것을 내려놓으려 애썼다. 특수 교육을 대신해서 선교에 관련된 서적을 두루 섭렵하려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특히 선교 대상자마다 가장 잘하고 즐거워하는 장기를 자랑할 있도록 광장을 마련하는 물고기를 물로 인도하듯이 유용한 선교 접근법이라는 생각이 났다.

오윤체츠크 여사님, 오늘 실례도 많이 했습니다. 부탁 말씀 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번 학기 MIU에서미디어 이론과목을 강의 중입니다. 전부 몽골 학생들인데몽골 미디어 환경과 생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관해서 저는 도대체 아는 바가 없으니 40 몽골국영방송(MNB) 체험담을 후학들에게 들려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주 좋은 제안이십니다. 교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도 몽골 미디어의 장래를 위해서 내가 나서야겠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고린도후서 10:4)

 

<역경의 열매 19>

한국언론법학회 창립

 

한국언론법학회는 2002 5 창립되어서 지난 21년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국내외에서 신뢰 받는 학회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언론학 분야와 법학 분야의 일부로 여겨오던 언론법을 잡종 강세의멘델의 법칙대로 서로 다른 분야를 교집합하면 학문적으로나 사회기여도 면에서 상승의 효과가 기대된다는 비전을 실천해온 셈이다.

 

인터넷 시대로 급변하면서 언론과 미디어의 연구 대상이 확산되어서 언론학이나 법학의 변방에서 미진한 연구자들의 개인적인 학문적 자각과 열망만으로는 전혀 감당할 없었다. 미디어 생태계는 양적인 변화를 넘어서 질적인 혁명의 시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대망의 2000년대를 점치고 예측하는 사회과학의 세미나 주제가 범람하고 있을 나도 미국 Ohio Arcunum Wind of Chapel 현지 답사하면서 미래 비전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언론법학회의 영어 명칭은 KLEP(Korean Society for Media Law, Ethics and Policy)이다. 명칭이 시사하듯이 학회는 미디어 , 미디어 윤리, 미디어 정책을 기본적인 축으로 상호의존적으로 연구하면서 언론법의 독립 영역을 구축하려고 기획했다. 그러나 학회가 21 동안 쌓아온 궤적을 뒤돌아서 살펴보면 누구의 특별한 의지 때문이 아니라 미디어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적자생존의 순리에 따라서 언론 정책분야 연구와 언론 윤리분야 연구는 거의 쇠퇴했다. 반면에 언론학자와 법학자들의 연구와 상호 교류는 유독 생기를 띠고 있고 학회가 국내외 정상의 지위를 지속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결과 Korean Society for Media Law 한국언론법학회가 명실상부한 학회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본인이 초대 회장으로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여 사회적 연구 기관으로 정착했다. 전에 물론 창립 준비를 위하여 원우현, 김진홍, 유일상, 박지동 언론학자들이 언론법학회는 학문 연구뿐 아니라 수용자 주권시대에 부응하는 언론자유 실천을 하자는데 뜻을 모으고 적극적으로 창립에 나섰다. 2002 2 8 언론법학회 창립선언문을 공포하였다. 진정한 언론의 자유 창달과 언론 민주화의 구현, 언론문화 발전과 수용자 주권의 확대를 위해서 새로운 언론법학회를 창립한다.” 창립 취지를 언론과 사회 분야에 전파하였다.

사단법인 등록 절차로서 언론법 분야의 저명 학자를 발기인으로 권유하는 일을 내가 초대회장으로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분야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는 성과를 얻었다. 언론학자, 법학자 아니라 정책학, 윤리학 전공 학자도 참여하여 KLEP 다운 면모를 일시에 갖춘 셈이다.

언론학계에선 원우현, 김진홍, 유일상, 박지동, 이구현, 이창근, 김영석 교수가, 법학계에선 박용상, 권영설, 성낙인, 한위수, 박선영, 이인호, 양삼승, 안상운, 김성수, 이재상, 성문용 교수가, 윤리학 정책학 분야는 김득중, 김상배, 정정길, 이성백 교수가 발기인으로 동참하였다.

사람으로서는 당해 없는 공격도 사람이면 능히 막아낼 있으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전도서 4:12)

 

 

<역경의 열매 20>

 

철우언론법상 학술상과 올해의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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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8 11 21 철우언론법상 인터넷 심사를 참여하였다. 심사과정이 면대면이 아니라 어색했지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수상자가 정해지면 기념세미나를 수상작을 주제로 개최하는 것이 21 전통이다. 2022년에도 8 26 프레스센터 19 기자회견장에서 철우언론법상 시상식과 기념학술세미나가 개최될 예정이며, 주제1,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위헌 여부 주제2, ‘명예훼손에서 사실과 의견의 구별 정해지고 이에 상응하는 사회자 발표자 토론자가 미리 공지되었다.

초기엔 기금도 미약하고 철우상의 사회적 명성도 미미하여 상금 대신 신문방송에 게재되도록 노력하고, 기념 세미나를 통해 최신 법적 쟁점을 앞서 진단하여 학계와 사회에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회장단마다 총체적인 의지를 보여 연륜을 쌓아왔다.

