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그들의 은혜를 잊으랴

 

 

어찌 그들의 은혜를 잊으랴

 



 

 

5월에 접어 들자, 주위가 녹색으로 변해 가고 상쾌한 기온이 계속되니, 각 사회단체에서는 각종 모임을 앞 다투어 마련하고, 여기저기서 초청하는 행사들이 봇물처럼 터졌다.

효행상 시상 및 문화 축제”,  걷기 대회 및 음악회 ”,  메모리얼 데이 시가 행진 ”,  참전용사 보은 만찬회”, 골프, 등산, 야유회 등,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어머니 날, 아버지 날까지 겹쳐,  5월 한 달이  바쁘게 훌쩍 지나갔다.

그 중, 보훈에 관련된 행사에 참여하다 보니, 62년 전 우리민족이 겪었던 6.25 골육상잔의 참상을 다시 회상하며 많은 상념에 젖게 했다.

그 당시, 초등학교 6학년 어린 시절이라, 군대에 끌려 가지는 않았지만 적 치하 3개월 동안 서울에서 북한 공산당의 억압 통치를 직접 목격 하였고, 전쟁의 무서움과 참상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오죽, 적 치하의 압제가 싫었으면 중공군이 서울에 재 입성하기 직전, 그 당시 서울 시민의 90% 이상이,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남부 여대로 피난길에 나서, 고난의 행렬이 끝 없이 이어졌다. 파괴된 다리 철 난간에 파리 떼처럼 달라 붙어 기어서 도강 하거나. 열차 지붕에 빼곡히 올라 타 서로 껴안고 또는 옆에 다닥다닥 매달려 서울을 탈출했다.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죽음의 탈출 이었다.  서울시내는 인적은 거의 없고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만 우왕좌왕하는 무서운 유령 도시로 변 하였었다.

이런 현상은 적도 평양 철수 때에도 대동강 철교 난간을 기어서 도강하는 탈 북 행렬을 찍은 기록 사진에서 여실히 볼 수가 있었다.  북한 인구 1,200여 만 명 중 거의 1/3에 달하는 300만 명 이상이,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공산 독재에서 탈출 했다.

 

치안유지 정도의 경 무장한 한국군은 소련제 탱크, 중화기로 무장한 북괴군에게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밀려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한 달도 안돼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대한민국 존립이 촌 각을 다툴 때,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한국이 간신히 소생 할 수 있었다.  스탈린모택동김일성 식 적화를 막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도약 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그들은, 전혀 알지도 듣지도 못한 나라와 국민을 돕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한국 전 3년 동안 미군 연 인원 180만 여명이 참전하여, 54000 여명이 사망하고, 12만 여명이 부상, 포로 또는 실종 되었다.  그들의 막대한 희생이 우리 조국을 구해 주었고, 현재 세계 13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큰 동력 이었음을 누가 부인 할 수 있겠는가 ?

기회가 오면 그 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 해야 인간의 도리라는 부담감을 갖고 살아 왔다.

 

우리교회 장로 한 분이 이번 현충일을 전후해서 인근에 생존 해 있는 한국 전 참전 용사들을 교회에 초대하여 그 당시 참전 용 투를 치하하고 감사의 예의를 표하는 것이 지역 봉사 차원에서도 좋지 않겠느냐는 제의에, 목사님, 장로님, 제직 자 분들이 동의 하고 기꺼이 호스트가 되어, 30여 명의 참전 용사와 지역 귀빈 들를 초청하여, 6 16일 저녁에 아 콜 라 연합 감리교회에서 보은 만찬 모임을 갖게 되었다.

초청인사 중에는 모친이 한국계인 뉴저지 주 상원의원인 Mr. Kevin O’Toole 과 그의 부친인, 참전 용사, Cedar Grove 시장도 있었다.

양국 국기 입장, 경례에 이어, 양국 국가를 이지영 양이 Solo로 불으면서, 식이 시작되었다.  목사님의 환영사와 향군 지대장의 답사, O’Toole 시장이 참전용사를 대표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술회가 이어 지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여러 귀빈들의 축사가 뒤 따랐다.

특히, O’Toole 의원의 한국인 모친이 미국 정착 과정에서 겪었던 마음고생과 자식들을 훌륭하게 양육한 이야기를 약간 어눌한 한국말로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최 후진국, 가장 가난 한 나라 출신 18세 어린 처녀가 미국인과 결혼하여 인종차별이 심했던 50년도 중반에 미국 지방 소도시에 신접 살림을 차렸다. 주위는 물론, 심지어 시집 식구들에게서 조차 냉대를 받았다니, 그 어린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 파겠는가 ?

차별 심한 지방에서 쫓겨 나듯이 부부가 뉴저지로 이사와, 7남매를 낳고 모두 훌륭히 키워서, O’Toole 집안을 상원의원 1, 3명의 시장을 배출 한 지방 명문가로 만들었다.  남편의 흔들림 없는 사랑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 었다고 했다.  대하 소설의 훌륭한 주제 같은 감동 실화였다.

 

모두 자리를 잡고, 여성 신도들이 손수 마련한 음식을 들면서 서로 추억담을 주고 받으며 즐거운 담소가 이어졌다.  동시에 교회에서 잘 준비한 여흥 프로인, 소프라노 독창, 전통 무용 화관무, 부채춤, 독무가 차례대로 펼쳐질 때마다 탄성과 박수가 이여 졌다.

특히 소프라노 이지영 양이 뉴 아리랑과 독일민요 두 곡을 맑고 뛰어난 성량으로 아름답게 불렀을 때는 천상 요정의 노래를 들은 듯 모두 기립하여 뜨거운 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연호했다.

내 빈 5, 6명이 자리 한 Table 마다 교회 제직 자 한 분씩 끼여 앉아, 그들의 추억담을 듣고 질문도 하면서 분위기를 살리는 호스트 역할을 했다.

 

참전 당시 그들의 나이는 대개 18-20세로 고교 졸업 후 징집 되어 신병 훈련을 끝내자 마자 한국으로 파송 되었단다.   사람들이 너무 낙후된 환경에서 가난하게 사는데 놀랬고, 전장에 투입 되어서는 전투에 경험이 없는 신출 내기라 총알이 쉴 새 없이 귓전을 스치고, 적의 포탄이 비오 듯 진지에 떨어 질 때는 이제 여기서 죽는 구나하는 생각으로 기가 질려서 옴짝 달싹을 할 수가 없었단다. 매일 죽음을 보았고 죽음이 내 곁에도 와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떠나지 않아, 하나님에게제발 살려 달라 고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만을 꼭 잡고 하루 하루를 버티었다고 했다.

특히 밤 중에 불어 닥치는 매서운 추위는 적의 총탄 보다 더 무서웠다.

이런 공포의 나날을 보내며 전쟁 분위기에 익숙 해 저 갔단다

현재 한국의 기적 같은 발전상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고, 그 당시 고생이 큰 보람으로 다가 온다고 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한국인 이라면 그들의 은공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

이 행사가 일회로 그치는 줄 알았는데, 목사님이 폐회사에서 매년 마련할 예정이니, 내 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꼭 참석 해 달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거의 모든 교회가 해외 선교활동은 경쟁적으로 펼치며 중요 연례 행사로 주력하나, 주위 보살핌은 피상적으로 모양만을 갖춰 단발적으로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프카니스탄 등지에서 어설픈 선교로 국민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것보다 우선 주위를 둘러 보고 손길을 뻗치는 것을 일반 신도들이 선호 한다고 보며, 그것이 신도들의 일반적 정서가 아닌가 생각 해 보았다.

오늘 만찬은 가슴이 뿌듯한 감흥과 큰 보람을 느끼게 한 모임이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아콜라 교회 목사님, 장로님들 제직자 분들께 이런 흐뭇한 보은의 자리를 마련 해 주시고 이를 연례 행사로 결정 한 것에 감사를 드린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나라, 미국 과 그 국민에게, “ God Blessing America “ 은 영원하리라

 




 

NJ 록 회,  편집장, 김 상 준.