올해는 정재황 심사위원장의 면밀하고 정확한 심사위원회 사회에 모두 편하게 관례에 따라서 심사절차를 밟아갔다. 라테 호스. 나는 최고령자로 그간 심사준칙이 공정 절차를 발언으로 재확인시켰다. 초대 심사위원장 권영성 서울대 명예교수님의 치도 양보 없는 엄격한 심사의 본질, 언제나 대상 논문이나 저서를 누가 썼든지 전공 나이 그동안 업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논문과 저서나 판례가 언론법 연구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해 내용만 심사한다는 것이다. 최종 심사후보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심사 단계에서는 작품의 주인공의 배경을 참고해서 투표할 뿐이었다. 치열한 토론은 권장하면서 단계마다 무기명 비밀투표로 다수결이나 2/3의결로 했다. 기록을 남기는 규례가 21 인터넷 심사장에도 이어지고 있는 나는 확인했다.

회고하건대, 2005 4 수상작은 대법관을 역임한 김재형 서울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언론에 의한 인격권 침해에 대한 구제수단이었다. 언론법만 연구하는 학자도 많은데 단편의 민법학자에게 주는 합당한지 이론도 있었지만 권영성 위원장님은 저자가 정치학자든 민법학자든 문제가 전혀 없다고 결정했다. 철우 언론법상은 1~2 내에 학문적 가치가 뛰어난 논문이나 저서 그리고 판례에 수여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2015 14 때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서 최종심에 오른 당시 김시철 부장판사와 심석태 SBS 뉴미디어부장에게 공동 수여를 했다. 저서로는 2006 5 언론분쟁과 저자인 당시 윤재윤 서울고법부장판사와 함석천 춘천지법 판사에게 수상의 영예가 돌아갔다. 언론법학계에선 당시 생소하던 실무자들이어서 회자가 기억이 난다.

상의 수상을 가장 영광으로 여기고 수상을 언론에 홍보할 아니라 시상식장을 가득 메우는 겸손하고 여유로운 수상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 부인이나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썰렁하게 수상 사실을 감추려는 듯한 학자풍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예컨대, 2002 1 수상자인 박용상 헌법재판소 처장은 부인과 딸은 물론 헌법재판소 직원들이 참석해서 만원이었던 축하 현장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2004 3회엔 김옥조 교수가 ‘미디어 윤리’로 철우상을 수상하셨다. 현승종 국무총리 비서실장 시절 절대 신임을 받아 총리가 현장까지 오셔서 축사까지 해주셨다. 교수의 서울법대 16 동문들, 동아일보 유경연, 서울대 최명 교수 이름은 지금 기억하지 못하지만 십여 명이 시상식을 끝까지 지켰던 기억도 난다. 2003 2 수상자 박선영 교수는 한복을 차려입은 시어머니와 부군인 민일영 대법관 등이 참석하여 가족이 경사를 기렸다.

특히 주위에 깊은 감동을 수상자는 2019 18 염규호 교수의 경우였다. J. Marshall First Amendment Chair Professor 교수는 AEJMC회장을 역임한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다. 그동안 18 수상자 다음이 차례인가 얼굴을 붉히면서 사양할 수도 있는 위치였다. 불구하고 교수는학문적 보상 가장 영예로운 철우상이라고 감사하면서 겸손하게 내게 보내준 회신이 기억에 남는다. 멀리 미국에서 시상식에 참석하여철우상이 자신의 일생에 명예로운 상입니다.”라고 시상 소감에서 반복하는 순간에 모든 청중이 미국 대학자의 인격과 겸손을 느끼면서 우레 같은 박수를 치던 기억도 새롭다.

철우상이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상으로 우뚝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대법원 판결이나 헌법재판소 판결 언론관계 법적 쟁점에 관해서 한국의 언론법 이론은 물론 언론의 자유 신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판결문을올해의 판결 선정하기 때문이다. 벌써 시상한지 20년이 지났다. 2022년은 철우언론법상 20주년을 기념하는 깊은 해이다. 그래서 철우언론법상 학술상과 철우언론법상 올해의 판결을 1~20회까지 집대성하여 기념 책자를 발간하였다. 그중 20회에 걸친올해의 판결수상작은 한국 언론법의 특유한 판결의 흐름을 간파할 있을 아니라 한국 고유의 언론법 이론을 재정립하는데 긴요한 판례 자료가 것이라 확신한다.

자신을 회고해 보아도 대학에서언론법 강의 하는 동안 한국 판례 내용은 강의에 거의 없고 미국 수정헌법 1조를 주로 얘기했던 기억만 남는다. 20세기에 만연한사상의 자유시장원리 내세우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가급적 반대하는 미국 판례만 강의했다. 사전억제이론, 막연하면 무효이론,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같은 미국 판례를 준거로 삼았다. 철우상의 20년간올해의 수상작 영어로 번역까지 된다면 한국언론법학회의 세계적 위상은 더욱 빛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기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